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서론/기존 홍학사紅學史 논의의 틀과 그 한계/연구 범위와 방향

제1장 서론

1. 머리말

구조주의 활동은 객체에 어떻게 안전하고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대해서는 비교적 경시하고, 오히려 의미가 어떻게, 어떤 대가와 방식으로 생산되는가에 대한 연구를 중시한다.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구조주의의 활동(L’Active Structualiste)〉

위에 인용된 말은 프랑스의 평론가 롤랑 바르트(1915~1980)가 1963년에 한 말이다. 본서의 연구 대상은 구조주의가 아니라 《홍루몽》의 해석 문제이다. 바르트의 말을 첫머리에 인용한 것은 본서의 연구 임무가 《홍루몽》의 의의를 발굴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연구자의 해석 방법과 의미 생산의 규칙을 고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임무를 왜 제기했는가?

《홍루몽》이 청나라 건륭(乾隆) 56년(1791)에 간행된 이래 지금까지 벌써 200년이 넘었다. 그 200여 년 동안 이 책에 대해 논자들이 제시한 해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덩칭여우(鄧慶佑: 1929~ )에 따르면 《홍루몽》과 관련된 설명은 수원(隨園) 원매(袁枚)가 지었다는 설과, 명주(明珠)의 집안일을 빗댄 소설이라는 설, 장후(張侯)의 집안일을 빗댄 것이라는 설, 화신(和珅)의 집안일을 빗댄 것이라는 설, 궁궐의 비사(秘事)를 빗댄 이야기라는 설, 순치제(順治帝)와 동소완(董小宛)의 사랑 이야기라는 설, 참위(讖緯)라는 설, 민족주의설, 무정부주의설, 가정 감화(感化)의 이야기라는 설, 사랑의 참회를 담은 이야기라는 설, 열두 미녀[十二釵]를 위해 지은 전기(傳記)라는 설, 농민설, 시민설, 전통설, 공명설(共名說), 계급투쟁설, 4대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 정치적 이야기를 사랑 이야기로 덮어 가린 이야기라는 설 등으로 귀납된다고 했다. 이 많은 명칭들은 당연히 불완전한 것들이다. 이 외에도 가령 위잉스(余英時: 1930~ )의 ‘두 세계설’과 자오깡(趙岡: 1929~ )의 ‘성쇠론’이 있다. 위 통계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을 엿볼 수도 있다.

루쉰(魯迅, 周樹人: 1881~1936)은 《홍루몽》의 취지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홍루몽》에서) 경학가는 《역경(易經)》의 원리를 보고, 도학가는 음란함을, 재자(才子)는 애절한 사랑을, 혁명가는 만주족에 대한 거부 정신을, 헛소문 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궁중의 비사를 본다.

이는 바로 《홍루몽》의 취지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이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어떻게 하나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가? 《홍루몽》에 도대체 객관적인 의미가 들어 있기는 한 것인가? 《홍루몽》의 해석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해석 활동에 영향을 준 요소는 무엇인가?

이것들은 모두 ‘기원의 문제(genetic questions)’에 속하는 문제들이다. 하워드(Roy J. Howard)가 《해석학의 세 가지 측면(Three Faces of Hermeneutics)》에서 얘기했듯이, 이런 문제들은 또한 칸트 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인식론의 뚜렷한 장점은 먼저 지식과 인식의 선결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리 가정을 해야 한다. 인식의 대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일정한 인식의 규칙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 규칙은 일종의 선험적인 존재이다.

문학 문제를 토론하면서 칸트를 끌어들이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의 해석은 결국 인식론 분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칸트 인식론의 지혜는 《홍루몽》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홍루몽》의 해석은 끊임없이 증식되고 증가하는데 우리가 해석의 선결조건과 ‘인식의 규칙’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면 《홍루몽》에 대한 갖가지 해석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옳고 그름을 판별할 길이 없어지기 쉽다.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는 것은 또 다른 의의도 있다. 《홍루몽》 및 관련 연구는 중국문학비평의 한 분과이므로, 《홍루몽》 해석 활동의 내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비평 영역에 대해서도 유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선례로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석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로 적어도 전통과 이론, 환경(언어 환경), 그리고 개인의 네 가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이렇다. 1. 전통.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 낳은 영향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전통 경학(經學)―—고문경학과 금문경학에서 얘기하는 ‘미언대의(微言大義)’랄지 맹자(孟子)가 얘기한 ‘지인론세(知人論世)’ 같은 것들이다. 2. 이론. 해석자가 상투적으로 이용하는 이론이나 기존의 규칙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당시의 주도적인 문학 이론이나 외국에서 들어온 이론(이 경우로는 왕궈웨이[王國維]가 실제의 예에 해당한다) 같은 것들이다. 3. 환경. 정치 환경과 의식 형태의 영향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정치 지도자의 ‘지도’가 작용하거나 학술계의 거장이 세워 놓은 강려한 ‘전범(典範)’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4. 개인. 해석자 개인의 학문적 소양과 경험, 편견, 사심(私心) 등을 가리키며, 또한 ‘자신의 생각으로 작자의 마음을 이해하는[以意逆志]’ 것도 포함된다. 물론 요소가 이 네 가지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며, 이 네 가지 요소 또한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동시에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홍루몽》의 해석도 이 네 가지 해석상의 ‘공통점(universal)’을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특수한 측면(particular)’이 있다. 이 때문에 앞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홍루몽》 관련 연구 논저들을 심도 깊게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상 근대 사람들이 이미 《홍루몽》 관련 연구사를 정리한 적이 있으며, 또 전문 저작도 여러 종류가 나와 있다. 이런 저작들이 《홍루몽》 연구의 발전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갖가지 한계도 있고, 해석에 영향을 주는 요소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래에서는 먼저 현존하는 《홍루몽》 연구사 저작들의 성취와 문제점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자.

