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월 12일, 구졔강 선생이 사료학(史料学)과 고고학(考古学)의 결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 전기에는 고경(古经)과 고서 정리를, 청 후기에는 고기(古器)․고물(古物) 정리를 중시함으로써 점차 사료학을 고고학에 결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건륭 시대에 청야오톈(程瑶田)은 《통예록(通艺录)》이라는 책을 지어서 실물을 이용한 사료정리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이때부터 사료학을 고고학과 결합시키는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청야오톈은 고물을 고찰하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전국 각지의 농촌과 고물을 보존하고 있는 대가(大家)를 찾아다녔다. 그 뒤를 이어 우다청(吴大澂)이 이런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사료학과 고고학을 어떻게 결합시키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자.
1) 옥기(玉器) : 고대 중국에서는 옥기가 많이 유통되었는데, 실제로 이것은 석기시대의 유물이다. 상․주 시대에는 옥이 장식품과 예절용품(礼节用品)으로 유행했으며, 몸을 장식하는 데나 사람을 만날 때 선사하는 예물에도 쓰였다. 또한 제왕이 관리를 임명할 때 도장 대신 옥을 징표(信物)로 사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제후가 천자(天子)를 알현할 때도 옥을 지녔는데, 천자가 자신의 옥으로 제후의 것을 대조하게 되면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사람이 죽은 후에는 입 속에 옥을 넣어 매장했다. 그러므로 대량의 옥이 필요했는데, 이렇게 많은 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중원(中塬) 지역에서는 옥이 별로 많이 나지 않았으나, 서북쪽의 허톈(和阗)이라는 지역에서는 많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중원과 서북 지역을 왕래하는 교통이 매우 일찍부터 발달하게 되었다.
청대에 우다청(吴大澂)이 《고옥도고(古玉图考)》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고대 옥기(玉器)의 고증학적 연구를 고대 역사 연구와 연계시켰다. 이 책에는 각양각색의 고대 옥기가 그려져 있다. 《주례(周礼)》에는 천자가 사용하던 각종 옥기의 길이와 크기, 그리고 제후와 하급 관리가 쓰던 옥기의 길이와 크기가 기록되어 있다. 우다청은 《주례》에 기록된 옥기의 크기와 길이에 의거하여 자신이 본 고옥(古玉)을 관찰, 비교함으로써 주대의 1척(尺)이 청대의 6촌(寸)에 상당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대체로 고대의 1척은 현대의 2분의 1척과 비슷하다.
우다청은 또 《권형도량실험고(权衡度量实验考)》를 저술했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100무(亩)의 땅을 경작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 그는 고증을 통하여 고대의 100무가 후대, 즉 청대의 30무에 상당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2) 도장(印) : 고대 제왕이 사용하던 도장을 새(玺)라고 불렀다. 청대 사람들은 고새(古玺)와 고인(古印)을 대량으로 수집했다. 함풍(咸豊) 연간 산둥의 웨이현(潍县)에 우다청과 친구 사이인 천졔치(陈介祺)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사(进士)였지만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각종 고대 기물을 수집함으로써 그 지방 사람들이 가짜 고물을 제조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며 그 풍조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천졔치는 고인을 가장 많이 수집하고 고대 동기 또한 많이 소장한사람으로 《십종산방인거(十锺山房印擧)》를 저술했다. 이른바 ‘십종산방’이란 자신이 10가지 고종(古锺)을 소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천씨는 항상 우다청과 왕래하며 고기물․고인 그리고 고사(古史)에 관하여 토론했다. 《십종산방인거》에서 그는 전국시대로부터 한대에 이르는 각종 도장에 대해 논술했다. 예로 든 도장에는 관직명이 매우 많아 고대의 각종 관직을 고찰할 수 있다.
3) 봉니(封泥) : ‘인니(印泥)’ 또한 많이 발견되었다. 주에서 한에 이르기까지는 목판 위에 편지를 썼다. 그러므로 쓰마쳰(司马迁)의 시대에는 편지를 한 번 쓰려면 많은 판자가 필요했다. 다시 말하면 다 쓴 편지 위에 다시 목판을 덮고 줄로 사방을 묶어 매듭을 만들었다. 매듭 위에는 점토로 만든 진흙 덩어리를 놓고 그 진흙 위에 도장을 찍어 다른 사람이 사사로이 열어 보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봉니다.
옛날에는 편지마다 인니(印泥)가 있었다. 고대의 도장은 음문(阴文)으로 글자 부분이 오목하여 일단 진흙 위에 누르면 양문(阳文)이 되어 돌출한 글자가 생기게 된다.
