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3

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3

3. 《홍루몽》 작자의 종족과 해석 사이의 관계

1) 《홍루몽》과 작자 결정론

앞서 살펴본 색은파 저작에 따르면 《홍루몽》의 작자는 사실 해석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훗날(1921년) 후스가 〈《홍루몽》고증〉을 발표한 것도 작자의 신분을 통해 《홍루몽》이 서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한 것이었다. 그는 그 글에서 색은파의 방법이 ‘수수께끼 풀이’이고 ‘견강부회’라고 비판하면서, 《홍루몽》에 대한 고증은 “믿을 만한 자료에 의거해서 이 책의 저자가 대체 누구이고 저자의 사적과 가계는 어떠하며, 책을 지은 시대는 언제인지 고증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표현으로 보건대 후스는 색은파에 대해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후스가 건립한 ‘신홍학’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전략으로서 ‘작자 결정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색은파와 마찬가지로 작자의 신분에 집착하여 학설을 세우는 것이었다. 훗날 후스의 영향을 받은 위핑보나 저우루창 같은 ‘신홍학가’들은 더 나아가 작자의 해석 역할을 확정했다.

2) 신홍학의 ‘기인(旗人) 작자설’

후스가 고증을 한 본래 의도는 단지 ‘저작권’을 분명히 하려 한 것일 테지만, 이후의 사태는 오히려 복잡하게 발전했다. ‘저작권’의 위력은 아주 신속하게 해석의 영역으로 스며들어서 많은 소설 연구자들도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정했다. 예를 들어서 루쉰(魯迅, 周樹人: 1881~1936) 역시 《홍루몽》의 모델이 작자 조점(曹霑)이라고 지적하면서 차이위앤페이의 관점을 불신했다. 그리하여 심지어 후스의 논적으로서 ‘반만설(反滿說)’을 주장하는 연구자들까지 작자의 문제가 관건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조설근’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자가 기인(旗人) 신분이라는 것은 그 후 수십 년 동안의 역사적 해석(historical reading)을 주도했다. 물론 후스의 고증 이후 모든 비평가들이 작자 문제를 처리하려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은 ‘작품의 자율성(autonomous)’을 강조하면서 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홍루몽》의 작자’와 관련된 해석 영역에서 후스는 의심할 바 없이 ‘조설근’을 ‘부활(rebirth)’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로 평론가들이 조설근을 ‘취소’하려면 상당한 힘을 쏟아야 했다.

(1) 후스의 연구와 해석의 전환: 작자의 ‘탈취’는 곧 해석권의 탈취이다

“이 책의 저자가 대체 누구이고 저자의 사적과 가계는 어떠하며, 책을 지은 시대는 언제인지 고증”하는 것이 〈《홍루몽》고증〉(개정판)의 중심 내용이다. 이전의 색은파는 모두 조설근을 편찬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후스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본래 《홍루몽》의 작자였다. 설정이 달라지자 《홍루몽》에 대한 해석에도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후스는 “이런 자료들(조설근 개인과 가계에 관한 자료)을 보면 아마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서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자서전’이라는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그는 다섯 가지 증거를 들었다. 이 다섯 가지 ‘중요한 증거’는 네 번째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작자의 의도와 소설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한 가지로 귀납될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소설 안의 문장을 인용하여 작자 의도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증거는 제1회의 시작 부분 즉 “작자 스스로 말하기를[作者自云] ……또 스스로 말하기를[自己又云]”을 인용하고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제1회에서 돌이 한 말(“자신의 일과 정리[自己的事體情理]”, “내가 이 반평생 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我這半世親聞親見]”)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모두 작자가 저작 의도를 스스로 말한 것으로, 아주 ‘명백’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후스의 세 번째 증거는 그가 집안일에 대해 ‘스스로 서술[自敍]’한다는 작자의 의도를 어떻게 건립했는지를 더욱 잘 보여준다. 《홍루몽》 제16회에는 황제의 강남 순시에 대해 길게 논하는 장면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전에 태조 황제가 순시한 것을 따라서 순시하자 가씨 집안에서는 소주(蘇州)와 양주(揚州) 일대에서 한 차례 황제를 접대했고, 강남의 진(甄)씨 집안에서 네 차례 접대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후스는 여기서 말하는 진씨 집안과 가씨 집안이 모두 실제 역사에서 조(曹)씨 집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역사상 강희제가 강남을 여섯 차례 순시했고 조인(曹寅)이 네 차례 접대했는데, 《홍루몽》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거의 언급하기 않다가 여기에서만 엄숙하게 제기하기 때문에 작자의 의도를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 조씨 집안에서 황제를 네 차례나 접대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고 성대한 일이기 때문에 조설근이 자기도 모르게——어쩌면 의식적으로——자기 집안의 가장 사치스러운 이 성전(盛典)을 얘기했을 것이다.

후스가 ‘가장 중요한 다섯 번째 증거’라고 여긴 것은 ‘조설근의 역사와 그 집안의 역사’였다. 이 ‘가장 중요한 증거’는 또 가보옥이 반드시 몰락하게 되고, 가씨 집안이 반드시 쇠락하게 된다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보옥의 몰락에 대해서 후스는 단지 《홍루몽》 첫 부분에서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고[一事無成]” “한 가지 재주도 없이 반평생을 영락하여 살았다[一技無成, 半生潦倒]”와 같은 구절을 인용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작자가 ‘스스로 서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가정한 다음 작자의 실제 처지를 가지고 이야기의 결말을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가씨 집안의 쇠락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논술했다. 그의 논술 맥락은 여전히 조씨 집안의 사적(事蹟)을 앞세운 다음 《홍루몽》 안의 문장(제72회에서 태감이 돈을 요구한 일과 제53회에서 가진[賈珍]이 오진효[烏進孝]에게 집안에 수입은 적고 지출은 많다고 얘기하는 것, 제72회에서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마련한 것)을 인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작자의 의도를 이렇게 추측한다.

《홍루몽》은 조설근이 ‘실제 사실을 숨긴’ 자서(自敍)이기 때문에, 자잘한 일임에도 재삼재사 자기 집안이 부귀했다가 가난해지는 상황을 묘사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후스가 채용한 분석 방법이 ‘전기적 비평(biographical criticism)’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비평 방법은 작자의 생애에 관한 자료들에 도움을 받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다. 이전의 색은파는 작자를 이용하려면 작자가 ‘은어’를 만들었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야 파자(破字)랄지 수수께끼 풀이 등등의 수단으로 방대한 책의 문장을 해석하고 또 책 밖에서 무수한 역사적 사실들을 가져와 자신의 견해에 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스의 전기적 비평은 조씨 집안의 역사적 사실에만 한정되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외연(작자의 가계와 생애)이 색은파에 비해 좁았지만, 그의 해석과 작자 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긴밀해졌다. 이 때문에 그의 해석은 세인들의 눈에도 특별히 믿을 만한 것처럼 보였다.

〈《홍루몽》고증〉(개정판)은 주로 작자의 저작 의도와 소설 자체의 관계를 강조하기 때문에, 색은파의 ‘반만설’처럼 작자의 종족을 중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후스 역시 작자 종족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도자들에게 조씨 집안의 쇠락 역사에 주목하라고 하면서 3가지 요점을 지적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팔기세가(八旗世家)의 부유하고 화려한 문학예술 환경이다. 그는 팔기세가의 독특한 점을 이렇게 묘사했다.

부귀한 환경과 문학예술 환경이 합치된 경우는 당시의 한족들 가운데도 없었고, 당시 팔기세가 가운데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당시의 한족들 가운데도 없었”다는 구절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얘기하면 팔기세가인 조씨 가문과 소설 속에 묘사된 가씨 집안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어 ‘자서전’설의 외부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됨과 동시에 색은파의 유민 저서설을 암중에 부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홍루몽》고증〉(개정판)은 1921년 11월 12일에 쓴 것인데, 당시까지 후스는 아직 자신이 고증한 작자의 신분을 근거로 색은파를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2년 5월 10일에 쓴 〈《홍루몽고증》발문〉은 제2절의 제목이 “차이졔민 선생의 토의에 답함[答蔡孑民先生的商榷]”인데, 여기서 이렇게 썼다.

