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2
2. 유민저서설(遺民著書說)의 대두
작자가 명확하지 않을 때 논자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작자를 만들어 내는 것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청나라 말엽에서 중화민국 초기에 나타난 세 편의 색은파 저작은 모두 각자의 ‘작자론’을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해설에 짜 맞추었다. 이 세 편의 저작은 다음과 같다.
왕멍롼(王夢阮)、선빙안(沈甁庵)의 《홍루몽색은(紅樓夢索隱)》(1916)
차이위앤페이의 《석두기색은(石頭記索隱)》(1917)
덩쾅옌(鄧狂言)의 《홍루몽석진(紅樓夢釋眞)(1919)
1) 왕멍롼과 선핑안의 구상
왕멍롼과 선핑안은 《홍루몽》이 청나라 순치제(順治帝, 愛新覺羅福臨: 1638~1661)와 동악비(董鄂妃: 1639~1660)의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동악비는 또 한족(漢族) 출신으로 남경 진회하(秦淮河) 지역의 유명한 기생 동소완(董小宛: ?~1651)을 엉터리로 갖다 붙인 것이다. 두 왕조의 성쇠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작자는 감히 직설적으로 쓰지 못하고 “역사연의 소설에 의탁하면서 한가로운 남녀 간의 사랑을 뒤섞으면서 설보차와 임대옥을 빌려 실제 인물에 비교하고, 영국부(榮國府)와 녕국부(寧國府)를 통해서 그 일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두 사람은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 마음속에는 분명히 원저자와 개편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원작과 개작을 구분한 사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첫째, 그들이 정한 개작 시간과 《홍루몽》에 대한 그들의 해석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개작 시간을 ‘건가(乾嘉)’ 연간으로 확정하고(그들은 〈제요[提要]〉에서 본문의 증거를 인용했다. 즉 “책에서는 분명히 황제가 강남을 네 차례 순시했다고 했으니 이는 고종 건륭제 때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가경 연간[1796~1820]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작’의 시간은 강희 중엽으로 정했다. 이렇게 해야만 《홍루몽》이 “순치(順治), 강희 연간의 숨겨진 이야기[逸事]”를 기록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자가 반드시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홍루몽》을 써 낼 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순치제와 동악비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조설근은 건륭 시대의 인물이니, “명나라 말엽에서 청나라 초까지의 여자들과는 100여 년이 떨어져 있어서 단연코 직접 보고 듣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조설근은 이 책을 고치기만 했을 뿐이지, 애초에 지어낸 사람은 당연히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해석을 견지하기 위해 건륭 시대의 조설근은 단지 개편자의 역할밖에 담당할 수 없게 만들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이 만들어진 때를 헤아려[揣] 보면 응당 강희 중엽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작이 강희 시대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사실 그들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 ‘헤아린다’라는 단어가 이미 진상을 누설하기 때문에, 두 사람에 대한 독자의 믿음이 많이 깎여 버리는 것이다.
둘째, 조설근이 이 소설의 개작자라는 설은 두 사람의 논술에서 그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변한다. 그들의 독법은 색은의 방법인데 왜 이런 방법을 채택했을까? 그들은 그게 개편자의 글쓰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즉 “조설근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수정하여 숨길수록 더욱 그 진실을 잃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자와 개정자의 글쓰기 방법이 ‘숨기기’였으니, 독자는 ‘숨겨진’ 것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왕멍롼과 선핑안의 저작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렇게 작자의 권위를 빌리는 방법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홍루몽색은》제요〉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다만 당시에 그 일이 글로 쓰는 데에는 기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작자는 감히 얘기할 수 없기도 하고 차마 말하지 않을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변형된 예를 내놓았다. 거짓으로 집안을 설정하고, 아녀자들에 의탁해서 말하고, 사랑 이야기를 빌려 그 책을 썼으니, 이는 순전히 손님을 빌려 주인을 정하는[借賓定主]의 방법을 쓴 것이다. ……작자는 감히 말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을 숨겼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까 걱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챌까 걱정했다. 이에 일부러 괴상한 이야기를 아주 교활하게 지어 내어 의문을 널리 흩어 놓고 쓸데없는 문장을 많이 넣어서, 독자로 하여금 아녀자들의 화려한 자태에 정신을 쏟느라 다른 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독자들이 모르는 틈에 대담하게 글을 써서 한 권의 책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또한 손님들의 떠드는 소리로 주인의 목소리를 압도하게 하는[喧賓奪主] 방법을 잘 쓴 것이다. 독자를 속여 자신의 숨겨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보통의 문장가들이라면 잘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저자 또는 개정자가 그들이 얘기한 글쓰기 방법을 썼는지 여부와, 만약 그렇다면 어느 부분에 숨겨 놓은 사정이 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여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자세한 논의는 본서의 마지막 장을 참조할 것.)