산둥 사람 우스펀(吴式芬)은 《봉니고략(封泥考略)》을 썼다. 이 책에서 작자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고인(古印)이나 인니를 연구하여 고대의 관리 제도를 분명하게 했다. 24사(史)에는 각 왕조의 큰 관직만을 기록해 놓았으므로 봉니와 이에 관한 연구는 역사서의 결함을 보충할 수 있는 것이다. 산둥의 지난(济南) 박물관에는 400점의 봉니가 소장되어 있다.
4) 부(符) : 호부(虎符)란 동(铜)으로 만든 호랑이 모양의 도장이다. 고대에는 제왕이 반쪽을, 장군이 나머지 반쪽을 가지고 있었다. 제왕이 군사를 일으키려 할 때는 사람을 보내어 호부를 지니고 가서 명령을 내렸다.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장군이 있는 곳에 가면 장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반쪽을 그 사람의 것과 맞추어 보고, 그것이 맞을 경우 왕의 명령을 승인하고 명령에 따라 행동에 옮겨야 했다.
호부의 부절면(部切面)은 평평하지 않고 약간 높고 낮은 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두 개의 반부(半符)를 일단 맞추어 보면 진위(眞僞)를 구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일반 관리는 부를 사용하지 않았다. 고부(古符)를 연구하는 것 역시 고물을 통해 고대 역사를 고찰하는 것이다.
5) 절(节) : 절은 부와 비슷한 점이 있다. 즉 황제가 사자(使者)를 보낼 때 동으로 만든 절 위에 편지를 썼던 것이다.
최근 초나라의 《악군계절(鄂君啓节)》이 발견되었다. ‘계’는 사람의 이름이다. 고대의 절 위에 있는 문자를 통해 그 시대의 산천도로(山川道路)와 기타 고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6) 도기(陶器) : 도기는 고대 공업 상 최초의 발명이다. 도기는 방수(防水) 기능이 있었으므로 집집마다 사용했다. 집집마다 도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인류가 정주 생활을 할 수 있었음을 나타낸다. 도기의 출현은 대략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오래 된 도기는 신석기 시대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인류 문화의 진보와 인류 사회의 발전에 따라 도기 제작도 변화하여 왔다. 양사오(仰韶)문화 시기에는 도기를 제작하는 기술이 자못 성숙했다. 초기의 가마는 밀폐가 엄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워 내면 항상 홍색․홍갈색 또는 잡색(杂色)의 도기가 되었다. 양사오문화 시기에 이르게 되면 가마 내부의 온도를 1000도까지 높여 구웠으므로 홍색 도기가 많았고 겉에는 흑색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를 ‘양사오 채도(仰韶彩陶)’라고 부른다.
‘양사오’는 허난(河南) 몐츠현(渑池县)의 촌락 이름이다. 양사오 채도는 선사(先史) 시대인 하(夏)․상(商) 이전의 기물로서 지질학자가 발견했다.
이 채도 상의 오채(五彩)와 화문(花纹)은 후대의 것과는 다르고 오히려 중앙 아시아 아나(阿那 : 현재의 구 소련 지역)의 고대 도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당시 동서가 이미 교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양사오 채도에는 꽃과 기하학적인 도안, 그리고 간단하며 정제된 의미 부호가 있으며, 이때의 도기 가운데 어떤 것은 매우 크다.
뒤에는 또 ‘용산흑도(龍山黑陶)’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다원커우(大汶口) 문화, 룽산 문화(龍山文化) 시기의 도기로서 이 지역은 산둥 지난(济南) 부근이다. 룽산 흑도는 산둥과 허난 일대에서 출토되었다. 채도는 서쪽의 몇몇 지방과 서북부 지역에서, 흑도는 동쪽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 문화가 한층 더 진보함에 따라 도기 제작 기술도 새롭게 발전되었는데, 구워 낸 ‘룽산 흑도’의 대다수는 회색 도기와 흑색 도기로 매우 얇고 매끈한 단각도(蛋壳陶)다.
또한 인쉬(殷墟)의 도기도 발견되었다. 그것은 바로 허난․안양(安阳)에서 발견한 고대 인쉬의 백도(白陶)로 남방과 쑤저우(苏州)에서도 발견되었다. 백도를 구우려면 가마의 온도가 1200도에서 1400도에 달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 문화상의 또 다른 진전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채도(彩陶)가 나타났고, 다음에는 흑도(黑陶), 또 그 후에는 백도(白陶)가 나타났다. 상대(商代) 사람들은 이미 채도를 고물(古物)로 여겼으므로 그 전에 다른 고물은 없다.
