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푸시孫福熙(1898∼1962년)
자가 춘타이春苔이고 필명은 딩이丁一、수밍자이壽明齋이며 저쟝浙江 사오싱绍兴 사람이다. 1915년에 저쟝 성 성립 제5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베이징에 가서 베이징대학 도서관 관리원이 되었다. 당시 도서관장이었던 리다자오李大钊 밑에서 근무하며 여러 가지 수업을 방청했다. 그 형인 쑨푸위안孙伏园과 함께 루쉰鲁迅 등 수많은 학자들과 교유하며 “5·4운동”에도 참여했다. 그 다음해 당시 베이징대학 총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주선으로 프랑스에 유학을 가서 그때부터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1925년 귀국한 뒤 루쉰의 도움으로 산문집 『산야철습山野掇拾』을 내고 잇달아 산문집 『귀항归航』과 『대서양의 해변大西洋之滨』과, 소설집 『봄의 도시春城』를 냈다. 1928년 항저우杭州 국립 시후 예술학원西湖艺术学院의 교수가 되었다. 1930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문학과 예술이론 강의를 들었다. 1931년 귀국한 뒤 항저우예술전문학교杭州艺术专科学校의 교수가 되었다.
아! 베이징. 헤어진 지 벌써 5년이 되었구나.
펑타이豊台를 지난 뒤 기차는 허둥대며, 불꽃을 쫓는 뱀처럼 다급하게 달려갔다. 나는 호흡을 멈추었다. 주체할 수 없이, 베이징이라는 무형의 힘에 이끌렸다.
한 무더기 녹색 가운데 멀리 벽돌로 쌓은 성벽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황금색 기와와 붉은 성벽의 성루가 녹음의 파도 속에 우뚝 솟았다. 나는 정양먼正陽門과 쯔진청紫禁城,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베이징을 떠나올 때를 돌아보니 둥화먼東華門까지 가서 둘째 형에게 베이징의 위대함과 헤어지기 아쉽다고 말했다. 5년 간 상념을 억제할 수 없다가 이제 요행히도 다시 그를 우러르고 그 안에 녹아들 수 있게 되었다.
사오싱회관紹興會館에서 아침 일찍 깨어나니, 까마귀가 우는 가운데 홰나무 꽃이 눈처럼 날리고, 커다란 두 그루의 홰나무가 정원을 뒤덮었다. 싱그런 아침 햇살이 무성한 나뭇가지와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내려 가벼운 연기 색깔의 사선을 그려내며 홰나무 꽃으로 덮여 있는 약간 습한 땅위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계란이나 그와 다른 모양의 얼룩을 남겨 놓았다. 초가을의 상쾌함이 이렇듯 옅은 햇살 속에 비치는 가운데 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베이징에 안기게 된 것이다.
이별 이후 나는 알프스의 고산을 몇 차례 올랐고, 망망한 인도양 한 가운데서 떠다녔다. 그래도 나는 그런 곳의 좋은 점을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알프스의 숭고함과 인도양의 광대함이 베이징 성을 훨씬 능가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베이징 성의 숭고함과 광대함에 대한 나의 사랑은 덜어지지 않았다. 베이징에 처음 왔을 때를 돌아본다. 둥처잔東車站의 문을 나서 정양먼正陽門의 누각을 바라보니 등불이 잔뜩 켜 있는 광장 가운데 우뚝 서 있다. 그 뒤로 별이 가득한 시커먼 하늘이 저 멀리에 배경처럼 걸려 있다. 작은 도시에서만 살아 왔던 나는 그 광경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베이징대학에서는 학문의 담벼락을 보았다면, 나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저 광대하고 장엄한 베이징 성이다.
이전에 나는 베이징 같이 긴 거리를 본 적이 없다. 작은 도시에서 대가大街라 부르는 것이라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보이는 정도니, 이른바 “크다”는 것은 그저 왕래하는 사람이 서로 비껴 다니면서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 상대방 발뒤꿈치를 밟지 않는 정도일 따름이다. 베이징의 긴 거리는 바라보매 끝이 없는 듯, 저 멀리서 아득하게 사라져 버려 자신의 시력이 미치지 못한 것을 한탄하게 된다.
좌우로도 넓으니, 우물 안처럼 작은 도시에 갇혀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살았던 나로서는 가슴이 탁 트일 밖에. 이토록 높은 베이징의 하늘은 길고 넓은 베이징의 길거리와 길이길이 궁합이 맞는다. 내가 베이징을 사랑하는 까닭은 이뿐이 아니다. 저녁 무렵 베이허옌北河沿의 홰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산보를 나가면 가지들이 내 정수리에 부딪히고, 붉은 노을이 둥안먼東安門 일대의 담장 위를 비춘다. 나는 내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걸 느끼며, 비열한 사회에서 형성된 오만함은 완전히 소멸된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훨씬 강해지게 되니, 여전히 내 자신이 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둘째 형과 같이 교육부 회의장에 가서 듀이 선생의 교육철학 강연을 들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모래가 섞여 불어왔다. 우리는 걸어서 베이상먼北上門을 거쳐 세 개의 호수를 지나며 베이하이北海에 얼어 있는 눈처럼 흰 얼음을 바라본다. 거리의 수차水車에서 흘러나온 물도 옥구슬같이 얼어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경이로울 따름이다.
예전에 청난 공원城南公園에서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여름휴가 기간 동안 나는 둘째 형과 책을 끼고 같이 갔다. 아침의 태양은 이미 맹렬한데, 우리는 보라색 등나무 시렁 아래 자리를 잡았다. 베이징의 특징은 일단 그늘 속에 들어가면 시원한 바람이 분다는 것이다. 그 꽃그늘이 책을 읽는 우리는 저녁때까지 보호해 준다.
나는 지금 옛 꿈을 되씹고 있다. 그리고 미력이나마 그것을 표현하고 더 좋게 만들어 나와 모든 시민들의 베이징에 대한 호감을 배가시키려 한다. 아! 베이징이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베이징에 안겼다.
1925년 8월 13일
쑨푸시 저 『아! 베이징北京乎』 1927년 6월 개명서점開明書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