멍썬(孟森: 1868~1937)은 〈동소완전(董小宛傳)〉에서 확실한 역사 자료를 통해 동소완이 순치제 신묘(辛卯, 1651)년에 죽었기 때문에 궁궐로 끌려 들어갔을 수 없다고 고증했다. 그는 나중에 또 〈순치제의 출가 사실에 대한 고찰〉에서 광범한 증거를 인용하여 순치제가 출가했다는 것이 허튼 소리라는 것을 증명하면서, 순치제의 동악비는 동소완이 아니라고 했다. 리빙신(李秉新) 등도 《청 궁중의 8대 의혹》에서 순치제는 동소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지적했다.
역사에서 실제로 순치제와 송소완 사이의 애정사가 없다면 왕멍롼과 선핑안이 자자가 “감히 분명히 드러내지 못해” “숨길수록 더욱 진실을 잃지 않도록 했다.”고 한 것은 “억지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작자를 만들어 내는” 해석상의 전략에 지나지 않게 된다.
2) 차이위앤페이의 구상: “진지한 민족주의를 견지한 작가”
왕멍롼과 선핑안은 ‘원작자’를 전혀 지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차이위앤페이의 《석두기색은》은 “작자가 무척 진지한 민족주의를 견지했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이른바 ‘민족주의’라는 것은 사실 만주족과 한족의 관념적 대립을 가리킨다. 차이위앤페이의 논술에서 《홍루몽》의 작자는 한족의 입장에서 만주족의 청 왕조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차이위앤페이도 왕멍롼 등과 마찬가지로 작자가 일부러 ‘민족주의’의 낌새를 은폐했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문자옥(文字獄)을 고려하고 또 따로 새로운 국면을 열기 위해 특별히 이 책에 몇 겹의 장막을 쳐서 독자들로 하여금 ‘횡간성봉(橫看成峰)’의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차이위앤페이 역시 색은의 독법을 채용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작자가 무척 진지한 민족주의를 견지했다”는 차이위앤페이의 설명은 아주 추상적이고 전체적인 개념인데, 작자의 ‘민족주의’가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예를 들어서 “작자는 정통설을 깊이 믿고 청 황실을 거짓 왕조[僞統]로 비판했으니, 이른바 ‘가씨 집안[賈府]’이 바로 거짓 왕조이다.”라는 ‘정통설’을 깊이 믿었다. 이에 그는 가씨 집안 전체의 주요 인물들을 청나라 조정의 관료기구와 대응시켰다.
가정(賈政) = 이부(吏部)
가사(賈赦)와 가경(賈敬) = 교육(敎育)
가사(賈赦) = 형부(刑部)
가련(賈璉) = 호부(戶部)
이환(李紈) = 예부(禮部)
이 가운데 가정과 가부(賈敷), 가경, 가련 등을 어떤 기구에 대응시킨 것은 한자어의 뜻에서 연상하는 방법에 따른 것이고, 이환을 예부에 대응시킨 것은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고, 가사를 형부에 대응시킨 것은 발음과 뜻의 함께 고려했으니(가사의 아내는 성이 형[邢]씨이기 때문에 형[刑]과 발음이 같음), 이것은 ‘성명을 서로 관련시키는’ 차이위앤페이의 세 번째 색은 방법에 잘 부합한다. 이렇게 인명을 암시로 읽는 독법은 완전히 그가 생각하는 작자의 ‘정통’ 관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일단 다음 두 가지 문제는 따지지 않기로 한다. 첫째, 차이위앤페이가 어떻게 “작자가 무척 진지한 민족주의를 견지했다”는 것을 알았는가? 둘째, “작자가 무척 진지한 민족주의를 견지했다”는 점이 소설의 영향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이에 따라 차이위앤페이의 논의 자체만 보면 사실 ‘창작 방법’과 ‘독법’이 구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작자가 ‘정통’ 관념의 영향 아래 의식적으로 ‘성명을 서로 관련시키는’ 글쓰기 방법을 응용했다.