2. 기존 홍학사(紅學史) 논의의 틀과 그 한계

《홍루몽》 관련 연구사를 서술하다 보면 서술 형식과 체례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본 절에서 말하는 ‘한계’는 주로 이 측면에 관한 것이지 홍학사를 저술한 전현(前賢)에 대해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본서도 논의의 형식과 체례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본서의 틀에 따르면 우리는 《홍루몽》의 예술적 기교에 대한 논의나 등장인물의 우열에 관한 논의 등을 살펴보기 곤란하며, 다른 사람이 운용하는 새로운 무슨 ‘주의(主義)’나 독자적인 무슨 ‘학(學)’ 또는 무슨 ‘논(論)’에 대해서도 본서에서는 신중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역사학의 문헌 분류에서 편년체(編年體)와 기전체(紀傳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는 ‘전통 역사학의 3대 문체’로 불린다. 《홍루몽》 연구사 저작들도 대체로 이 세 가지 부류로 귀납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시대의 순서에 따라 나온 책들을 찾아 비평하는 것이 이전 사람들이 ‘홍학사’를 정리하는 흔한 형식이었다. 역사를 서술하는 사람은 종종 《홍루몽》 연구의 발전 과정을 몇 개의 시기로 나누곤 하는데, 예를 들면 궈위스(郭豫適: 1933~ )는 《홍루몽연구소사고: 청 건륭 연간에서 중화민국 초기까지》에서 이렇게 썼다.

200여 년의 《홍루몽》 연구 역사는 크게 두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청나라 건륭 연간에서 중화민국 초기까지가 앞쪽 시기이고, 5‧4 시기 이후부터가 뒤쪽 시기이다.

한진롄(韓進廉: 1938~ )의 《홍학사고(紅學史稿)》 역시 《홍루몽》 연구 역사를 ‘구홍학’과 ‘신홍학’, ‘17년의 홍학’(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서 1966년 ‘문화대혁명’ 전까지), ‘문화대혁명 동안의 홍학’으로 나누었다.

바이둔(白盾: 1922~ ) 주편(主編)의 《홍루몽연구사론》은 다음과 같이 나뉘어 있다. 제1편(1791~1921년): 정고본(程高本)의 간행부터 후스(胡適)의 고증 사이, 제2편: 후스‧루쉰 시대, 제3편(1954~1979): 위핑보(兪平伯: 1900~1990) 비판부터 ‘《홍루몽》 평론 열풍’까지, 제4편(1979~1996): 새로운 국면.

이 외에 어우양졘(歐陽健: 1941~ ) 등의 《홍학백년풍운록》는 주로 3개의 시기를 순서대로 논술하고 있다. 즉 20년대, 50년대(위핑보 비판 시기), 90년대(어우양졘 등은 후스 계열의 텍스트 비평에 도전했음).

또 두징화(杜景華: 1938~2004)의 《홍학풍우》는 대체로 평점파(評點派) → 색은파(索隱派) → 신홍학 고증파(新紅學考證派) → 소설비평파(왕궈웨이, 루쉰)의 순서로 서술하고 있으며, 여기에 《홍루몽》 비평 열풍에 대해, 50년대 비판적 홍학 → 70년대 홍학 열풍(‘정치적 홍학’) → 8‧90년대 다원화(多元化) 홍학의 순서로 조금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본(程本)의 가치가 폄훼되는 문제와 지연재(脂硯齋) 판본의 위탁(僞託) 여부에 관한 논쟁을 언급했다. 2005년에 나온 천웨이자오(陳維昭: 1960~ )의 《홍학통사(紅學通史)》 역시 200여 년의 《홍루몽》 연구 역사를 같은 식으로 시기를 나누어 (1754년부 2003년까지를 4개의 시기로 나눴음) 처리했다.

