畫雪景설경/명明 문징명文徵明
寒鎖千林雪未消 숲에 추위 서리어 눈 녹지 않았는데
何人跨蹇過溪橋 누가 나귀 타고 계곡 다리 건너가나
莫嫌緩㘘詩難就 시 짓기 어렵다 천천히 가길 꺼려 마소
玉樹瓊枝應接勞 아름다운 겨울나무 감상하기도 벅차네
이 시는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이 그린 《설경을 그리다[畵雪景]》 족자의 상단 좌측에 문징명이 직접 지어서 써 놓은 것이다. 이 그림은 화풍이나 필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가 그려진 1532년 문징명이 62세에 그려진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고궁박물원에서 나온 도록 《명사대가특전 문징명》에서 설명하고 있다.
문징명은 설경을 많이 그렸는데 두루마리의 경우 산봉우리가 계속 이어지면서 길과 강이 구불구불 그에 어울리며 이어지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이 족자처럼 산봉우리가 첩첩 쌓인 그림도 있다. 두루마리에서 옆으로 이어지던 그림이 족자로 오면 아래위로 산이 겹겹이 쌓인 모양으로 나타나서 마치 만고의 강산이 무진장하게 펼쳐진 대자연 속을 여행한다는 호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이 그림에는 잘려나간 너럭바위 위에 절벽이 높이 솟아 있고 산길이 화면 외부를 빙 돌아 다시 화면 중앙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고 있는 구도이다. 전면에 큰 노송이 있어 무슨 고매한 은자라도 살고 있는 분위기가 나는데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아래로 질펀하게 흘러 트인 공간감을 느끼게 해준다. 화면의 하단 가운데 다리가 하나 있고 그 다리에 지금 절뚝이는 나귀를 타고 가는 시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방한모를 쓴 시인의 모습과 뒤따르는 동자는 다소 메마른 붓으로 선을 그어 고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눈은 하얗게 비워 둔 채, 시인의 옷과 개울의 반석 모서리, 그리고 벼랑은 다소 붉은 계통의 옅은 색을 칠하고 소나무를 새파랗게 그려 은은하게 그림에 생기를 준다. 위에 있는 마을에는 사랑방의 탁자를 슬쩍 보이고 또 집에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간결하게 그려 그림의 풍정을 더하고 지금 이 시인이 그리로 찾아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시의 3째 구는 맹호연의 고사를 쓴 것이다. 맹호연이 겨울에 장안 근처에 있는 파교(灞橋)를 지나가다가 좋은 시상이 떠 올라 시를 지은 일이 있었다. <장안에 가다가 눈을 만나 시를 짓다,[赴京途中遇雪詩]>가 바로 그 작품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소식이 〈초상화 잘 그리는 수재 하충(何充)에게 주다[贈寫眞何充秀才]〉라는 시에서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서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를 읊느라 어깨가 산처럼 솟은 것을.[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는 시를 지었다. 이 때문에 <설중기려(雪中騎驢)>라든가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제목으로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이 시의 3구는 바로 이 맹호연의 고사와 그 고사를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만든 소식의 시를 바탕으로 쓴 것이며, 그림의 중요한 소재인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을 <설경을 그리다[畫雪景]>라고 한 것은 이런 그림의 핵심 요소를 빠뜨린 것이므로 <설중기려(雪中騎驢)> 등으로 새로 붙여야 마땅하다.
5구에서 완비(緩㘘), ‘고삐를 느슨하게 한다.’는 말은 천천히 간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주변의 경치를 구경하고 시를 지으며 천천히 간다는 의미이다. 겨울이라 날씨도 춥고 시상도 얼어붙었으니 고삐를 바짝 쥐고 목적지로 빨리 갈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보라고 말한다. 눈이 쌓인 나무와 그 가지들을 보면 너무 아름다워 그걸 보느라 피로할 지경일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 보면 소나무와 여러 나무에 눈이 소복이 올라 앉아 있고 길에도 눈이 수북하여 뒤 따르는 동자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나귀를 타고 한 번 가 볼만하게 느껴진다.
아래 시가 적힌 그림 1 외에 두루마리 그림 두 폭에서 설중기려(雪中騎驢) 부분만 소개한다. 그림 2를 보면 빨간 옷을 입고 나귀를 타고 높은 계곡 위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운치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 맞은편에는 부러진 소나무와 가지런한 대나무가 있어 설경을 더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소나무 아래 낙엽과는 다른 꽃이 핀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매화가 아닌지? 또 하나의 그림에도 말 탄 사람이 막 다리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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