(2) 차이위앤페이는 작자가 ‘정통’ 관념을 갖고 있었다고 설정하고 그것을 ‘성명을 서로 관련시키는’ 독법에 배합했다.
(3) 작자가 자신의 ‘정통’ 관념을 나타내기 위해 ‘성명을 서로 관련시키는’ 글쓰기 방법을 설계한 뒤에 독자(차이위앤페이)가 성명을 서로 관련시키는’ 독법을 채택했다.
엄격히 말해서 첫 번째는 차이위앤페이의 ‘무명작자론’에서는 근본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두 번째는 완전히 가능하고, 세 번째는 그게 사실이라면 차이위앤페이에게 제일 유력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 번째가 성립하려면 첫 번째 조건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세 번째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는 이런 갖가지 가능성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는 그의 논술이 가지는 허점이다. 그러나 그도 작자가 사용한 ‘글쓰기 방법[筆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작자는 홍승주(洪承疇: 1593~1665)와 범문정(范文程: 1596~1666)처럼 한족으로서 청 황실에 복종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이들을 교행(矯杏)으로 대표했다. 교행은 바로 요행(僥倖)을 의미한다. ……전겸익(錢謙益: 1582~1664)처럼 일부러 청 황실에 접근했다가 오히려 갖가지 모욕을 당하는 부류는 가서(賈瑞)로 대표했다. 궤획장군(姽嫿將軍) 임사낭(林四娘)에 대한 서술은 마치 기의(起義)했다가 죽은 사람을 대표하는 듯하다. 우삼저(尤三姐)에 대한 서술은 청나라에 굴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대표하는 듯하다. 유상련(柳湘蓮)에 대한 서술은 명나라에 대한 충심을 꺾지 않은 유로(遺老)들이 불교나 도교에 숨은 것을 대표하는 듯하다.
차이위앤페이가 “작자가 정통설을 깊이 믿었다”는 것을 설명할 때는 하나 또는 몇 개의 이름으로 하나의 기구를 대표했는데, 여기서 ‘글쓰기 방법’을 이용할 때는 하나의 인물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비유한다(“누구누구로 대표한다.”는 형식으로)고 했으니,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모두 ‘성명을 서로 관련시키는’ 색은 방법이 쓰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즉 여기서 차이위앤페이는 그게 작자가 의식적으로 글쓰기 기교를 응용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정통설’을 제시할 때보다 정교한 논리이긴 하지만, 작자가 이런 글쓰기 방법을 운용했는지 여부를 실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그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가설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위앤페이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작자가 ‘명을 애도하고[弔明]’ ‘청을 배척하는[斥淸]’ 입장에 서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는 작자가 누구이며, 왜 이런 입장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 그는 그저 “작자가 무척 진지한 민족주의를 견지했다”고만 싸잡아 얘기했기 때문에 논리가 마치 모래 위에 지어진 건물 같은 것이다. 이후로 색은파의 독법을 채택한 연구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작자의 종족을 명확히 밝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서 색은파의 ‘작자 결정론’이 가지는 갖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된다.
3) 덩쾅옌과 ‘한족 작자설’의 확립
차이위앤페이는 작자의 신분을 밝히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작자는 만주족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청나라 때에 만주족에 반대할 사람은 누구인가? 서가(徐珂)의 《청패류초(淸稗類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누군가 말하길, 이 책은 사실 청나라 초기의 문인이 가슴에 담긴 민족에 대한 아픔을 발설한 수 없어서 지극히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화려한 글로 써서 만주족의 사치를 유도해 나라의 운명을 회복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손거보(孫渠甫)는 《홍루몽미언《紅樓夢微言)》에서 《홍루몽》이 “명나라에 대한 충심을 고집하는 유민(遺民)이 청 황실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지은 것”이라고 했다. 덩쾅옌은 더 나아가 작자가 오위업(吳偉業: 1609~1671, 자는 梅村)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리하여 작자의 신분 및 종족과 해석 사이의 관계도 더욱 긴밀해졌다.