최근에는 편년체를 써서 ‘홍학사’를 편찬한 이도 있다. 편년체는 가장 오래 전에 나타난 역사 서술의 체재인데, 《홍루몽》 연구사에는 송광포(宋廣波: 1970~ )의 《후스 홍학연보(胡適紅學年譜)》(哈爾濱: 黑龍江敎育出版社, 2003)가 있다. 이 책은 후스를 주축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는 언급하는 범위가 아주 광범해서 후스 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기본적으로 편년체 홍학사라고 할 수 있으며, ‘후스 신홍학(新紅學)’의 전후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 책이 제공하는 자료는 1962년까지에서 그친다. (원주: 그 해에 후스가 별세했음). 《후스 혹학연보》는 한 사람만을 중심으로 썼지만 여러 연구자들의 평전을 엮어 만든 유사 기전체 저작으로는 먀오화이밍(苗懷明: 1968~ )의 《풍기홍루》가 있다. 《풍기홍루》는 ‘사람 위주’의 홍학사인데, “사람을 위주로, 감성적 방식으로 《홍루몽》과 관련된 20세기 인물과 사건을 서술한” 책이다. 이 외에 궈위원(郭玉雯)의 《홍루몽학(紅樓夢學): 지연재에서 장아이링까지[從脂硯齋到張愛玲]》(臺北: 里仁書局, 2004)는 대체로 학자를 단위로 삼아 전체 책을 구축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시기를 나누어 홍학사를 서술하는 저작들의 수량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의 순서에 따라 시기를 나누어 서술하는 것은 당연히 편찬상의 방편이고 ‘역사’의 조건에 완전히 들어맞기는 하지만, 이런 종적(縱的)인 서술방식은 역사 편찬자에게 제약을 줄 수 있다. 본서에서는 현존하는 홍학사 관련 논저의 성취와 문제점을 전면적으로 평가할 생각은 아니지만, 이런 편찬 방식의 두 가지 맹점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런 역사 편찬 방식은 체례의 제약으로 인해 다음과 같은 상황에 빠지기 쉽다. 하나의 책에 대해 모두 서술하고 나서 곧이어 다른 하나의 책에 대해 모두 이야기하며, 한 인물에 대해 논의하고 나서 곧이어 다른 인물에 대해 논의하지만, 작자의 해석 기능이랄지 텍스트의 권위와 같이 해석 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본 요소들이나 공통적인 원인에 대해 초점을 명확히 맞추어 탐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지연재 비평의 수용(reception) 문제이다. 지연재 비평[脂批]이 《홍루몽》 연구에 대해 갖는 중요성은 경시할 수 없다.(자세한 논의는 제4장을 참조할 것.) 《홍루몽연구소사고》나 《홍학사고》, 《홍루몽연구사론》 등은 모두 지연재 비평의 작자와 가치, 한계성을 논하는 장절을 따로 두고 있다. 이런 논술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연재 비평에 대한 역사가의 태도와 평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연재 비평이 《홍루몽》 연구사에 어떤 특수한 영향을 주었으며, 왜 그런 특수한 영향을 주었는가? 영향을 준 구체적인 과정은 어떠했는가? 그것이 어떻게 근대 《홍루몽》 연구의 발전을 좌우했는가? 위에 서술한 여러 학자들 가운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논의를 집중한 이는 드물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시대순서에 따라 책과 사람을 개별적으로 좇아 평가하고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지연재 비평과 해석 활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특별하게 고찰할 만한 충분한 지면을 확보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홍루몽》의 필사본과 판각본의 지위, 전(前) 80회의 중대한 이문(異文) 문제와 같은 것들은 모두 《홍루몽》을 읽고 연구하는 데에서 기본적 사항에 해당한다. 하지만 텍스트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도 시대순서에 따라 책과 사람을 개별적으로 좇아 평가하고 서술하는 역사 편찬의 틀 안에서는 집중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대순서에 따라 시기를 나누어 서술하는 것(주로 논저와 인물을 틀로 삼아 순서대로 서술하고 평가하는 것)은 종종 《홍루몽》 연구의 한 가지 핵심적 문제를 찢어 버려서 독자들에게 뚜렷한 발전 과정을 제시해 주기 어렵다. 바꿔 말하자면 이런 역사 서술 체재는 분산과 격절의 문제를 야기하기 쉽다. 하나의 시기를 논의할 때마다 앞 시기 마지막에 중단되었던 화제를 다시 제기해야 하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번잡한 중복감을 준다. 예를 들어서 역사가가 자서전설[自傳說]을 비평할 때에는 후스(胡適: 1891~1962) 부분에서 한 차례 얘기하고, 위핑보(兪平伯) 부분에서 또 한 차례, 저우루창(周汝昌: 1918~ ) 부분에서 또 한 차례, 그리고 위잉스(余英時) 부분에서 (위잉스가 자서전설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질책하기 위해) 다시 한 차례 얘기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홍루몽》 연구자들을 틀로 삼는다 해도 분산과 격절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시대순서에 따라 시기를 나누어 서술하는 것의 또 다른 결점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에 종종 횡적 개념이나 공간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시간 축’과 상대적으로 ‘공간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대륙에서는 1954년의 ‘《홍루몽》 사건’(혹은 ‘위[핑보] 비판 운동’이라고도 함)을 겪고 나서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이 《홍루몽》 연구 영역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홍루몽》 연구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 중대한 변화를 경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시기 《홍루몽》 연구의 개황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편폭을 할애하여 대륙 ‘홍학’의 발전을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정치적 요소의 영향 때문에 대륙 홍학은 거의 하나의 최고 지도자를 섬기는 상황이어서 비록 중시할 만한 가치는 있지만 정치적 색채가 짙었다. 이 바람에 오히려 해외에서 이설(異說)들이 다투어 생겨났다. 홍학 발전의 각도에서 보면 해외 홍학은 홍학사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애석하게도 시대순서에 따라 편찬된 《홍루몽》 연구사에서는 대부분 이 상황을 반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1949년 이후로 중국 대륙에서 색은파는 발 디딜 곳이 없었지만 타이완과 홍콩에서는 여전히 발전의 여지가 있었다. 판중궤이(潘重規: 1907~2003)는 1959년에 《홍루몽신해(紅樓夢新解)》를 출판하여 색은파의 ‘반만설(反滿說)’을 다시 제기하여, 후스가 창립한 ‘신홍학’의 자서전설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의해도 되겠지만, 자서전설에 대한 그의 공격은 주요 《홍루몽》 연구 학파 사이의 논쟁으로서 홍학의 발전사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 애석하게도 《홍루몽연구소사고》나 《홍학사고》, 《홍루몽연구사론》 등의 시대순서 관념은 대륙의 ‘혁명의 홍학’에 국한되어 있었다. 《홍루몽연구소사고》에는 해외 홍학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지 않으며, 《홍학사고》의 1981년 초판은 겨우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으로 타이완과 홍콩의 상황을 개괄했다가 1989년의 신판에서는 그 부분마저 빼 버렸다. 《홍루몽연구사론》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대륙의 상황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홍루몽》 연구사에서 각 나라 각 지역의 연구를 아울러 고려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대단히 곤란하며, 심지어 그다지 가능성이 없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홍학사’ 즉 《홍루몽》 연구사라고 하면서 중국 대륙의 상황만을 집중적으로 논술한다면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역사학자 장순훼이(張舜徽: 1911~1992)는 중국의 옛 역사가 “위대한 한(漢) 민족만 알고 소수민족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고 지적했는데, 기존의 《홍루몽》 연구사에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보인다. 근래에는 학자들의 작업에서 많든 적든 간에 이런 결점을 보충하고 있는데, 우잉징(吳盈靜)의 《청대 타이완 홍학 초탐(淸代臺灣紅學初探)(臺北: 大安出版社, 2004)이나 캉라이신(康來新)의 〈좋아할 만한 것과 믿을 만한 것——타이완에서 《홍루몽》의 전파와 연구〉, 후원빈(胡文彬)의 《외국에서의 홍루몽[紅樓夢在國外]》(北京: 中華書局, 1993), 쟝치황(姜其煌)의 《구미의 홍학[歐美紅學]》(鄭州: 大象出版社, 2005), 쑨위밍(孫玉明: 1961~ )의 《일본홍학사고(日本紅學史稿)》(北京: 北京圖書館出版社, 2006)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최용철(崔溶澈)은 한국에서 《홍루몽》의 전파와 번역 상황을 소개했다.

피셔(David Hackett Fischer)는 《역사가의 오류(Historians’ Fallacies)》에서 역사가들이 종종 저지르는 일반화의 오류(fallacies of generalization)를 지적했다. 《홍루몽》 연구사 저작들은 제목에서 홍학의 역사이지 ‘대륙 홍학의 역사’가 아닌데도 해외 홍학의 발전을 소홀히 빠뜨리고 있으니, 이것은 피셔가 말한 ‘압도적인 예외의 오류(fallacies of the overwhelming exception)’와 아주 유사하다. [2006년 보충] 2005년에 나온 천웨이자오의 《홍학통사》는 지역을 넘어서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은 기꺼운 현상이지만, 본서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홍학사 저작들이 각 나라의 《홍루몽》 관련 담론들을 포괄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구미의 홍학》만 하더라도 유럽과 아메리카 각 나라의 《홍루몽》 수용(reception)을 전부 포괄하지 못했다. 일례로 독일어로 된 쿠빈(Wolfgang Kubin)의 《Hongloumeng: Studien zum “traum der roten Kammer”》(Bern; New York: P. Lang, 1999)의 경우도 300쪽이 넘는 논문집이지만 《홍루몽》 연구사 저작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또한 기존의 ‘홍학사’ 저작에서 한국이나 태국의 수용 상황을 찾아보려 한다면 아마 실망하고 말 것이다.

