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왕건王建 15일 밤 달을 바라보면서 두 낭중에게 보내다十五夜望月, 寄杜郞中

15일 밤 달을 바라보면서 두 낭중에게 보내다十五夜望月, 寄杜郞中/ 당唐 왕건王建

中庭地白樹棲鴉 뜨락은 훤하고 까마귀 깃들었는데
冷露無聲濕桂花 찬 이슬 소리 없이 목서 꽃 적시네
今夜月明人盡望 오늘밤 밝은 달 모두 다 볼 것인데
不知秋思落誰家 가을의 시름 누구에게 떨어졌을까

뜰에 달빛이 쏟아져 하얀데 갈까마귀도 더 이상 날지 않고 정원의 나무에 깃들어 있는 깊은 밤이다. 차가운 이슬은 소리 없이 내린 지 오래라 목서 꽃이 축축해졌다. 정원엔 찬 밤공기 속에 맑은 목서의 향기가 떠돌고 사위는 고요하다.

이 시에 보이는 계화(桂花)는 지금 조경수로 식재되는 계수나무 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서 꽃을 말한다. 금목서, 은목서, 박달목서, 구골나무가 바로 이 계화에 해당한다. 중국 남부를 여행할 때마다 이 나무가 있으면 유심히 보곤 했다. 꽃이 매우 귀하게 생기고 향기가 나서 과연 굴원이 노래한 내용과 잘 어울린다.

오늘 밤 보름달을 모든 사람이 본다고 한 것을 보면 중추절의 달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중추절을 큰 명절로 여긴다. ‘가을의 시름이 어느 집에 떨어졌을까?’라는 말은 ‘누가 가을 시름에 깊이 빠져 있나?’라는 의미이다. 어떤 판본엔 낙(落)이 재(在)로 되어 있어 의미 파악에 큰 도움이 된다. 수가(誰家)의 가(家)는 접미사처럼 붙은 말이다. 어느 집에 근심이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에게 근심이 있나를 표현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누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나는 시인 자신도 되고 이 시를 받는 사람도 되며 이 시를 읽는 사람도 된다고 본다. 시인에게 가을 상념이 없다면 왜 야심한 시간에 달을 보고 또 계수나무의 젖은 이슬을 보며 이런 시를 지어 친구에게 보내기까지 하겠는가? 쓸쓸한 중추절, 멀리 있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이 시의 기본 발상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을 상념에 빠져 있다고 말하지 않고 가을 상념이 누구에게 있냐고 물은 것은 왜 그런가? 이는 자신의 내면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또 이렇게 하면 상념의 주체가 이 시를 받는 사람도 되고 나아가 이 시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그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하며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을 경우 더 불행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위로와 치료, 그리고 안식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시인이 첫 구에서 마당의 달빛만 묘사하고 정작 달을 보고 있는 자신은 말하지 않고, 목서 꽃이 축축하도록 내린 찬 이슬만 묘사하고 밤이 깊어 춥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바로 마지막 구에서 완곡한 방식으로 내면을 슬쩍 드러낸 방식과 통한다. 즉 시의 함축과 여운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가 왕건이 종군(從軍)하여 변방에 가 있을 때 지은 시이며 2구는 실제 뜰의 나무가 아니라 달에 있는 나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 종군했을 때의 작품이라 하는 것은 몰라도 달의 나무라고 한 것은 바로 채용하기엔 망설여진다.

왕건(王建, 768~835)은 영천(穎川), 즉 지금의 하남성 허창(許昌) 출신으로 비교적 낮은 관직을 전전한 시인이다. 그는 장적(張籍) 교분이 깊었고 당시 궁사(宮詞)로 이름이 났다. 두 낭중(杜郎中)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곧 추석 명절이다. 이번엔 어떤 달이 떠오를까? 늘 보면서도 새롭게 보는 달이 바로 팔월대보름이다.

清 八大山人, <瓜月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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