이전까지 《홍루몽》에 대해 쉽게 견강부회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전 논자들이 모두 ‘작자의 생애’라는 큰 문제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조씨 집안이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환경에 처해 있었음을 몰랐기 때문에 모두들 조씨 집안이 황실 가정, 적어도 명주(明珠) 같은 재상 집안을 가리키지 않을까 의심했습니다. 조씨 집안이 팔기에 속한 세가라는 걸 깊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이 만주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은 작자의 가계와 종족을 토대로 색은파의 반만설에 대한 반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후 위핑보, 저우루창 같은 신홍학가들도 이 새로운 작자 관념으로 색은파를 공격했다. 저우루창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후스는 그에게 소설은 결국 소설이지 역사가 아니니까 너무 융통성 없이 보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이 증명하듯이 후스는 다른 사람이 “조씨 집안을 통해 가씨 집안을 증명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최초에 후스 계열의 학자들과 색은파 반만설 사이의 논쟁점은 ‘작자의 종족’이라는 문제에 달려 있었다. 다음에서는 위핑보와 저우루창의 구체적인 주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반만설에 대한 위핑보 비판

일찍이 1921년 7월 23일에 위핑보는 구졔깡(顧頡剛: 1893~1980)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다른 《홍루몽》 연구자)이 바른 길을 잃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먼저 편견을 가지고 《홍루몽》을 읽는다. (예를 들어서 차이위앤페이 선생은 스스로 민족주의를 견지하기 때문에 조설근도 역시 그걸 아주 굳건히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조씨 집안은 한군기[漢軍旗]인데 그를 만주족에 반대하며 명나라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인물이 되라고 억지로 핍박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위핑보의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색은파는 미리 편견을 갖고 있다. 둘째, 작자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반만설은 성립될 수 없다. 이른바 색은파의 ‘편견’이란 시대사조와 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일 터인데, 이 점은 위잉스(余英時)가 이미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 혁명〉에서 제기했고, 나중에 류멍시(柳夢溪) 또한 그를 응용한 자세한 해석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주장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위핑보가 색은파가 그(조설근)를 “만주족에 반대하며 명나라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인물이 되라고 억지로 핍박”한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색은파의 마음속에는 기인 작자라는 개념이 전혀 없고, 따로 한족 작자관을 가져다가 “만주족에 반대하며 명나라 왕조의 멸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견해와 배합한다.

둘째, 색은파는 조설근을 개편자로 여기면서 또한 그를 한족으로 여겼다. 가령 차이위앤페이는 그를 명나라를 애도하는[悼紅, ‘紅’은 곧 ‘朱’씨의 명나라] 사람으로 여기고, 덩쾅옌은 그에게 ‘유민의 마음’이 있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위핑보의 말은 일부분만 맞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위핑보는 《홍루몽변》(1923)에서 차이위앤페이의 설명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 견강부회했고 편견이 담겼다고 비판하기는 했지만, 또한 “작자가 결국 이런 뜻이 없었는지는 사실 알기 어렵고,” “(조설근이) 반드시 만주족을 배척하고 명 왕조를 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는 할 수 없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홍루몽연구》(1953)에서는 또 차이위앤페이의 설명에 확실한 증거가 없이 견강부회했고 편견이 담겼다는 비판을 삭제했다. 이걸 보면 어쩌면 위핑보는 자신이 억울하게 차이위앤페이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 ‘반만설’에 대한 저우루창의 맹공

후스의 자서전설에 깊이 영향을 받은 또 한 명의 《홍루몽》 연구자인 저우루창의 색은파에 대한 공격은 훨씬 맹렬했다.

조세선(曹世選)으로부터 6대 후손인 조설근에 이르러 집안이 쇠락했지만 조설근의 책에 적힌 바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집안은 음식이나 옷차림, 가정 예법이 전부 만주족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결코 한족을 사칭할 수 없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청 왕조가 개국한 후 100년 뒤에 태어난 조설근은 핏속에 ‘한족’의 유전자가 남아 있긴 했지만 이미 99%이상 만주 기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머릿속에 ‘망한 나라’랄지 ‘명 왕조에 대한 그리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황당한 얘기가 된다. ‘명주’니 ‘순치제’니 하는 설명들은 여러 세대 동안 이어 온 만주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조설근이 중간에 집안이 몰락하여 산촌에서 책을 썼는데, 예전과 달라진 현재 상황에 대한 감상으로 개인적인 가정의 변천이 아니라 오로지 다른 사람 또는 궁중을 위해 일기장 같은 글을 써서 기묘한 수수께끼를 무수히 만들어 지난 왕조의 일반 명사를 비유하고, 그것을 통해 당시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논했다고 하는 것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인 것이다. 우리는 조설근의 전체 가계 배경을 충분히 이해해야 비로소 그 개인과 작품을 깊이 이해하여 저 황당무계한 ‘색은파’의 견강부회한 설명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작자의 신분과 저작 의도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후스는 조씨 집안 같은 팔기세가가 “당시의 한족 가운데는 없었”다고 했지만, 저우루창처럼 조설근의 책 속에 적힌 것이 “전부 만주족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결코 한족을 사칭할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결코 한족을 사칭할 수 없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책 속에 적힌 것이 모두 만주족의 풍속이니 한족의 풍속이라고 억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저우루창의 원문은 분명히 ‘한족[漢人]’이지 ‘한족의 풍속[漢俗]’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의 그의 뜻이 아닐 것이다.

둘째, 책 속에 적힌 것은 모두 만주족의 풍속이니 ‘한족’은 만주인을 사칭해서 쓸 수 없다. 저우루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문의 내용과 작자의 신분을 배합시킨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논조는 《홍루가세(紅樓家世)》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저우루창이 “청 왕조가 개국한 후 100년 뒤에 태어난 조설근은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황당한 얘기”라고 한 것은 위핑보의 설명과 사유 방식이 일치하는데, 다만 위핑보는 아직 사형 판결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작자의 의도]는 사실 알기 어렵다.” “[작자가] 반드시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저우루창은 기인 출신의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할 수 없다는 데에 충분히 동의한다. 사실 이 두 연구자가 적수(색은파: 역자)들에 대해 부정한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위핑보는 상대방의 설명이 ‘정말 웃기는 이야기’라고 평했고, 저우루창은 상대방의 주장이 ‘웃음이 나오게 할 정도로 황당한 얘기’라고 했다. 저우루창은 “이 책은 결코 ‘만주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주족 문화를 칭송한다.”고 했다. (나중에 《홍루몽신증》 수정판에서는 앞서 설명한 중요한 구절들이 “대부분 만주 풍속[多係滿俗]”이라거나 “[조설근이] 머릿속에 ‘명 왕조를 그리는[思明]’ 생각을 가졌다는 얘기는 ‘농담처럼 들린다.[令人感覺滑稽]’”라고 고쳐졌다. 어투가 예전처럼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그는 오히려 조설근이 만주족 황제를 풍자했다고 칭송했다.)

이런 상황은 바로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는 우리의 문화에서 제한과 배제, 선택을 하는 데에 쓰이는 어떤 기능적인 원칙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우루창의 견해는 분명 조설근의 특수한 신분에 의거하여 다른 의견을 배척한 것이다. 사실 그도 위핑보와 마찬가지로 색은파의 ‘작자론’을 어느 정도 곡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색은파가 ‘망국’의 회한이나 ‘명 왕조를 그리워’한다는 주장을 할 때에는 작자를 결코 ‘만주 기인’ 출신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설정한 ‘유민’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자서전설은 ‘깨뜨림[破]’의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어서 반만설은 순식간에 목소리가 가라앉아 버렸다. 하지만 ‘세움[立]’의 측면에서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작자가 만주족이라는 배경이 소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자의 종족이 그저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이 색은파를 공격하는 도구 이상의 무엇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자서전설은 주로 ‘조설근의 집안과 경력’을 전제로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들의 정면적인 이론은 《홍루몽》이 조설근의 자서전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서전설이 주류 학설이 된 뒤의 추세는 연구 범주가 종족에서 가계로 축소되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작자의 종족’이 갖는 해석 작용이 점점 쇠퇴하고 있음(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이 분명하지만, 후스가 창립한 ‘신홍학’은 구홍학의 해석 관례를 깨뜨리지 못하고 그저 방향만 바꾸어서 연구의 방향이 더 분명해지고 목표가 더 명확해지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서양의 문학이론가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자’는 제한하는 작용을 한다고 했다.

텍스트에 작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어떤 한계를 부과하고,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글쓰기를 종결짓는 것이다.

이 말에 담긴 이치는 자서전설의 상황에도 참조할 만하다.