본서는 《홍루몽》 연구에 관한 통사(通史)가 아니며, 필자는 ‘전체적으로 아우를’ 야심도 전혀 없다. 본서는 지역을 논술을 주축으로 삼지는 않겠지만, 중국 대륙 이외의 홍학 발전에 대해서도 적당히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로는 위잉스(余英時), 메이지에(梅節, 즉 梅挺秀), 판중궤이(潘重歸), 피수민(皮述民). 왕관스(王關仕), 류광딩(劉廣定), 존 왕(John C. Y. Wang), 밀러(Lucien Miller), 앤서니 위(Anthony C. Yu) 등의 관점을 들 수 있다. 본서의 서술과 평론도 여전히 전체를 충분히 아우르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기존 홍학사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본서가 ‘세계화된 시야’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은 미리 언급해 둘 필요가 있겠다.)

《홍루몽》 연구사를 정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위에서 설명한 폐단을 보완해 줄 수 있겠다. 바로 학파본위로 역사를 쓰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글로 위잉스의 〈근대 홍학의 발전과 홍학 혁명[近代紅學的發展與紅學革命]〉이 있으며, 전문 저작으로는 류멍시(劉夢溪: 1941~ )의 《홍학》이 있다. 류멍시는 위잉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무척 뚜렷하다. 그는 《홍루몽》 연구자가 채택한 연구방법에 따라 200여 년 동안의 성과를 고증파와 색은파, 소설비평파의 세 학파로 나누었다. 이런 정리방식은 해외 《홍루몽》 연구자들의 발전 상황도 포괄한다. 예를 들어서 《홍학》에는 “해외 색은파의 부활”이라는 절이 들어 있으니, 이는 방법론을 씨줄로 삼아 지역의 한계를 타파한 것이라 하겠다. 이 외에 《홍학》에서는 ‘홍학’ 관념의 탐색(《홍학》 제6장 참조)과 학자들 사이의 논쟁(제7장 참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역사서술 방식은 기존의 여러 ‘홍학사’들에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리방식도 자체의 한계를 갖고 있다. 필자는 예전에 〈홍학 학파의 구분, 그리고 명칭과 실제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유행하는 분파 문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피셔는 《역사가의 오류》에서 각종 ‘성분의 오류들(fallacies of composition)’을 거론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집단 교차의 오류(the fallacy of cross groups)’는 역사가가 단체나 파벌을 나눌 때 다른 단체나 파벌과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겹치는 것을 가리킨다. 《홍루몽》 연구의 실제 정황으로 보면 연구 방법에 따라 억지로 유파를 나누게 되면 이런 ‘집단 교차의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서 차이위앤페이(蔡元培: 1868~1940)는 《홍루몽》의 등장인물들과 청나라 초기의 실제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세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째는 성품이 비슷한 사람, 둘째는 일화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 셋째는 성명이 서로 연관된 사람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차이위앤페이가 직접 설정한 독해 방식으로서, 명실상부한 ‘색은’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방법 모두 역사의 실제 인물에 대한 고증을 언급하기 때문에, 위잉스도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 또한 역사 고증”이라고 인정했다.

또 다른 예는 ‘고증파의 주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저우루창(周汝昌: 1918~ )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고증파’라고 부르려면 ‘시간성’에 주의해야 한다. 《홍루탈목홍(紅樓奪目紅)》에서는 ‘고증파’ 저우루창도 ‘은어(隱語)’내지 ‘숨겨진 말[廋詞]’을 많이 언급했다. 《홍루몽》에 등장하는 ‘목시(穆蒔)’라는 사람 이름 가운데 ‘시(蒔)’는 ‘세우다[立]’ 또는 ‘다시 심다[更種, 改植]’라는 뜻이기 때문에, 저우루창은 ‘목시’가 강희제(康熙帝) 때에 태자를 세우자마자 금방 폐위해 버린 일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목(穆) 자의 변음(變音)과 협운(協韻)은 바로 ‘밀(密)’과 같은데,” 밀(密)은 시호(諡號)라는 것이다. 또 ‘지(脂)’ 자는 발음이 변화하면 ‘기(畸)’와 같아지고, 옛날 벼루가 변해서 홀(笏)이 되었으며, “여자도 ‘수(叟)’라고 부르니,” “그 발음을 조금만 변화시켜도 sou에서 sao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저우루창은 지연재(脂硯齋)가 바로 기홀수(畸笏叟)라고 생각했다. 또 ‘건(乾)’은 건륭(乾隆)을 대표하고, ‘곤(坤)’은 홍석(弘晳)을 가리킨다고도 했다. 이처럼 저우루창이 사용한 각종 ‘성명의 상관관계’나 문자의 발음상의 연관[諧音] 및 유추해석[轉訓]의 기교는 바로 전통적인 색은의 기법이다. (저우루창이 ‘나무와 돌의 옛 맹서[木石前盟]’의 여주인공을 어떻게 사상운[史湘雲]으로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본서의 제4장에서 다시 분석해 볼 것이다.) 저우루창의 자전(自傳)에서는 그를 “고증파의 주력이자 집대성자”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량궤이즈(梁歸智: 1949~ )가 편찬한 저우루창의 전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를 ‘고증파의 집대성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조금 전에 거론한 실제 작업을 놓고 보건대 저우루창도 색은파의 상투수단을 대단히 잘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우루창을 ‘고증파’에 귀속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답은 아주 분명하다. 저우루창 본인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저우루창이 ‘[후스의] 신홍학’에 속한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고찰한 바에 따르면 저우루창이 《홍루몽》을 연구하던 초기에는 ‘후스 신홍학’에 편입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그가 ‘깨달음[悟]’을 주장하고 나선 뒤부터는 “증거가 있는 만큼만 얘기하는” 후스 고증학과는 무척 달라진다. 그는 《홍루무한정(紅樓無限情): 저우루창 자전(周汝昌自傳)》에서 ‘깨달음’을 극력 칭송하면서, 어떤 일들은 “결코 무슨 ‘고증’ 같은 걸로 다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자서전설’을 믿는데, 그것은 자신의 ‘깨달음’ 때문이지 ‘권위’를 믿기 때문은 아니라고 공언했다. (자서전설의 ‘권위’라는 것은 후스를 가리키는가?) 저우루창의 말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결국 그는 자기과시를 하면서 확실히 ‘깨달음’이 ‘고증’보다 낫다고 여기면서, 아울러 어느 정도는 그것을 실제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지연(脂硯)이 곧 상운(湘雲)’이라는 설명도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 모든 것들은 ‘홍학사’ 연구자들이 세심하게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저우루창은 ‘[후스] 신홍학에 속하는가? 만년의 그도 여전히 ’[후스] 신홍학에 속하는가?

