365일 한시-문징명文徵明 畫雪景설경

畫雪景설경/명明 문징명文徵明

寒鎖千林雪未消 숲에 추위 서리어 눈 녹지 않았는데
何人跨蹇過溪橋 누가 나귀 타고 계곡 다리 건너가나
莫嫌緩㘘詩難就 시 짓기 어렵다 천천히 가길 꺼려 마소
玉樹瓊枝應接勞 아름다운 겨울나무 감상하기도 벅차네

문징명, 畵雪景 軸, 지본담색, 108.7×29.4, 고궁박물원

이 시는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이 그린 《설경을 그리다[畵雪景]》 족자의 상단 좌측에 문징명이 직접 지어서 써 놓은 것이다. 이 그림은 화풍이나 필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가 그려진 1532년 문징명이 62세에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고궁박물원에서 나온 도록 《명사대가특전 문징명》에서 설명하고 있다.

문징명, 關山積雪圖 卷(부분), 지본설색, 253×445.2, 고궁박물원

문징명은 설경을 많이 그렸는데 두루마리의 경우 산봉우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길과 강이 구불구불 그에 어울리며 이어지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이 족자처럼 산봉우리가 첩첩 쌓인 그림도 있다. 두루마리에서 옆으로 이어지던 그림이 족자로 오면 아래위로 산이 겹겹이 쌓인 모양으로 나타나서 마치 만고의 강산이 무진장하게 펼쳐진 대자연 속을 여행한다는 호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이 그림에는 잘려나간 너럭바위 위에 절벽이 높이 솟아 있고 산길이 화면 외부를 빙 돌아 다시 화면 중앙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고 있는 구도이다. 전면에 큰 노송이 있어 무슨 고매한 은자라도 살고 있는 분위기가 나는데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아래로 질펀하게 흘러 트인 공간감을 느끼게 해준다. 화면의 하단 가운데 다리가 하나 있고 그 다리에 지금 절뚝이는 나귀를 타고 가는 시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방한모를 쓴 시인의 모습과 뒤따르는 동자는 다소 메마른 붓으로 선을 그어 고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눈은 하얗게 비워 둔 채, 시인의 옷과 개울의 반석 모서리, 그리고 벼랑은 다소 붉은 계통의 옅은 색을 칠하고 소나무를 새파랗게 그려 은은하게 그림에 생기를 준다. 위에 있는 마을에는 사랑방의 탁자를 슬쩍 보이고 또 집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간결하게 그려 그림의 풍정을 더하고 지금 이 시인이 그리로 찾아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의 3째 구는 맹호연의 고사를 쓴 것이다. 맹호연이 겨울에 장안 근처에 있는 파교(灞橋)를 지나가다가 좋은 시상이 떠 올라 시를 지은 일이 있었다. <장안에 가다가 눈을 만나 시를 짓다,[赴京途中遇雪詩]>가 바로 그 작품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소식이 〈초상화 잘 그리는 수재 하충(何充)에게 주다[贈寫眞何充秀才]〉라는 시에서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서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를 읊느라 어깨가 산처럼 솟은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는 시를 지었다. 이 때문에 <설중기려(雪中騎驢)>라든가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제목으로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이 시의 3구는 바로 이 맹호연의 고사와 그 고사를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만든 소식의 시를 바탕으로 쓴 것이며, 그림의 중요한 소재인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을 <설경을 그리다[畫雪景]>라고 한 것은 이런 그림의 핵심 요소를 빠뜨린 것이므로 <설중기려(雪中騎驢)> 등으로 새로 붙여야 마땅하다.

문징명, 雪山圖 卷(부분), 지본설색, 26×521.9, 고궁박물원

5구에서 완비(緩㘘), ‘고삐를 느슨하게 한다.’는 말은 천천히 간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고 시를 지으며 천천히 간다는 의미이다. 겨울이라 날씨도 춥고 시상도 얼어붙었으니 고삐를 바짝 쥐고 목적지로 빨리 갈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보라고 말한다. 눈이 쌓인 나무와 그 가지들을 보면 너무 아름다워 그걸 보느라 피로할 지경일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 보면 소나무와 여러 나무에 눈이 소복이 올라 앉아 있고 길에도 눈이 수북하여 뒤 따르는 동자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나귀를 타고 한 번 가 볼만하게 느껴진다.

아래 시가 적힌 그림 1 외에 두루마리 그림 두 폭에서 설중기려(雪中騎驢) 부분만 소개한다. 그림 2를 보면 빨간 옷을 입고 나귀를 타고 높은 계곡 위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 맞은편에는 부러진 소나무와 가지런한 대나무가 있어 설경을 더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소나무 아래 낙엽과는 다른 꽃이 핀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매화가 아닌지? 또 하나의 그림에도 말 탄 사람이 막 다리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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