조설근이 작자라는 판단을 독자들이 받아들인다면 후스, 위핑보, 저우루창의 관점은 해석에서도 대단히 유리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이런 관점은 ‘작자’의 가정을 배경으로 삼아 가정환경이 작자의 사상에 영향을 주고, 작자의 사상은 또 소설 창작에 영향을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밀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지만(여전히 필연설이 결여되었으므로) 적어도 사유 방식에서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가 비교적 쉽다. 둘째, 당시 조설근에 관한 사료(史料)가 많지 않기 때문에 문헌에서 증거를 찾아서 한족과 만주족에 대한 조설근의 태도를 확정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예를 들어서 조설근이 ‘만주족에 반대’한 ‘역사적 증거’는 찾기 어렵다.) 만약 학자들이 ‘저자가 조설근’이라는 신홍학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서전설의의 ‘종족-가계 결정론’을 뒤집으려 해도 직접적이고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의 출현은 확실히 《홍루몽》의 작자가 ‘한족을 생각하며 만주족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3) ‘기인 작자설’에 대한 색은파의 반응

‘반만설’을 주장하는 《홍루몽》 연구자가 후스 계열의 추론을 약화시키고자 한다면 두 가지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 첫째는 작자가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작품 자율론’을 견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조설근’이 작자라는 주장을 뒤집어서 ‘작자 조설근’의 특수한 가계가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없앰으로써 ‘반만설’에 대한 ‘가계 결정론’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에서는 ‘기인 작자설’에 대한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서우펑페이[壽鵬飛], 징메이지우[景梅九], 차이위앤페이, 판중궤이[潘重規], 두스졔[杜世傑], 리즈치[李知其])의 반응을 분석해 보겠다.

(1) 새로운 작자를 내세운 서우펑페이와 징메이지우

신홍학의 자서전설이 주류가 돈 상황에서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변론을 위해 채택한 전략은 앞서 설명한 구상과 암암리에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서 1927년에 서우펑페이는 《홍루몽본사변증(紅樓夢本事辨證)》에서 이 작품의 작자가 “강희 연간 어느 귀족 집안의 빈객으로 있던 어느 거인”이며, 그 거인은 바로 조일사(曹一士)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작자는 분명히 후스가 고증한 강녕직조(江寧織造)를 지낸 심양(瀋陽) 조인(曹寅)의 손자이자 조부(曹頫)의 아들인 조점(曹霑)이 아니다. 그러니 또 어떻게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서술할 수 있었겠는가?

서우펑페이는 《홍루몽》이 조설근의 저작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서술했을 리 없으니, 하물며 무슨 ‘종족-가계의 영향’ 같은 것을 논하겠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첫 번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이었다.

다음으로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작품이 아니라 작자라는 독특한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다면, 서우펑페이는 반대로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자를 살펴보려 했다.

이 책이 명 왕조를 그리며 청 왕조를 원망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절대 기인 신분의 만주족 신하로서 여러 세대 동안 출세하여 청 황실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이 지었을 리 없다. 당연히 명 왕조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은 유민이나 시름을 품은 지사(志士)가 지은 것이어야 한다. 그는 여유량(呂留良: 1629~1683)이나 증정(曾靜: 1679~1736) 같은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보다 자신의 재능을 숨겨서 명성이 드러나지 않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또한 엄연히 ‘작품 우선’의 ‘작품 자율성(autonomous)’을 중시하는 논조이다. 그러나 이렇게 소설 자체로 ‘그 의미가 자명하다’는 변론 방법은 서우페이펑의 저작에서 우담바라(Udumbara)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 버린다. ‘작자의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은 《홍루몽》 연구의 두 학파에서 줄곧 관행적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서우펑페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조일사가 《홍루몽》의 작자’라는 주장의 증거에 대해 물으면 서우펑페이는 마수신(馬水臣)이라는 작자의 학우(學友)가 한 말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 말의 근거를 물으면 또 마수신의 말이 “분명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로 보건대 이 논의가 얼마나 유치한지 알 수 있으니, 그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했을 때의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작자와 개편자에 관한 서우펑페이의 생각은 또 다른 색은파 학자에게 계승되었다. 1934년에 징메이지우(景梅九: 1882~1961)는 《홍루몽진체(紅樓夢眞諦)》에서 왜 작자가 조일사인지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책(《홍루몽》) 속에서 책에 대해 강론하고 문제를 내는 것은 모두 귀결점이 있는데, 다만 가정(賈政)이 얘기한 ‘오직 선비만이 할 수 있다[惟士爲能]’라는 제목은 아주 특이하다. 내가 추측해 보건대 ‘유사(惟士)’는 바로 ‘일사(一士)’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일사만이 이 책을 지을 수 있었다는 말인 듯하다.

이 진술에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 그는 이것이 자신의 ‘추측’이라고 솔직히 밝혔다는 것이다. 둘째, 이 ‘추측’에서 ‘유사위능(惟士爲能)’이라는 구절이 반드시 ‘《홍루몽》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게 다른 책이나 다른 일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메이징지우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기에 “오직 선비만이 (《홍루몽》을 지을) 수 있다”는 식으로 괄호 안의 말을 덧붙이는 방식은 ‘글자를 더해서 경전을 해석하는[增字解經]’ 것과 다를 바 없다. 글자를 더해서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훈고학(訓詁學)’에서 열 가지 폐단 가운데 하나로 꼽는 것이다.

메이징지우는 세 가지 ‘의체(義諦)’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명‧청 두 왕조의 정치 및 궁궐 안에서 일어난 일에서 뜻을 찾는 것이고, 둘째는 재상 명주와 그의 아들 성덕(性德)의 일에서 뜻을 찾는 것이고, 셋째는 저자와 편찬자 자체 및 그 집안일에서 뜻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바로 조일사에게서 찾는다는 뜻이다. 메이징지우가 찾아 낸 것은 여전히 ‘종족의 은밀한 아픔[種族之隱痛]’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예를 들어서 《홍루몽》 권수(卷首)에 들어 있는 “종이 가득 황당한 말[滿紙荒唐言]”과 마지막 회의 “가슴 아픈 이야기[說到辛酸處]”라는 두 개의 시 구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풀이한다.

원저자가 망국의 슬픈 한을 감당하기 어려워 두 눈에서 붉은 피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잘 느낄 수 있다. ‘황(荒)’이라는 것은 ‘망한다[亡]’는 뜻이고, ‘당(唐)’은 중국이다. 그러므로 ‘황당’은 곧 망국을 일컫는다. 인간 세상의 가슴 아픔[辛酸] 가운데 나라가 망한 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

이로 보건대 메이징지우가 “작자에게서 찾는다”고 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찾는[求]’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결국 그 자신이 설정한 색은의 방법(예를 들어서 황[荒]은 망[亡]이라고 해석하는 음훈[音訓]으로)으로 찾는 것이다.

(2) 자서전설의 작자론에 대한 반만설의 해소

서우펑페이는 조일사를 이용하여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을 대체하려 했지만, 작자가 조일사라는 그의 주장은 “역사에 증거가 없는 주관적 억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겨우 소설의 본문(글자 수수께끼)에 의지하여 자서전파의 작자론을 공격하는 것은 그다지 큰 반박의 힘을 갖기 못한다. 적어도 작자의 의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서우펑페이의 설명은 분명히 설득력이 부족하다.

반만설을 주장하는 또 다른 논자인 차이위앤페이는 심지어 싸움을 포기하고 ‘작자’에 대한 후스의 추단을 인정했다.

이제 후 선생이 앞쪽 80회의 작자 조설근의 가계와 생애, 그리고 뒤쪽 40회의 작자 고악(高鶚: 1763~1815)의 약력에 대해 짧은 기간 동안 아주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이는 진실로 《석두기》에 대해 공헌한 것으로서……

차이위앤페이는 《홍루몽》 작자에 대한 후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었지만(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고 여전히 “책 전체를 조설근이 썼다고 할 수는 없다[未可以全書屬之曹氏]”는 입장을 견지했음), 결코 자서전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그는 모순을 파헤치는 방법으로 자서전설을 비판했다. 그는 ‘조설근이 작자’라는 입장에서 후스에게 반문했다.

가씨 집안이 정말 조씨 집안을 반영한 것이고 이 책이 조설근이 자기 집안의 상황을 스스로 서술한 것이라면 어휘 선택에 당연히 분별이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제17회에서 초대(焦大)가 함부로 욕을 퍼붓고, 제66회에서 유상련(柳湘蓮)이 “당신네 동쪽 집(녕국부: 역자)은 저 대문 앞의 돌사자 두 개만 (도덕적으로: 역자) 깨끗하다.”고 말한 것은 지나치게 여지를 남기지 않은 표현인 듯하다.