류멍시도 사실 방법론으로 학파를 구분하는 데에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넓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색은 역시 일종의 고증이며 고증 또한 일종의 색은이다.

사실상 ‘고증파’ 또는 ‘색은파’이면서 ‘소설비평’을 겸하는 이들도 아주 많고(류멍시는 “위핑보로 대표되는 고증파 홍학”이 “소설비평파와 합쳐지는” 현상을 이미 간파했다.), 소설비평에 종사하면서도 고증의 방법을 채용한 이도 없지 않다.(송치[宋淇]와 위잉스가 여기에 가깝다.) 이 때문에 류멍시 자신도 자신의 책에서 정한 홍학의 세 유파가 융합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되면 ‘고증’과 ‘색은’을 가지고 유파를 구분하는 것은 단지 논의상의 편의만 얻을 수 있을 뿐, 학파를 나누는 것은 기껏해야 《홍루몽》 연구자들의 어떤 특징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니, 연구 대상을 너무 단순화시켰다는 혐의가 생긴다. 1949년 이후의 홍학을 ‘투쟁론 홍학’ 또는 ‘정치 홍학’이라고 부르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런 라벨(label)의 의미 또한 지나치게 광범하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반만설(反滿說)’ 역시 투쟁(만주족과 한족의 투쟁, 조정 내부의 투쟁)과 정치(명말 청초의 정치)를 많이 논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투쟁이나 정치는 어느 특정한 《홍루몽》 연구 유파만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부기] 본서에서는 ‘고증파’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증의 방법은 너무 많은 학자들이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하나의 유파로 나누게 되면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구분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에서도 ‘색은파’라는 명칭은 그대로 쓸 것이다. 다만 이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은어’를 주물러서 ‘숨겨진[隱]’ 의미를 ‘찾아내기[索]’를 좋아하는 《홍루몽》 연구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일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단일한 방법으로 《홍루몽》 연구자들의 유파를 나누는 결함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본서에서 지칭하는 ‘색은파’는 고증을 포함한 어떤 연구 방법도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투쟁론’이나 ‘정치 홍학’ 같은 명칭도 쓰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해명하겠다.(본서의 제2장 참조.)

고증과 색은을 주축으로 《홍루몽》 연구 역사를 분석하는 것은 물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그 두 가지 방법은 고정된 것이라서 연구자들이 어떤 학설을 만들 때 둘 가운데 어느 것이든 골라서, 혹은 둘 다 채용할 수 있다. 색은이든 고증이든 각자 알아서 취하면 되기 때문에 연구자는 특정한 한 가지 연구방법을 고수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고증도 가능하고 색은도 가능하다면 무슨 방법인들 쓰지 못하겠는가? 사실의 기록을 얘기할 수도 있고 허구도 얘기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할 수 없겠는가? 우리는 연구자들이 스스로 ‘무슨 파’라는 칭호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것들이다. 왜 《홍루몽》 연구자들은 특정한 연구 방법을 채택하는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로 하여금 그런 방법(혹은 방법들)을 채택하도록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은 한층 더 깊은 차원의 문제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관심은 어떤 해석 방법의 성립 조건은 무엇인가? 해석의 최종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해석 방법에 있는가 아니면 해석자에게, 또는 다른 데에 있는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본서의 첫머리에서 내세운 임무로 돌아가게 된다. 즉, 《홍루몽》의 의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의미 생성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본서는 우선 기존 역사서술의 몇 가지 맹점들을 지적하고, 이어서 자연스럽게 이전 사람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은 홍학의 문제들을 시험적으로 탐구해 보고자 한다. 이 외에 최근 세 편의 《홍루몽》 연구사에는 모두 편찬자들이 ‘역사편찬’이라는 명분을 빌려 자신을 드러낸 글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편찬자가 역사서술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억누르기(劉勰, 《文心雕龍》〈知音〉: 崇己抑人)” 편하다는 점을 이용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필자는 이런 기풍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본서에서는 최대한 그런 방식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3. 연구 범위와 방향

《홍루몽》의 해석에 영향을 주는 각종 중요 요소들을 분석하기 위해 본서는 《홍루몽》의 탄생에서 수용에까지 관련된 주요 환경들을 점검해 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특히 작자, 텍스트, 독자라는 세 가지 부분과 해석 활동 사이의 관계를 점검한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큰 맥락이 비교적 뚜렷이 나타난다는 장점이 있지만, 또한 《홍루몽》 연구의 각 분야를 포괄하는 ‘전면적’인 고찰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사실상 하나의 저작이 ‘전면적’이어서, 거시적인 부분과 미시적인 부분을 모두 빠뜨리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다지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설사 누군가 그런 시도를 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너무 잡다하거나 초점이 불명확할 것이다.) 다음은 본서의 이런 몇 가지 연구 범위에 대한 약간의 부연설명이다.

첫째, 우선적으로 작자(authorship)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사실상 논의 과정에서 동시에 우리는 《홍루몽》 연구 저작들에 담긴 해석의 권위(authority) 관념과 작자의 권위에 대해 공인(authorization)을 받는 행위들을 판명하게 될 것이다.

《홍루몽》의 초기 필사본에는 모두 지연재 등의 비평이 붙어 있다. 이 비평문을 통해 우리는 조설근(曹雪芹, 이름은 점[霑]: 1715?~1763?)이 책 전체의 작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이 책의 내용을 덧붙이거나 빼고 다듬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논의가 분분한데, 자세한 설명은 뒤에서 다시 하겠다.) 그러나 초기 필사본들은 한 때 종적이 사라져 버렸고, 널리 유행한 췌문서옥(萃文書屋)의 《홍루몽》에는 작자의 성명이 적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연재 등의 비평도 거의 전혀 남아 있지 않아서, 조설근의 이름도 비평문과 함께 삭제되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정고본’(즉 췌문서국 판본)의 서문에서는 이렇게 명시해 놓았다.