백도 위에는 돌출된 무늬가 있는 반면에 흑도에는 무늬가 없으며 채도의 무늬는 그린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세 시기, 즉 채도, 흑도, 백도 시대의 사회 문화를 보여 주고 있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러 도기에 문자가 나타났지만 도기 자체는 매우 조잡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사회 문화가 더욱 발전해 동기(铜器)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도기 위에는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기도 했다.
시대가 오랠수록 도기의 색채는 더욱 뛰어나다. 예전에는 제왕 역시 도기를 사용했으니, 일반 백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대 이후에는 도기에서 유약(釉药)으로 채색한 자기(磁器)로 발전했다.
명기(明器)는 신(神)이나 죽은 사람에게 바칠 때 쓰던 도기로 ‘冥器’라고도 한다. 이런 도기에는 작은 집이나 말(马) 그리고 일상용품 등의 물품이 있었다. 이것들도 고대 각 시대의 생활을 반영한다. 현재 발견된 명기 중에서는 전국 시대의 것이 가장 이른 것이다.
《맹자(孟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자 가로되, ‘처음에 용(俑)을 만든 자는 자손이 없었더라! 왜냐하면 사람을 본떠서 사용했기 때문이다(始作俑者 其无后乎! 为其象人而用之也).’
이 말은 곧 용을 만든 뒤에는 왕이 산 사람을 순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용을 순장품으로 썼다는 것은 고대에 산 사람을 순장했음을 반증한다. 상대(商代)의 어떤 묘는 발굴한 뒤에 보니, 산 사람 100명을 죽여 순장한 거대한 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후에는 사람을 적게 죽이기 위해 진흙으로 용을 만들어 순장하기도 했다.
용은 각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당대(唐代)의 용이다. 채마(彩马), 관리(官吏) 용, 노래하고 춤추는 용, 모두 훌륭하다. 이 용들은 모두 유약으로 채색되어 있다.
뤄양(洛阳)에서 발굴된 고묘(古墓)에서는 수백 개의 용이 나왔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의 순장 노예가 매우 많았음을 나타낸다. 고대의 의복은 보존되기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이들 용으로부터 당시의 의복을 추측해 낼 수 있다. 당대(唐代) 용인(俑人)의 차림새를 통하여 당대 사람들은 무릎까지 오는 짧은 옷을 많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서술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고사를 고증할 때 고대의 도기(古陶器) 연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 비와 묘지명(墓志铭) : 명은 묘 안에 있는 것을 말하며 비는 묘밖에 세운 것을 말한다. 고대 대묘(大墓)의 양쪽에는 석궐(石阙)이 있었다. 그 궐에는 묘에 묻힌 사람에 대해 적혀 있다. 궐이란 경계하고 지킨다는 뜻이다.
비에는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록해 놓았다. 한대에는 직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그 위에 적힌 글자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비에는 또 구멍이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제사 때 쓸 양(羊)을 묶어 두는데 이용된 것이다.
묘 앞에 비와 궐이 있게 된 것은 모두 한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른바 ‘천궐(天阙)’이란 황궁의 중문 양옆에 있는 누각(楼阁)을 말한다.
묘지명도 한대에 생긴 것이다. 명(铭)은 돌로 된 것으로 연구할 만하다. 그 형상은 거북과 비슷하며 위 아래로 나누어, 아래에는 글자를 써넣고 그 위에 나머지 반쪽을 덮었으나, 후대에는 나누지 않았다.
차오차오(曹操)가 도읍으로 정한 허난성 린장현(临漳县)의 동작대(铜雀台) 부근에는 고묘가 제법 많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차오차오가 가짜로 만든 72의총(疑冢)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묘 안에 있는 기록을 통하여 모두가 북위(北魏) 사람들의 묘라는 것이 밝혀졌다.
북위 때에는 사람이 죽으면 묘 앞에 비를 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른바 ‘위비(魏碑)’라는 것은 대부분 묘우(庙宇) 안에 있는 비다.
동작대에 있는 북위 고묘의 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姓)이 위안(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원래의 성은 퉈바(拓跋)였다. 이들은 귀족이었으므로 묘가 굉장히 컸다.
이러한 종류의 고 명문(古铭文)을 고증하면 북위 황제와 귀족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 이를테면 그들은 한화(汉化)하기 위해 소수 민족 선조의 성(姓)인 퉈바(탁발(拓跋))성 역시 일률적으로 고쳤다. 이들 명문은 믿을 만한 문자로 되어 있으므로 역사적인 사실들을 증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