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추위 初寒/송宋 육우陸游
江路常逢雨 강가 길에선 늘 비를 맞았는데
山城早得寒 산성에는 일찍 추위가 찾아오네
蘭凋初解佩 난초 말라 이제 몸에 안 차지만
菊老尚加餐 국화는 시들어도 더 먹게 되네
節物知何負 철에 따르는 식물이 무슨 죄랴만
情懷自鮮歡 나의 마음 자연 기쁨이 없어지네
浮生看已熟 뜬구름 같은 세상 분명히 알거니
不必夢邯鄲 굳이 한단의 꿈을 꿀 것이 없어라
이 시는 육유(陸游, 1125~1210)가 49세 때인 1173년 음력 9월 말경에 가주(嘉州)에서 지은 시이다. 가주는 지금의 중경(重慶)으로 육유는 이 당시 가주 통판(嘉州通判)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육유는 <초한(初寒)>이란 제목으로 13편의 시를 썼는데 이 시는 그 중 한 편이다.
강의 길에서 비를 많이 만났다는 것은 육유가 가주로 오기 1년 전에 성도에 안무사 참의관(安撫司參議官)으로 가서 비를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검문 가는 도중에 가랑비를 만나다[劍門道中遇微雨]> 같은 시에 그런 내용이 보인다.
육유가 본래 시에 써 놓은 원주에 의하면 가주(嘉州)에는 숭란(崇蘭)이 있는데 8, 9월에 한창 핀다고 한다. 난초가 가주에 많아 이렇게 쓴 것을 밝혔다. 난초가 시들어 몸에 차고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국화는 시들어도 아직 차로 마실 수 있다는 말이다. 가을 난초를 몸에 차고 국화꽃을 먹는다는 것은 모두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서 비롯된 말로 고결하고 향기로운 삶을 지향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이소경》에 “가을 난초를 엮어 몸에 찬다.[紉秋蘭以爲佩]” 라는 말이 있고, 또 “저녁에 가을 국화의 꽃을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라는 구절이 있다. 난초가 말라 지금 안 찬다는 말은 조금 전까지는 찼다는 말이고, 국화는 아직도 많이 먹는다는 말은 곧 있으면 못 먹는다는 말이다.
늦가을이 되어 난초에 이어 국화도 시들어 간다. 287회에 소개한 시인 원진(元稹)이 <국화>에서 말한 것처럼 국화가 시들고 나면 더 이상의 꽃도 없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초목 화훼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나의 마음을 이제 붙일 곳이 없어 허전할 뿐이다. 여기서 지(知)는 부지(不知)의 의미로 맹호연의 시에 ‘꽃잎은 얼마나 떨어졌을까[花落知多少]’에 사용된 지(知)와 같은 용법으로, 뒤에 나오는 구문을 의문문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글자이다. 부(負)는 ‘짐을 지다’는 뜻에서 파생되어 ‘등지다’, ‘저버리다’를 지나 ‘죄’라는 의미가 있다.
한단몽(邯鄲夢)은 당나라 때 심기제(沈旣濟)의 전기소설(傳奇小說) 《침중기(寢中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인간세상의 부귀영화가 모두 일장춘몽처럼 덧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나라 때 노생(盧生)이 한단(邯鄲)의 객점에서 도사 여옹(呂翁)을 만나 자신의 궁곤한 신세를 한탄했다. 여옹이 청자 베개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면서 “이 베개를 베면 소원대로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베개에는 구멍이 나 있었는데 노생이 들여다 보다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다가 꿈을 깨고 나니 객점 주인이 짓고 있던 조밥이 아직 다 익기 전이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조밥이 채 익기 전에 꾼 꿈이라는 의미로 황량몽(黃梁夢)이라고도 하는데, 진한(陳翰)이 쓴 대괴궁기(大槐宫記)에 나오는 남가일몽(南柯一夢)도 이와 유사하다. 이런 대목에서는 육유가 현실적인 성격임을 보여 준다.
육유는 흔히 남송 제일의 애국 시인,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시를 보면 세상에 달관한 태도로 화훼에 마음을 붙이는 한적한 시 세계를 보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중하는 한 방편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시 세계가 폭 넓은 것 역시 짐작할 수 있다.
365일 한시 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