작자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서 결국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책 안에 조설근 선생이 여러 차례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고본’ 및 그 후예들은 한 때 세상에 널리 유행했기 때문에 조설근을 그저 ‘수정한 사람[刪改者]’으로 보는 견해가 신속하게 퍼졌다.

이 때문에 청나라 때의 독자들은 《홍루몽》의 작자에 대해 많은 추측을 했지만 착상이 서로 달랐고, 《홍루몽》 이야기의 출전(出典) 즉 ‘본사(本事)’에 대한 이해도 그에 따라 바뀌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본서의 제2장을 참조.) 1921년에 이르러 후스가 〈홍루몽 고증〉(개정판)을 발표하여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설을 제기했다. 후스의 견해는 지금도 큰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후스는 또 ‘고악(高鶚)의 속작설(續作說)’을 제기했는데, 이 또한 무수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칼그렌(Bernhard Karlgren, 高本漢)과 천빙짜오(陳炳藻, Chan Bingcho)처럼 비록 통계를 이용해서 앞쪽 80회와 뒤쪽 40회가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뒤쪽 40회는 종종 낮게 평가되곤 한다.

일반적으로 《홍루몽》의 작자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는 저작권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 국학(國學)의 대가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유일하고 합리적인 고거(考據)의 주제는 이 책의 작자 성명과 창작 연대라고 여겼다. 산스롄(單世聯)은 〈홍루의 몇 층에 있는가——홍학사에 대한 하나의 검토〉에서 작자를 알아보려고 하는 독자의 심리를 고찰하며 이렇게 썼다.

작품 자체의 매력에 미련을 갖고 작자 및 그 창작 상황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원래 일반 독자의 정상적인 심리이다.

또 다른 전문가 양광한(楊光漢)은 “독자의 심리는 작가의 생애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로 기운다.”고 했다. 이런 견해는 대체로 맞지만, 《홍루몽》 연구 영역에서는 문제가 결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표면적으로 보면 《홍루몽》의 작자를 찾는 것은 하나의 독립적인 일이다. “《홍루몽》의 작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은 단순한 학술적 문제일 뿐, 그 작품의 해석과는 무관한 듯하다. 하지만 사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홍루몽》 저작권이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커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문제에까지 미치게 된다. 작자를 확립하는 작업의 의미(텍스트는 자주적으로 독립되어 있는가?), 작자를 확립하는 방법(역사 문헌을 근거로 하는가 아니면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 추리하는가?), ‘원작자’와 수정자의 신분(양자가 같은 인물인가?), 작자의 경력과 소설 내용 사이의 관계(‘작자’의 식견이 소설에 나타난 줄거리와 내용을 써 낼 만한가?) 등등…… 총괄하자면 각종 해석가들은 모두 작자의 원래 의도(the author’s intended meaning)를 해설하는 데에 열중하기 때문에, 작자가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자세한 논의는 뒷부분을 참조할 것.)

이렇게 보면 작자 문제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해석의 문제를 유발하며, 아울러 이런 문제들은 모두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서의 논의 중점은 저작권 자체가 아니라 작자의 확립과 해석 활동 사이의 관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 연구와 중복을 피하는 한편 그 동안 소홀히 취급되던 과제 즉, 작자의 해석 작용(author-function)을 집중적으로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위 작업에 뒤이어 우리는 작자 문제에서 텍스트의 지위 문제로 넘어갈 것이다. 이 문제 또한 텍스트의 ‘진위’ 및 ‘우열’ 논쟁과 연결되며, 또한 ‘숨김[隱]’과 ‘소실[佚]’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론적으로 모든 해석은 텍스트의 산물이고, 텍스트는 해석 활동을 주재하며 압도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홍루몽》 텍스트의 지위는 종종 다른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서 ‘고악의 속작설’은 오랜 기간 동안 《홍루몽》 뒤쪽 40회에 대한 해석자들의 소감에 영향을 주어 왔다. 그 외에 《홍루몽》의 판본은 아주 많아서 필사본만 하더라도 10여 개나 되기 때문에 해석의 대상이 불안정하며, 독자가 읽을 때 의거하는 판본이 국면을 좌우하게 된다. 가령 탕더깡(唐德剛: 1920~ )은 《홍루몽》에서 여성의 전족(纏足) 즉 ‘소각(小脚)’을 묘사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기인(旗人)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설근이 일부러 회피했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조설근은 기인이기 때문에 그의 미적 관념에서 ‘세 치의 황금색 연잎[三寸金蓮]’ 같은 전족은 전혀 언급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었지만, 그가 또 한족 위주의 문화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감히 전족을 비난해서 뭇 사람들의 분노를 사려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전족’이라는 작은 부분을 통해서 논자는 작자의 ‘민족 심리’까지 추측해 내니, 비록 개별 텍스트에서는 글자나 단어가 자잘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민족 심리와 관련된 중요한 부분을 ‘굴절시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루몽》에 정말 전족에 대한 묘사가 없는가? 제56회에서 우삼저(尤三姐)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경진본(庚辰本)과 기묘본(己卯本), 몽고본(夢稿本), 몽부본(蒙府本), 척서본(戚序本), 척녕본(戚寧本), 갑진본(甲辰本), 열장본(列藏本)에서 모두 “초록 치마에 붉은 신, 조그마한 전족 한 쌍[綠褲紅鞋, 一對金蓮]”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유행하는 정고본(程高本)에는 이 구절이 보이지 않는다. 탕더깡 자신도 이 문제를 발견하고, 이 “조그마한 전족 한 쌍”이라는 구절이 조설근의 원문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는 이미 청나라 때부터 평점가들은 《홍루몽》에 등장하는 여자들이 전족을 했는지 여부에 주목했다. 2006년에 이르러 투모러(土默熱)도 전족 문제를 통해 “《홍루몽》 이야기는 결코 건륭 연간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 소설의 작자는 ‘기인(旗人)’ 조설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족 문제를 통해서 작자가 홍승(洪昇)일 것이라는 추론을 제시했다. 이렇게 보면 《홍루몽》의 첫머리에 분명히 “헤아릴 만한 왕조와 연대가 없다[無朝代年紀可考]”라고 밝혀 놓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논자들은 전혀 그걸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텍스트의 통제력은 어디 있단 말인가?