차이위앤페이가 문제를 제기한 어투는 상당히 부드럽지만(“지나치게 여지를 남기지 않은 표현인 듯하다.”), 그의 이 논점과 사유 방식은 이후에 반만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에게 자서전설을 공격하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서 1951년에 판중궤이(潘重規)는 〈민족의피눈물로 이루어진 《홍루몽》〉을 발표하면서 기인 출신의 작자가 자기 민족과 자기 가문에 대해 심한 욕을 퍼부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본서의 제3장 참조). 또 1959년에 판중궤이는 《홍루몽신해(紅樓夢新解)》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가씨 집안에서 어린 숙부(가보옥)을 받들어 기르는 것을 질책하고, 더욱이 “한 편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뜻을 나타냈다.” 만약 가씨 집안이 조씨 가문을 비유한 것이라면 조설근이 어떻게 이토록 자기 조상을 심하게 매도했겠는가! 이는 바로 청대 초기에 문태후(文太后)가 예친왕(睿親王) 다이곤(多爾袞)에게 시집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7년에 두스졔(杜世傑)는 《홍루몽고석(紅樓夢考釋)》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홍루몽》에서 가(賈)씨 성을 가진 사람치고 좋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이는 작자의 집안일을 서술한 것이라는 설명이 성립하지 않는 큰 관건이다. 그런데 그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숨긴다. 자전(自傳)이 본래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는 않지만 자기 집안사람 가운데 선한 이가 하나도 없다고 서술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가씨 집안의 인물들에 대한 《홍루몽》 서술은 얼마나 비난과 풍자가 심한가!

공평청(龔鵬程: 1956~ ) 역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즉 책에서 가씨 집안의 음란하고 수치심 모르는 일에 대해 풍자하고 비판한 것이 아무 많은데, 정말 자전이라면 누가 이렇게 모진 마음으로 자기 부모와 친척 어른들을 모욕했겠느냐는 것이다. 이 점(작품 속에서 조씨 집안에 대해 비난한 부분이 있는 점)은 확실히 ‘후스 계열’의 연구자들에게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서 위핑보는 〈독《홍루몽》수필〉 제36조(條)에서 이렇게 말했다.

설보차를 양귀비에 비유하든 임대옥을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하든(제27회) 상관없이 모두 비난하는 것이고, 가보옥을 양국충(楊國忠)에 비유하는 것도(제37회) 비난하는 것이며, 가씨 집안을 《일봉설(一捧雪)》에 나오는 엄(嚴)씨 집안에 비유하는 것도(제18회) 완전한 비난이다. 《홍루몽》은 가씨 집안과 가보옥, 금릉 12차(釵) 가운데 첫째인 설보차와 임대옥, 금릉 12차의 맨 끝에 있는 진가경(秦可卿)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이니,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자서전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핑보의 생각은 이렇다. 만약 가씨 집안이 조씨 가문이라면 작자 조설근은 곳곳에서 자기 집안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셈이 아닌가? 이것은 정리상(情理上)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서전설’을 신봉하는 또 다른 연구자인 저우루창은 진즉 이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그는 가씨 집안의 인물들에 대한 비판은 바로 ‘작자의 자책’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유상련이 녕국부에는 돌사자만 깨끗하다고 얘기했는데, 그렇다면 작자가 자기 집안의 일을 서술하는데 어떻게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서술하기 꺼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해 했다. 그렇게 의아해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서 제5회의 노래는 작자의 자책이다. ……이는 바로 녕국부에서 일어난 모든 애매한 일과 진가경을 암암리에 가리키는 것으로, 그 부분의 지연재 비평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무슨 말투이며 무슨 뜻이며 무슨 심정인가? 조설근이 다른 사람의 숨겨진 일과 궁중의 은밀한 역사를 묘사했다고 생각하려 애쓰는 독자들은 이런 것들을 읽어서 더 깨달아야 할 것인가. 그러면 생각이 조금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저우루창의 논술에서는 조설근이 서술한 것은 단지 자기가 목도하고 경험한 몇 년 동안의 영국부 ‘말세(末世)’에 국한된 뿐이며, 그가 보지 못한 금릉의 옛 일과 조인(曹寅) 당시의 흥성했던 시절은 전혀 끌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책의 곳곳에 서술된 것은 쇠락하는 장면들뿐이며, 이를 통해 지금 상황이 옛날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냈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저우루창은 그런 폄하의 말들이 단지 ‘대비(對比)’하기 위해 쓰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론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위핑보는 “사랑하지만 그 죄악을 알린다[愛而知其惡]”는 주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또한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의문에 반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사랑하지만 그 죄악을 알린다”는 것은 《홍루몽》의 작자가 가씨 가문을 아끼기는 하지만 가문 사람들의 단점을 서술하는 것을 기피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조설근의 서술 방법은 일종의 ‘객관적’이고 ‘공평’하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홍루몽》 작자의 수단은 ‘생동적으로 묘사하는 것[寫生]’이다.”

이 때문에 색은파 연구자들이 조설근의 창작 의도를 토대로 한 추론은 ‘자서전설’의 뿌리를 철저히 흔들 수 없었다. 자서전설은 또 문헌의 증가로 인해서 장족의 발전을 했다. 1927년 후스는 갑술본(甲戌本)을 입수했고, 1933년에는 경진본(庚辰本)을 보았으며, 이때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설을 공고하게 다지는 글을 썼다(본서 제4장의 지연재를 논한 부분, 특히 “지연재 비평의 신뢰성” 부분을 참조할 것). 1930년대부터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의 《문헌총편(文獻叢編)》은 강희 연간의 조인(曹寅)과 조옹(曹顒), 조부(曹頫), 이후(李煦) 등의 상주문에 대한 황제의 주비(硃批)를 계속 간행하여 조씨 집안의 가계에 대한 개황을 드러냈다. 이런 자료들은 자서전설을 발휘하는 데에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상반기까지 발견된 조씨 집안에 대한 문건은 이 외에도 저우루창이 펴낸 《홍루몽신증》(1953)에도 많이 들어 있는데(예를 들어서 ‘조씨가세표[曹氏家世表]’ 등), 그의 고증에는 조씨 집안의 몇몇 친척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1950년대 말엽부터 1960년대 초까지 우언위(吳恩裕)는 《조설근 관련 자료 8종[有關曹雪芹八種]》(1958)과 《조설근 관련 자료 10종》(1964)을 펴냈고, 우스창(吳世昌)은 영문 저작 《홍루몽에 대하여(On Red Chamber Dream)》(1961)을 펴냈는데, 이들 전문 저작들은 모두 조씨 가문의 가계를 깊이 파헤쳐 공백을 메웠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세는 후스의 고증에 동의하는 연구자들이 이미 조설근을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홍루몽》의 작자로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62년부터 1963년 무렵에 중국 대륙에서는 조설근 서거 2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이것은 또 연구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최초의 ‘조설근 전기’로서 저우루창의 《조설근》(1964)가 출간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기까지 현지(縣志)와 비기(碑記), 고궁(古宮)의 공문서 등등의 조씨 가문의 가계와 관련된 문헌자료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1975년과 1976년에는 고궁박물원에서 《강녕직조 조씨 가문 관련 공문서 사료[關於江寧織造曹家檔案史料]》와 《이후의 상주문[李煦奏折]》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조씨 가문과 이씨 가문에서 강희제에게 올린 상주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신홍학 연구자들은 이런 자료들을 무척 중시해서 연구 보고가 잇달아 나왔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은 이미 《홍루몽》의 작자는 조설근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면서(대대적인 문헌과 기념사업, 연구 활동이 이어졌음) 상당한 기세를 올려서, 여타 학파의 연구자들도 그 현상을 무시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 때문에 반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부연하려 할 때에도 기인 출신의 ‘작자 조설근’이라는 관건을 피해 가기 어려웠다.

기인 저서설은 결국 ‘한(漢) 민족주의’에 입각한 반만설을 주장하던 색은파에게 절대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텍스트’과 ‘작자’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는 한편, ‘작자 조설근’이라는 견해를 뒤집으려고 시도하거나 조설근을 ‘개조’하여 자서전설을 부정하려 했다. 이리하여 조설근은 색은파의 논쟁에서 초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설근에게서 작자라는 신분을 제거하려는 작업은 그 노선에서 또 약간 차이가 있다. 판중궤이는 조설근을 그저 편찬자로만 인정했고, 두스졔는 조설근이란 그저 성실히 베껴 쓴 사람을 가리키는 ‘초사근(抄寫勤)’과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 만든 가명일 뿐이라고 했으며, 리즈치(李知其)는 조설근을 이야기꾼[說書人]이라고 생각했다.