오위업은 명나라의 유로(遺老)이기 때문에 덩쾅옌은 ‘원본’ 《홍루몽》이 ‘명‧청의 흥쇠 역사’를 묘사한다고 했다. 조설근은 건가(乾嘉) 연간의 인물인데, ‘원본’의 문장이 너무 방자하고 숨겨진 말이 너무 어려우며, 너무 사실에 가까우니 청 조정에 발각되기 쉬워서 오래 존속할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더하거나 삭제해야 했다는 것이다. 더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견문이고, 삭제한 것은 너무 명확히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했다. 이에 ‘명‧청의 흥쇠 역사’는 ‘숭덕(崇德), 순치(順治), 강희, 옹정(雍正), 건륭(乾隆) 다섯 황제의 역사’로 변했으니, 소설 속에서 ‘다섯 차례 더하거나 삭제했다[增刪五次]’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조설근은 왜 이렇게 해야 했을까? 덩쾅옌은 그가 건가 연간에 태어났지만 여전히 “유민의 마음을 갖고 있어서 세상물정 모르는 유생들의 군주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는 너무 잘못된 학설에 기꺼이 도전”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더하거나 삭제한 것’은 ‘종족 사상’을 배합하기 위한 것인데, 구체적으로 “비교적 뚜렷이 드러난 것을 삭제”한 것이지 작품이 풍자한 것을 삭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 이른바 더했다고 하는 것은 직접 삽입한 것이 아니라 “책에서 묘사한 주요 인물에 대해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을 가져다가 짝을 맞춘” 것이라고 했다. 순치제를 풍자한 부분은 또 “조정 신하들 가운데 비슷한 사람을 가져다 섞어 놓았는데, 이것은 책의 유통이 금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결국 조설근이 더하고 삭제함으로써 이야기가 숨겨진 가운데서도 더욱 은밀한 것으로 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설근이 이렇게 ‘숨겨’ 놓고, 이렇게 ‘짝을 맞추고’ ‘섞어’ 놓았기 때문에 덩쾅옌이 색은을 통해 찾아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셈이다.
차이위앤페이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책(《홍루몽》)에서 ‘홍(紅)’자는 대부분 ‘주(朱)’를 비유하는데, ‘주’라는 것은 바로 명나라이고 한족이다. ……가보옥(賈寶玉)이 대관원에 살 때 거처의 이름이 이홍원(怡紅院)이었으니, 이는 바로 붉은 것을 사랑한다[愛紅]는 뜻이다. 조설근이 도홍헌(悼紅軒)에서 이 책을 더하고 삭제하여 수정했다는 것은 바로 명나라를 애도했다는 뜻이다.
덩쾅옌의 논리는 이처럼 차이위앤페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만약 조설근에게 ‘종족 사상’이 없었다면 《홍루몽》을 제 알아서 생겼다가 사라지게 내버려 두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가 ‘유민의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원작을 수정하여 보존될 수 있게 했으니, “조설근의 수정이 오묘한 것은 숨김의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조설근이 《홍루몽》의 공신(功臣)으로서, 그의 공로는 원작을 쓴 것보다 크다고 했다.
덩쾅옌의 모든 해석의 틀은 작자의 ‘종족 사상’ 위에 구축되었다. 예를 들어서 《홍루몽》 첫머리에 “이것은 책의 제1회이다[此開卷第一回也]”라는 구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회는 본래 제1회가 아닌데 반드시 제1회라고 한 것은 이른바 첫머리에서 뜻을 밝히는 것[開宗明義]이다. ……첫 번째로 뜻을 밝힌 것은 어떤 일인가? 바로 효(孝)이고 종족이다. 이는 바로 이 작품 전체가 나오게 된 연원을 선포하고, 그것으로 작품의 끝까지 내용을 다 나타낸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저 작자 또는 개편자가 ‘종족 사상’을 갖고 있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중화민국 초기 색은파 논자들에게서는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비교적 초기의 왕멍롼과 선핑안의 논의에서는 작자의 신분이 확정되지 않았다가 차이위앤페이에 이르러 작자가 한족이라는 점이 암시되었고, 덩쾅옌은 다시 작자가 명나라의 유민이라고 제시했다. 그들은 명확한 증거로 ‘한인 작자설’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그저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에 근거해서 이 작품의 ‘작자’를 파견(또는 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했다. 이 세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조설근이 단지 개편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조설근의 작업 또한 ‘숨기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숨겨진 것을 찾는[索隱]’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