이상의 예들을 통해 보건대 해석자들이 판본을 선택하는 것과 그들의 해석 사이에 실질적으로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된다. 즉 《홍루몽》을 읽는 데에 결국 믿을 만한 텍스트(authoritative text)가 없단 말인가?

예를 들어서 제76회에서 사상운이 읊은 연구(聯句)의 첫 구절인 “쌀쌀한 연못을 지나는 학 스림자[寒塘渡鶴影]”에 대해 임대옥(林黛玉)이 뒤를 이은 다음 구절을 몽고본과 몽부본, 척서본, 척녕본에서는 “차가운 달빛 아래 꽃의 혼을 묻네.[冷月葬花魂]”라고 되어 있고, 경진본의 원래 필사본에서는 “차가운 달빛 아래 죽은 이의 혼을 묻네.[冷月葬死魂]”라고 되어 있다. (‘死’는 잘못 베낀 것이 분명한데, 필사본에는 원래 그 옆에 ‘詩’ 자로 고쳐 놓았다.) 이에 대해 열장본과 갑진본, 정갑본 등에서는 모두 ‘시혼(詩魂)’으로 표기했다. 원문이 ‘花魂’이 되어야 하는가 ‘詩魂’이 되어야 하는가, 어느 것이 더 훌륭한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이론이 분분하다. 이 문제를 논의한 학자들로는 저우루창, 송치(宋淇: 1919~1996), 린관푸(林冠夫: 1936~ ), 후원빈(胡文彬: 1939~ ), 류헝(劉恆), 차이이쟝(蔡義江: 1934~ ), 펑치용(馮其庸: 1924~ ), 천자오(陳詔: 1928~ ), 쉐홍지(薛洪勣), 지즈위에(季稚躍: 1936~ ), 정칭산(鄭慶山: 1936~2007), 왕런언(王人恩), 량궤이즈(梁歸智) 등이 있다. 단지 글자 하나에 대한 논쟁일 뿐이지만 그와 연관된 문제는 크다. 예를 들어서 송치는 이렇게 말했다.

임대옥이 ‘冷月葬詩魂’이라고 했다면 그녀의 개성과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자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펑치용은 원작에 ‘詩魂’으로 되어 있을 거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여러 차례 이 문제를 논한 적이 있다. 그는 “독자들은 절대 조설근의 고심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詩魂’은) 《홍루몽》의 사상 및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송치가 ‘작자의 뜻’을 이야기하고, 펑치용이 ‘사상 및 주제’를 이야기한 것은 모두 경시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두 가지 다른 해석에서 우리는 학자들이 종종 자신의 해석 체계 속에 다른 판본 어휘나 구절을 끌어들여 자신들이 인정하는 어휘 및 구절, 그리고 자기들 마음속에 있는 작자의 의도와 배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임대옥에 대한 자신들의 평가와 배합하는 것이다.) 다른 판본의 어휘나 구절이 결코 전적으로 해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어떤 경우는 학자의 해석 체계가 텍스트에 어떤 어휘나 구절이 있어야 ‘정확’하고 아울러 특정한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해석 행위가 이런 것이라면 텍스트는 해석 활동을 제약하는 역할을 하는 것인가? 대체 텍스트의 지위(the status of the text)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앞에서 인용한 두 가지 예는 모두 판본에 따른 어휘와 구절의 차이를 교감하는 비교적 자잘한 작업에 속한다. 사실 《홍루몽》의 판본 연구에서는 종종 어떤 판본이 나타난 시간을 확정하고, 각 판본의 지위(권위 있는 판본인지 여부)를 평가하며, 필사 과정에서 삭제하거나 덧붙인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심지어 각 판본들 사이의 계열과 부류를 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판본에 따라 다른 어휘 및 구절의 문제는 연학 연구에 전념하는 서양의 평론가들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워서 밀러(Lucien Miller, 米樂山)의 《홍루몽 속의 허구적 가면(Masks of Fiction in Dream of the Red Chamber: Myth, Mimesis, and Persona)》에서도 특별히 “《홍루몽》 판본과 판본 비평(The Hung-loumeng Text and Textual Critics)”라는 한 장을 마련하여 판본과 판본학자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본서에서 토론하고자 하는 중심 문제는 단순히 판본의 선후나 우열, 혹은 계열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 행위와 텍스트 지위 양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구로써, 이를 통해 이전 연구자들의 작업과 중복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이하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판본과 관련된 연구와 해석의 전제가 근본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나누어 서술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른바 텍스트에 ‘객관적 자체의 구조’가 있다는 것은 원칙적인 얘기지만, 《홍루몽》 연구 영역에서는 아마 이것이 해석의 산물인 듯하다.

텍스트의 ‘비밀’이나 ‘공백’도 논자의 펜 아래에서는 ‘숨겨진 것’이거나 ‘사라진 것[佚]’이 되어 버린다. 색은파 학자의 시선은 또렷한 역사를 바라보고 있고, 숨은 것이나 사라진 것을 탐색하는 학자[探佚家]의 시선은 80회 이후로 향하니……

셋째, 마지막으로 《홍루몽》의 ‘특수한 독자’들이 불러일으키는 해석의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여기서는 서양의 ‘독자 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에서 약간의 논점을 끌어들이는 것이 우리의 분석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홍루몽》의 독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어떻게 그 모두를 개별적으로 쫓아 연구할 수 있겠는가? 본서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독자’는 보통의 독자가 아니라 《홍루몽》 해석의 역사에서 특수한 지위에 있는 독자 즉, 지연재와 기홀수(畸笏叟) 같은 이 작품의 초기 독자들이다.

이른바 ‘특수한 지위’라는 것에 대해서도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1)‘특수한 지위’ 자체는 결코 우리가 주관적으로 부여한 것이 아니라 《홍루몽》 연구가 만들어낸 객관적인 사실이다. 지연재와 기홀수가 남긴 비평은 《홍루몽》 연구에서 작가론과 판본학, 사라지거나 숨겨진 것을 찾는 작업, 그리고 뒤쪽 40회에 대한 평가 분야에서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이 ‘특수한 지위’의 유래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파고들면 지연재와 기홀수의 지위가 그들과 작자의 밀접한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수한 지위’는 청대의 다른 《홍루몽》 독자 및 비평가들과 대비하여 부여된 호칭이다.