(3) 판중궤이: 원작자는 ‘돌[石頭]’——조설근의 위협 해소 작업 1

판중궤이의 《홍루몽신해》는 시작부터 작자가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라는 점을 부정한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홍루몽》은 뜻있는 한족 선비가 은어(隱語)로써 은밀한 아픔과 은밀한 일을 서술한 은밀한 책이지, 결코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또 “내가 책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이 책은 어느 민족주의자의 피눈물의 결정이라고 느껴졌다.”고 했다. 그의 관점은 차이위앤페이의 그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이 ‘뜻있는 한족 선비’ 또는 ‘민족주의자’는 대체 누구인가? 판중궤이는 이에 대답하지 않고, ‘유민’의 일처리는 모두 묵묵히 진행되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에 성명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므로 작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돌[石頭]이란 바로 이름을 숨긴 작자의 가명”이라고 했다. 종합하자면 《홍루몽》 작자의 성명은 고의로 숨겨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돌을 작자로 여기게 되면 최소한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첫째,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제 있었던 이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뒤섞어 버린다. 둘째, ‘돌’이 실제 있었던 인물이라고 인정한다 해도 조설근 역시 ‘돌’이라는 가명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돌’은 실제로 역사상 어느 인물인가? 왜 ‘돌’은 그런 수수께끼를 지었는가? 이에 대해 판중궤이는 이렇게 말했다.

천지회(天地會)의 인물들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대표하고, 중지와 넷째 손가락을 펴서 땅을 대표했다. 천지회의 인물이 아니라면 이따금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똑같이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돌은 청 왕조에 반대하는 인물인가? 돌이 청 왕조에 반대하는 인물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무엇인가?

문제는 이렇다. 작자가 수수께끼를 지은 게 아니라면(그저 후세 사람들이 억지로 책 속의 어떤 문장을 수수께끼로 여기고 해석한 것이라면) 색은파의 해석 방법은 즉시 완전한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다. 이렇게 은밀히 내포된 해석의 위기를 판중궤이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풍월보감(風月寶鑑)》을 《명청보감(明淸寶鑑)》으로 해석하면서 아울러 여유량(呂留良)의 “맑은 바람 가늘다지만 나를 불기 어렵고, 밝은 달이야 사람 비추지 않은 적 어디 있던가?[淸風雖細難吹我, 明月何嘗不照人]”라는 시 구절과 서술기(徐述夔: 1703~1763)의 “내일 아침 날개 떨쳐 청조의 수도를 단번에 떠나리라[明朝期振翮, 一擧去淸都]”라는 시 구절 등의 방증(傍證)을 들면서 《홍루몽》 작자의 기교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판중궤이는 이 부분을 독자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돌’이 반드시 판중궤이가 말한 ‘기교’를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풍월보감》도 반드시 ‘청풍과 명월’을 비유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도 이렇게 인정했다.

명월과 청풍은 본래 글에서 상용하는 어휘로서……거기에 은유가 담겨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자서전설의 핵심 인물인 조설근에 대하여 판중궤이는 단지 편찬자로만 인정한다. 그는 “규방의 일을 천속한 언어로 서술하여 만주족에 반대하는 사상이 지식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쉽게 유행하게 만드는 것이 원작자의 의도로서, 이는 조설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난고거사(蘭皐居士)와 유서(裕瑞: 1771~1838), 진용(陳鏞), 서가(徐珂: 1869~?) 등의 주장을 인용하여 정위원과 고악 이전에는 확실히 많은 이들이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영충(永忠)이나 명의(明義) 같은 이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에 대해 그는 영충은 조설근과 만난 적이 없고, 명의는 조설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영충이나 명의처럼 조설근이 《홍루몽》을 지었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소문을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증거로 보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변론 방식은 판중궤이가 이중적인 기준을 채용했음을 보여준다. 영충이나 명의 같은 이들이 조설근과 모르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증거가 될 수 없다면 난고거사나 유서, 진용, 서가 등은 조설근이 살았던 때보다 훨씬 뒤에 살았던 이들이니 그들의 말은 더욱 증거로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판중궤이가 난고거사나 유서, 진용, 서가 등의 말을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어떤 것은 중시하고 어떤 것은 무시하는가? 해답은 생각해 보면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본서의 마지막 장을 참조할 것).

조설근과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은 증거로서 자격이 없다면, 지연재나 기홀수처럼 조설근과 아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판중궤이는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의 비평에서는 이름을 숨긴 원작자와 《홍루몽》을 개편한 조설근을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그들을 작자라고 칭했다. 평점가들은 원작자를 극도로 숭배하면서 그들의 친한 벗인 조설근에 대해서도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판중궤이의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원작자’(사실상 조설근도 ‘원작자’가 될 수 있다)와 ‘개편자’를 일률적으로 ‘작자’라고 칭했다면 그는 왜 또 그걸 구분하려 하는가? 극도로 숭배한다는 말이 왜 반드시 ‘원작자’에게만 해당하는가? 평점가는 ‘개편자’를 숭배할 수 없는가?

판중궤이는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 자리에 ‘돌’을 내세웠다. 그러나 ‘돌’이 누구인지는 끝내 설명하지 않았다. 반만설을 주장하는 또 다른 연구자인 두스졔는 《홍루몽》의 작자가 오위업(吳偉業)이라고 명확하게 제시했다. 그가 조설근을 부정하는 수법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4) 두스졔: 조설근은 가명이다――조설근의 위협 해소 작업 2

이전의 색은파 연구자들은 비록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조설근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두스졔에 이르면 조설근은 하나의 가명이 된다. 1972년 두스졔는 《홍루몽원리》에서 《홍루몽》의 전신(前身)인 《풍월보감》은 명나라의 유민이 쓴 것인데, 조설근이 베껴 쓰면서 내용을 더하거나 삭제하여 《홍루몽》을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홍학 명명법(命名法)’에 따르면 조설근은 단지 부지런히 베껴 쓴 사람이라는 뜻의 ‘초사근(抄寫勤)’과 비슷한 발음[諧韻]을 이용해 만든 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조설근이라는 단어는 또 ‘초사근’과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 만든 가명인 듯하다. 정위원(程偉元)의 〈원서(原序)〉(2)에 따르면, “다만 책에는 설잠(雪岑) 선생이 여러 차례 개편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했다. 조설잠(曹雪岑)이 조설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조설근(또는 조설잠)이 그저 가명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선생의 목적은 ‘초사근’과 비슷한 발음의 가명을 취하는 것일 뿐이다. 최초의 목적은 베껴 써서 소장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초사존(抄寫存, 즉 曹雪岑)이라는 가명을 지었지만, 결과적으로 10년 동안 읽으면서 다섯 차례나 개편함으로써 부지런히 베껴 쓰는 현상이 나타나서 초사근(抄寫勤, 즉 曹雪芹)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조설근(또는 조설잠)이 그저 가명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설근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 만든 비유적인 가명인가? 이 점은 근본적으로 실증할 방법이 없다. 두스졔 자신의 ‘홍학 명명법’에 따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홍학 명명법’은 그가 만든 것이니 그걸 이용하여 혼자 즐길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독자들이 반드시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을 테니 그 가치가 한정적이다.

나중에 두스졔는 이 ‘비슷한 발음[諧韻]’을 이용한 독법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연한다.

조설근은 10년 동안 읽고 다섯 차례 개편했는데, 그는 ‘부지런히 베껴 썼을[抄寫勤’] 뿐만 아니라 증보(增補)도 부지런히 했다. 이 때문에 또 조근포(曹芹圃)라는 호를 썼으니, 이는 바로 ‘초근보(抄勤補)’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비록 견강부회이긴 하지만 이것 말고는 더 좋은 해석이 없다. 그리고 조설근은 또 조몽완(曹夢阮)이라는 이름도 있으니, 이것은 ‘초몽원(抄夢圓)’과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것인 듯하다. 원(圓)은 원만(圓滿) 즉, 완성했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한다. 《홍루몽》은 사실 그가 베껴서 완성했는데, 그것은 그의 《석두기》와 《정승록(情僧錄)》의 명명법에 근거하자면 응당 ‘초몽원’(曹夢阮과 발음이 비슷한)으로 명명해야 한다.

이 설명을 통해 보건대, 두스졔의 얘기가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그 자신도 ‘견강부회’할 때가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조설근’이 가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의 진짜 신분은 무엇일까? 두스졔는 이 ‘조설근’이라는 가명을 쓴 사람이 어쩌면 “강희 연간 북경의 어느 귀족 집에 빈객으로 있던 상주(常州) 출신의 어떤 거인(擧人)”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홍루몽》이 ‘상주 출신의 어느 거인’이 지은 것이라는 견해는 일찍이 《저산헌총담(樗散軒叢談)》에 보이는데, 색은파 연구자인 서우펑페이가 그 설을 가져다 쓰면서 그 거인이 조일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조일사가 바로 조설근이라고는 하지 않고, “다만 그에게 설근이라는 별호가 있었다는 것은 고증할 수 없는데, 혹시 이 책을 개편하기 위해 일부러 이 호를 만들어 자신을 감춘 것은 아닌가?” 라고 했다. 그런데 두스졔는 그 효렴을 ‘조설근’과 동일시하고 있다. 서우펑페이는 《홍루몽》이 궁중의 비사를 숨겨서 서술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조일사는 강희제 시대의 인물이니 그 작품이 “강희 말년의 궁중 비사”를 담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에 배합시키기 적당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두스졔는 “어느 거인이 혹시 스승이나 친구가 전해주는 《홍루몽》 원본을 얻었는데, 남방의 반청(反淸) 사상에 영향을 받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떠돌다가 북경에 이르러 재능을 펼쳤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결국 그가 생각하기에 개편자 ‘조설근’(상주 출신의 어느 거인)은 ‘반청 사상’을 갖고 있으니,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설정한 기인 출신의 조설근과는 매우 동떨어진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설근이 건륭 연간의 인물임을 분명히 고증했는데, 그가 어떻게 ‘강희 연간’의 상주 출신의 어느 거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 두스졔는 “조설근이 가명이라면 건륭, 가경 연간의 조설근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가명’이라는 간단한 한 마디로 건륭, 가경 연간의 조설근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단번에 묵살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단지 ‘믿을 만하지 않다’는 말로 논적을 물리치려고 한 것은 분명 설득력이 부족하다.

종합하자면 두스졔의 논술 체계에서 ‘조설근’이라는 이름은 《홍루몽》과 약간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조설근’은 자서전설 논자들이 얘기하는 기인 출신의 조설근이 절대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서전파의 ‘기인 작자론’이 반만설에 가하는 위협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이른바 ‘해소’라는 것은 두스졔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효과이다.)

두스졔는 오위업이 바로 《홍루몽》의 원작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증 방법은 ‘동시대 사람의 증명’이나 역사 문헌을 통한 증명을 제시하지 않고 여전히 이름으로부터 시작한다.

《홍루몽》은 오옥봉(吳玉峰)과 공매계(孔梅溪), 그리고 가우촌(賈雨村)의 소개로 조설근에게 전해졌는데, 앞의 세 사람의 이름에서 각기 순서대로 한 글자씩 취하면 ‘오매촌(吳梅村)’ 즉 오위업이 된다.

이 외에 오매촌의 ‘매(梅)’자도 오위업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사용된다. 증명의 방법은 “진실한 사정은 가우촌(假雨村) 안에 숨겨져 있는데, 거짓으로 지어낸 소박한 이야기[假語村言]는 바로 수수께끼[謎]이다. 미(謎)와 매(梅)는 발음이 같으니,” 오매촌이 바로 《홍루몽》의 작자라는 것이다.

위에 거론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두스졔가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처리할 때 자신의 독특한 해운(諧韻)의 독법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위업이 《홍루몽》을 지었다는 것을 증명할 때에도 종종 ‘해운’의 방법으로 작품 안의 문장을 해독하여 곳곳에서 오매촌과 간련된 우연한 내용들을 찾아낸다. 《홍루몽》의 수수께끼[謎]를 오위업이 만든 것이라고 하고 나서, 다시 《홍루몽》의 ‘수수께끼’ 속에서 여러 가지로 이 작품이 오위업의 저작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순환논증의 흔적이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두스졔는 또 다른 논리를 끌어다가 《홍루몽》과 오위업을 결합시키기도 한다.

《매촌행장(梅村行狀)》에 따르면 정월 아침에 선생이 꿈에 어두 관리의 저택에 갔는데, 주인이 왕후(王侯)의 관복(官服)을 입고 계단에서 내려와 읍(揖)을 하며 맞이하면서 종이쪽지를 꺼내 보였다. 거기 적힌 글자는 인간 세상의 글자가 아니라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이 자리는 선생에게 맡깁니다.” 또 12월 초하루에 다시 꿈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맞이하러 와서 선생에게 날짜를 적어 보여주어서 시일(時日)을 미리 알 수 있었으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고 했다. 매촌이 앞서 꾼 꿈에서는 왕후의 관을 쓴 사람이 자리를 물려주었고, 나중에 꾼 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맞이하러 왔다고 했으니 아마 전에 꾼 꿈에서 보았던 왕후의 관을 쓴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매촌의 홍루몽(紅樓夢)인 것이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해 이렇게 추가적인 논리를 이끌어낸다. “이 꿈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한바탕 ‘홍루몽’인지는 알 수 있다. 오매촌은 홍루몽을 꾼 적이 있으니, 응당 《홍루몽》의 작자일 것이다.” 이런 설명은 억지로 관계를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논증 과정도 너무 단순하고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매촌의 꿈이라는 것 역시 ‘청루몽(靑樓夢)’이랄지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한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이걸로도 나머지 것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매촌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설은 이미 덩쾅옌(鄧狂言)이 제시한 바 있는데, 두스졔는 거기에 추가적인 해석과 견강부회한 증명을 시도했을 뿐이다. 하지만 견강부회가 치밀할수록 파탄도 더 크고 분명하게 드러난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이런 논리는 역사적 증명이 불가능한데, 색은파는 이런 ‘명나라 유민의 저작’이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반만설에 결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두스졔의 방법은 조금 더 세밀해졌을 뿐이다. 그나마 조금 참신한 것은 그가 ‘조설근’을 처리한 수법이다. 첫째, ‘조설근’과 ‘조근포’, ‘조몽완’ 등의 이름을 모두 색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혹은 수수께끼로 만들어 그 안에 숨겨진 말이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조설근’을 청 왕조에 반대하는 선비로 만들었다. 셋째, 건륭, 가경 시대의 조설근에 관한 기록들을 부정했다. 사실 ‘조설근’을 색은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후의 색은파 연구자들도 채용했는데, 리즈치(李知其)야말로 아주 좋은 예이다.