사실 건륭 56년 신해(辛亥, 1791)년에 목활자본(木活字本) 《홍루몽》이 나온 이후 지연재와 기홀수는 거의 완전히 묻혀 버려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대신 왕희렴(王希廉: 1832~1875)과 장신지(張新之: ?~?), 요섭(姚燮: 1805~1864) 세 사람이 평점을 붙인 판본이 가장 유행하고 있었다. 합사보(哈斯寶)와 유이분(劉履芬: 1827~1879), 진기태(陳其泰: 1800~1864), 왕해(王瀣: 1884~1944), 황소전(黃小田: 1795~1867) 등을 포함한 그 외의 비평가들의 평점은 근래에도 계속 편집되어 간행되고 있다. 그 외에도 손숭보(孫崧甫)의 비평과 홍추번(洪秋蕃)의 비평이 있다. 이런 독자들은 지연재, 기홀수와 마찬가지로 모두 독자 겸 평점가, 비평가이지만 《홍루몽》의 작자와 친밀한 관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의 학자들이 지연재와 기홀수에 대해 중시하는 정도는 이들 후대의 독자 겸 비평가들보다 훨씬 높다.

20세기 말엽에 일부 논자들은 이른바 ‘평점파’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목 받는 정도로 따져 보면 작자와 무관한 ‘평점파’는 지연재와 기홀수 등 지본(脂本)의 비평가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다. 몇몇 ‘이견(異見)’을 가진 이들이 지연재를 ‘제거’해 보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의 글을 발표한 뒤에도 여전히 그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이루어진 지연재와 기홀수에 대한 연구를 대충 훑어보면 몇 가지 큰 방향으로 귀납할 수 있다. 첫째, 지연재와 기홀수의 신분을 탐구함과 동시에 그들의 비평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로는 후스와 위핑보, 저우루창, 우스창(吳世昌: 1908~1986), 자오깡(趙岡), 다이부판(戴不凡: 1922~1980) 등이 있다(자세한 내용은 본서의 제4장을 참조할 것). 둘째, 소설 평점 연구에서 비평가의 지위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로는 왕징위(王靖宇)와 예랑(葉朗) 등이 있다. 셋째, 서양 문학이론을 결합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서 류다웨이(David Jason Liu, 劉大衛)와 산더싱(Shan Te-hsing, 單德興)을 들 수 있다. 넷째, 지연재 비평을 부정하고 타도하려는 어우양졘(歐陽健), 커페이(克非) 같은 학자들이 있다(자세한 논의는 본서의 제4장 참조.) 다섯째, 위핑보, 천칭하오(陳慶浩)와 같이 자료 정리를 통한 종합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있다.

본서의 논의 방법은 위의 여러 학자들과는 다르다. 본서는 주로 지연재와 기홀수가 《홍루몽》 연구에서 ‘특수한 지위’를 확립하게 된 과정과 그들의 비평이 해석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원인을 추적하고자 한다.

‘독자’의 측면에서 본서는 ‘특수한 지위에 있는 독자’들에 연구 역량을 집중시키는 한편 ‘독자 반응 비평’에서 해석의 관행(interpretive convention)과 해석 집단(interpretive community) 등의 개념을 빌려 분석을 진행할 것이다. 물론 근대의 명성 자자한 연구자들이 어떻게 《홍루몽》을 읽고, 그와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도 원래 우리의 고찰 범위 안에 들어 있다.

4. 맺음말

본서의 연구 방법은 ‘시기’를 가지고 서술 분야를 나누는 것도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석 범주’를 중심으로 하면서 아울러 각종 해석 방법의 구체적인 조작 상황을 세밀히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복잡한 《홍루몽》 연구의 현상을 조리 있게 정리하는 데에 어느 정도 편리한 점이 있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시기를 어떻게 나누어야 ‘《홍루몽》 연구사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느냐 하는 난제에 구애될 필요도 없고, ‘《홍루몽》을 연구한 인물’로 인해서 홍학의 관념을 분리시킬 필요도 없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분야를 논의할 때는 본서의 연구 방법이 어떤 난제들에 대해 선험적인 ‘면역력’을 갖고 있다. 첫째, 필자는 시간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어떻게 《홍루몽》 연구의 발전사를 타당성 있는 몇 개의 큰 장절[章節]이나 단락으로 나눌 것인가? 정치 국면의 발전에 따라 나눌 것인가? 이른바 ‘새로운 홍학의 시기’에는 ‘색은파’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서술을 할 때에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걸리지 않는다. 둘째, ‘인물’을 주축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홍루몽》 연구자들의 부류를 나누는 것(예를 들어서 왕궈웨이를 ‘새로운 홍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옛 홍학’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또 저우루창이 순수한 ‘후스 신홍학 고증파’ 학자라고 할 수 있는가?)이 타당한지 여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본서에서는 모든 《홍루몽》 연구자들에 대해 개별적으로 개황을 요약하거나 학자들 사이의 개인적 갈등에 지나치게 말려드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셋째, 공간의 차원에서 이른바 ‘구역에 따른 서술’ 문제, 예를 들어서 ‘대륙 홍학’과 ‘해외 홍학’ 같은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 (본서는 ‘전 지구적 시야’로 보는 것을 연구 목표로 삼지 않는다.)

다음에서 우리는 장을 나누어 《홍루몽》의 해석 문제를 논의할 것이다. 연구 과정에서 몇 가지 서양 이론을 참고했는데 주로 작자 중심 비평(author-centered criticism, author function)과 텍스트 비평(textual criticism), 독자 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 그리고 기호학(semiotics)이다. 하지만 ‘이론이 앞서지’ 않도록 무척 조심했다. 어떤 이는 왕궈웨이가 《홍루몽》을 논할 때 억지로 이론에 꿰맞추는 병폐가 있다고 지적하는데, 필자도 당연히 그런 위험에 대해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전체적인 연구 주체를 3개의 장으로 나누었는데, 사실 본서에서 논의하는 문제는 결코 경계가 분명하여 서로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장과 장 사이의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주석을 통해 밝혀 두었으니, 독자들께서 서로 참조하여 보시기 바란다.

行魚xy, <黛玉进贾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