(5) 리즈치: 조설근은 이야기꾼이다――조설근의 위협 해소 작업 3

리즈치는 작자를 알 수 없다는 견해를 유지했기 때문에 두스졔보다는 번거로운 일이 줄어서 작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조설근에 대해서는 리즈치도 마찬가지로 색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이론을 설정했다. 즉 《홍루몽》은 금기를 범하여 만주족에 반대하는 소설이니 작자가 진짜 성명을 밝혀 재앙을 초래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조설근’은 작자의 성명이 아니라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하지만 리즈치의 이런 설명 자체는 미리 《홍루몽》이 만주족에 반대하는 소설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실증해야 할 명제를 오히려 논증의 중요한 전제로 삼아 버린다. 조설근이라는 단어에 수수께끼가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리즈치가 조설근이라는 단어에 수수께끼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그는 조(曹)는 조위(曹魏)를 가리키는데 위(魏)자는 예(囈)자와 발음이 비슷하고, 설(雪)자는 설(說)과 발음이 비슷하며, 근(芹)자는 인(人)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예설인(囈說人)은 잠꼬대를 하는 사람이니, 바꿔 말하자면 바로 《홍루몽》을 들려주는 이야기꾼[說書人]”이라고 했다. 그는 또 세상 사람들이 예전부터 이야기꾼을 부를 때 설서선생(說書先生)이라고 했는데, 작품 속에서 조설근도 ‘선생’이라고 불린 경우가 많으니 조설근은 이야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이 추론 자체는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지만(예를 들어서 ‘근[芹]’자와 ‘인[人]’자가 발음이 비슷하다고 한 것), 어쨌든 조설근을 이야기꾼이라고 함으로써 조설근과 《홍루몽》의 관계(즉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상의 관계)를 끊어 버렸으니, 가세 결정론을 주장하는 자서전설 논자들의 설명도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리즈치의 의도가 그런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이런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조설근과 《홍루몽》 저작 사이의 관계를 끊는 것은 소극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리즈치가 어떻게 조설근을 색은파에게 유리한 인물로 변화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두스졔와 마찬가지로 리즈치도 조설근을 만주족에 반대하는 작가라고 주장한다. 두스졔가 해운(諧韻)의 독법을 근거로 ‘설근’을 ‘사근(寫勤)’으로 읽은 데에 비해, 리즈치는 “‘설근’이라는 이름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하여 한을 씻는다는 의미의 ‘설한(雪恨)’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조(曹)’자에 대해서 리즈치는 “조(曹)자는 호(號)자와 발음이 비슷하여 호곡(號哭)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울부짖을 ‘호(嚎)’ 또는 울 ‘도(啕)’와 발음이 비슷하니, 조설근이란 곧 울부짖으며 한을 얘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는 이유는 색정(色情)의 일이 한바탕 꿈처럼 사라져 버려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이 멸망한 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설근’이라는 단어는 당연히 수많은 해음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 왜 가명(또는 수수께끼)이냐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두스졔와 리즈치의 예에서 보건대 ‘조설근’이라는 단어를 색은의 대상이나 수수께끼로 만드는 것은 소극적인 측면에서 조설근의 저작권을 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조설근을 ‘만주족에 반대하는’ 작자를 지칭하는 말로 바꿔 버릴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런 ‘해운’의 독법은 반만설과 결합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각종 문헌이 보여주듯이 조설근이라는 사람은 실존 인물이지 가명이 아니다. 이 사실은 ‘해운’의 독법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물론 그들이 직면하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상의 논술을 종합하자면 자서전파 연구자들은 종종 조설근의 기인 출신이라는 신분에 집착하여 그가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졌을 리 없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반만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또 다른 작자론을 자신들을 주장에 배합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서전파의 기인 작자론을 모른 척할 수 없었으니, 반만설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은 자서전파의 추론을 묵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도 조설근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데에 급급하거나, 심지어 ‘조설근’이라는 단어에 대해 갖가지 일반인의 의표를 넘어서는 해석을 해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4) 위잉스의 ‘조화론’——조설근의 ‘한족에 대한 동질감’

사실 “기인 출신의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 자체는 단지 ‘작자 결정론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일종의 추측일 뿐이다. 이런 추측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증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색은파와 자서전파는 이런 추측에 갇혀서 다른 탐색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마치 조설근이 작자라는 것만 인정하면 기인 출신이라는 그의 신분이 그로 하여금 분명 만주족을 동정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믿는 듯했다.

기인 출신은 만주족 청나라에 반대할 리 없다는 추측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은 ‘한족은 한족을 공격할 리 없다’는 추측과 마찬가지로 논리적 필연성도 없고 사회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위잉스의 글은 “기인 출신의 작자가 만주족에 반대하며 한족으로 귀환”했다는 측면에서 탐색해 들어간다.

위잉스는 우선 두 가지 전제를 인정한다. 첫째, 《홍루몽》의 작자는 조설근이다. 이 점은 그가 일찍이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 혁명〉에서 분명히 밝혔다. “고증파와 색은파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그들 역시 《홍루몽》의 작자를 조설근으로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타당성 있는(즉 모순이 가장 적은) 결론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의 《홍루몽의 두 세계[紅樓夢的兩個世界]》에도 전체적으로 이런 작자관이 관철되어 있다. 둘째, 그는 자서전파의 작자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조설근의 ‘종족’이 문화적으로는 이미 만주족이라고 확인한다.

근대 홍학 연구의 주요 성과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조설근의 가계를 뚜렷이 밝혀 준 것이다. 우리는 이제 조씨 가문이 원래 한족이었지만 일찍부터 만주인에게 투항했으며, 청 왕조가 들어선 뒤에는 내무부(內務部) 정백기(正白旗)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 바꿔 말하면 조씨 집안은 문화적으로는 이미 만주인이지 한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잉스는 저작권과 작자의 종족 문제에서 모두 자서전파(그의 표현에 따르면 ‘고증파’)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그와 자서전파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그의 조화론은 “기인 출신의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하는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추측을 깨뜨렸던 것이다.

위잉스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조설근의 ‘심리(心理) 과정’에 대한 재건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심리 과정은 3단계로 나뉘어 형성되었다.

1. 조설근은 자신이 본래 한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2. 문자옥으로 한족 문인들이 억압당하는 것을 보고 격동하여
3. 가문의 한으로부터 ‘한족에 대한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위잉스가 제시한 ‘심리 과정’은 두 가지 가설과 연관되어 있다. 첫째, 조설근의 ‘격동’과 ‘한족에 대한 동질감’은 외재 환경에 대한 일종 일종의 자연스럽고 합당한 반응이다. 둘째, 조설근은 이 ‘격동’과 ‘동질감’을 반드시 글로 써 내야 했다. 이를 위해 위잉스는 두 가지 내적 증거를 인용했다.

1. 대명각등(大明角燈): 《홍루몽》 제53회 본문
2. 야율웅노(耶律雄奴): 《홍루몽》 제63회 본문

그리고 요화(瑤華)의 비평과 정본(靖本)의 비평을 방증으로 들었다. 이 두 가지 방증은 모두 다른 사람의 이해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적 증거에 대해 위잉스는 자세히 분석하지 않았다. 나중에 자오깡(趙岡: 1929~ )은 〈조설근의 민족주의사상〉을 통해 위잉스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대명각등’의 ‘대(大)’자는 순전히 등의 크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명각등도 있을 수 있고 작은 명각등도 있을 수 있다. 방관(芳官)의 이름을 야율웅노로 고치게 된 부분에 대해 자오깡은 그것이 만주족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공송덕(歌功頌德)’함으로써 만주 귀족[旗人]이 변방민족을 정복한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후반부에서 옹정제(雍正帝, 淸 世宗 愛新覺羅‧胤禛, 1678~1735)가 편찬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의 이론을 직접 인용한 것은 만주족의 청 왕조가 ‘위대한 순 임금의 정통 후예’임을 강조하고 건륭제의 무공(武功)을 칭송한 것이라고 했다(본서의 제3장 참조.)

이런 의문에 대해 위잉스는 〈조설근의 ‘한족에 대한 동질감’에 대한 보론(補論)〉을 발표하여 예전에 자신의 글에서 인용한 내적 증거에 대해 추가적으로 해석했다. 그의 방법은 주로 《홍루몽》에 담긴 건륭 시대의 환경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었다. ‘대명각등’은 보통의 언어 환경에서는 첫째, 이어 읽기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즉 ‘대명’이라는 단어는 이어 읽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수식어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즉 ‘대(大)’는 ‘소(小)’와 대비되는 것이다. 사실 일찍이 1970년 7월 10일에 우언위(吳恩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오신칭(趙信卿)은 이런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위잉스는 ‘대명각등’을 일반적인 단어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당시의 환경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건륭 시기에 ‘대명’이라는 글자를 연이어 쓰는 것은 대단히 금기를 범하는 일이었다. 조설근이 왜 ‘대경성등(大慶成燈)’ 또는 ‘대양각등(大羊角燈)’이라고 쓰지 않고 하필 ‘대명각등’이라고 썼겠는가?

그 다음으로 ‘대명’이라는 단어에 전혀 문제가 없다면 정고본(程高本)에서 그 두 글자만 삭제했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위잉스는 문자옥의 특색은 문장과 단어를 곱씹는 방식으로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어 읽기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작자가 변명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설근이 ‘대명각등’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분명 깊은 뜻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위잉스의 관점에서 보면 조설근이 ‘대명각등’이나 ‘야율웅노’ 등의 어휘를 쓴 것은 당연히 명 왕조를 애도하고 만주족에 반대하기 위해 일부러 한 행위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그이 이런 해석 자체도 전혀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 가운데 조설근이 한족 문인들이 문자옥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점이 또한 조설근이 ‘만주족을 배반하고 한족으로 돌아서는’ 심리 과정의 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설근이 이런 의심스러운 구절을 써서 일부러 청나라 조정을 도발할 수 있었을까? 색은파 연구자들도 종종 청 조정의 문자옥을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에서 작자는 그저 ‘은어’나 ‘수수께끼’로 암중에 풍자할 뿐이다. (이를 두고 차이위앤페이는 “여러 겹의 장막을 쳤다”고 표현했다.) 색은파의 ‘은어’나 ‘장막’이라는 논리가 성립하는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들의 이론 자체에는 전혀 내재적인 모순이 없다. 그런데 위잉스의 논리에 따르면 조설근은 고압적인 정책 아래에서 감히 공개적으로 ‘만주족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으니, 이는 위잉스가 가정한 것처럼 ‘용기 있게 만주족을 배반하고 한족으로 돌아섰다’기보다는 차라리 차이위앤페이의 주장처럼 ‘(한족의) 민족주의를 아주 굳게 견지한’ 셈이 아닌가!

《홍루몽》 자체로 보면 작자는 사실 문자옥의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공도인은) 거기 적힌 이야기에 비록 간사한 이들을 질책하고 악한 이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시대에 해를 끼치거나 세상을 욕하는 뜻은 없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리고 군주는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충성스러워야 하며 아비는 자상해야 하고 자식은 효성스러워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윤리강상(倫理綱常)과 관련된 부분들은 모두가 공덕(功德)을 칭송하는 한 가지 뜻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지라, ……이야기가 시대와 세상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작자가 공개적으로 만주족에 반대할 생각이었다면 왜 시대와 세상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특별히 설명했겠는가? 이렇게 하면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위잉스의 주장은 사실 의심을 살 만하다.

이제 ‘대명각등’이 ‘청 왕조에 반대하는’ 증거라는 주장의 신뢰성에 대해 다시 검토해 보자. ‘대명각등’의 ‘대’자는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다. ‘대명’이라는 두 글자가 사제되느냐 이어 쓰느냐는 ‘금기설[忌諱說]’에서 필쟁의 초점이다. 그것의 삭제 문제에 관련해서 각 판본들을 검토해 보면 일반 학자들이 비교적 초기 필사본이라고 여기는 경진본과 몽부본, 척녕본, 열장본 같은 들에는 모두 ‘대명각등’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열장본에는 ‘등(燈)’자가 ‘촉(燭)’자로 도어 있음), 비교적 후기 필사본으로 여겨지는 몽고본(夢稿本), 갑진본, 정갑본(程甲本)에는 모두 ‘각등(角燈)’이라고 되어 있다(현존하는 기묘본과 갑술본, 서서본에는 이 회가 빠져 있음). 이런 상황은 작자가 원고를 쓸 때에는 ‘대명각등’이라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렇게 단어가 들어 있거나 빠져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작자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금기 어휘를 썼다. 둘째, 작자가 금기에 대해 분명히 알았지만 일부러 그렇게 썼다. 하지만 작자가 일부러 이렇게 써서 청 왕조에 반대하는 뜻을 나타냈다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첫 번째 가능성을 완전히 말살해서는 안 된다.

‘대명’이라는 글자가 삭제된 것은 이 단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위잉스의 추측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자가 삭제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며, 그 어휘가 금기를 저촉했기 때문에 삭제되었는지 여부는 더 깊이 연구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설령 두 글자가 확실히 금기 때문에 삭제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베껴 쓴 사람이 삭제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몇 가지 판본들은 모두 조설근이 죽은 후에 나온 필사본들이기 때문이다.

이어 쓰기 문제에 대해서는 ‘명각등’이 《홍루몽》 제14회에도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현존하는 필사본(경진본, 기묘본, 몽고본, 갑술본, 몽부본, 척서본, 척녕본, 갑진본, 열장본)에는 모두 일률적으로 앞에 ‘대(大)’가 없이 ‘명각등’이라고만 되어 있다. 제53회의 ‘대명각등’이 일부러 만주족에 반대하기 위해 쓴 것이라면 제14회의 ‘명각등’에 ‘대’자를 붙이지 않은 것은 그런 뜻이 없다는 셈이 된다. 이 점은 반반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불리할 듯하다.

‘야율웅노’의 문제에 대해서도 위잉스는 당시의 환경에 결합하여 작자의 본의를 미루어 헤아리고 있다. 당시에는 ‘이(夷)’ 또는 ‘적(狄)’과 같이 역사상 소수민족에 간련된 어휘는 모두 금기를 범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당시’라는 말은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사실 청 세종(世宗)은 ‘이’나 ‘적’ 같은 글자를 피할 필요가 없다는 칙령을 내린 바 있다. 《청실록(淸實錄)》의 《세종헌황제실록(世宗憲皇帝實錄)》 권130에 따르면, 옹정 11년(1733) 4월 기묘(己卯)에 세종은 내각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이 본 왕조 사람들이 간행하거나 쓴 서적들을 보니 호(胡), 노(虜), 이(夷), 적(狄) 등의 글자가 나올 자리가 늘 공백으로 있거나 ‘이(夷)’를 ‘이(彝)’로, ‘노(虜)’를 ‘노(鹵)’로 바꾸듯이 글자의 모양이나 발음을 바꾸어 놓아서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 의도를 헤아려 보건대 본 왕조의 금기 때문에 그런 글자들을 피해 공경하고 삼가는 자세를 표명하려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는 진실로 이치에 어긋나도 도의를 어기는 것으로서 대단히 불경한 행위이다. ……군신 간의 의리를 모르고 역대의 성인들께서 중국 안팎을 편히 보살피려는 공명정대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한족이니 만주족이니 하는 틀에 얽매이게 된다. 문예의 기록에서 이(夷), 노(虜) 같은 글자들을 모두 삭제하거나 바꾸어서 금기를 피하려 하고, 이것이 신하가 군주에 대해 존경하는 것이라고 여기려 하는가? 이는 이런 생각이야말로 이미 크나큰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임을 모르는 처사이다. 이후로 글을 쓰거나 서적을 간행할 때에 여전히 예전 같은 관행을 답습하여 이런 글자들을 공백으로 두거나 바꾸는 경우는 불경죄를 적용하여 엄히 다스리리라. ……종전의 서적들을 모두 꾸짖어 보충하고 바꾸라고 한다면 아마 책의 권질(卷帙)이 너무 많아 빠뜨리는 경우가 생길 것이고, 어리석은 관리들이 이를 빌미로 사실을 조사하여 기록하는 법규를 따르지 않아 많은 해독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에 한꺼번에 유지를 내려 일깨우나니, 간절히 보충하거나 바꾸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그리 하도록 하라.

이로 보건대 옹정 11년에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夷)’, ‘적(狄)’ 등의 글자를 쓰는 것이 위잉스의 말처럼 ‘금기를 범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1733년의 일인데, 《홍루몽》은 건륭 19년(1754)년에 이르러서야 갑술본이 나타났다.(‘이(夷)’, ‘적(狄)’의 문제에 관해서는 본서 제3장의 “방관(芳官)의 개명(改名)” 부분을 참조할 것.)

위잉스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지 여부는 잠시 젖혀두고, 사실상 후세의 연구자들도 조설근이 ‘만주족에 반대’했다는 관점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대륙의 학자 류상성(劉上生)은 조설근이 청나라 조정에 (재산 몰수 때문에)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주축으로 수십만 자의 논저를 써 냈다. 이 외에도 류멍시(劉夢溪)는 《홍루몽과 백년 중국》에서, “정치적 태도와 종족 관념의 복잡한 요소가 거기에 관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기인 작자설’을 주장하는 선도적인 인물들까지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반만설’의 추세를 추종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저우루창은 위잉스의 ‘두 개의 세계론’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했지만, 그 역시 조설근이 소설로써 옹정제를 암암리에 풍자했다고 설명했다. 저우루창과 같은 입장인 류신우(劉心武: 1942~ )는 조씨 가문이 폐위된 태자 집단이 은밀히 ‘혁명[變天]’을 모의했다는 이야기를 가정했다. 《홍루몽》의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이전의 주장은 조설근 때문에(종족 문제) 단지 ‘반청’ 부분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복명’의 주장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원인은 아마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조설근이 살았던 연대는 명나라 말엽 청나라 초기가 아니니, 이 시간의 좌표가 ‘복명설’의 설득력을 절감시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선험적인 부족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학자들은 조씨 가문의 재산 몰수라는 비극적인 역사가 조설근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깊이 믿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해석의 초점도 원래의 ‘종족’ 문제에서 ‘가계’ 문제로, ‘국가’에서 ‘가문’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점들에서 우리는 ‘작자 조설근’이 순수한 저작권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해석의 방향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王子武 <曹雪芹像>, 출처 Artf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