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비가 내린 뒤 망천장에서積雨輞川莊作/당唐 왕유王維
積雨空林煙火遲 오랜 비 그친 빈숲 연기 더디 오르니
蒸藜炊黍餉東菑 명아주 나물 기장밥 밭으로 내 가네
漠漠水田飛白鷺 넓게 펼쳐진 논에는 백로가 날고
陰陰夏木囀黃鸝 어둑한 여름 녹음 속 꾀꼬리 우네
山中習靜觀朝槿 산 속 조용한 삶 아침 무궁화 보고
松下清齋折露葵 솔 아래서 재계하며 아욱나물 뜯네
野老與人爭席罷 촌 노인으로 남과 허물없이 지내는데
海鷗何事更相疑 갈매기 무슨 일로 다시 날 의심하나
이 시는 매우 뛰어난 산수시로 유명하다. 오래전에 《당시삼백수》에 수록되어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우선 이 시는 장마 기간에 쓴 시가 아니라 오래 비가 내리다가 그친 뒤에 쓴 시이다. 비가 오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지어 들로 나가고 논과 숲을 돌아보며 무궁화를 보고 갈매기와 놀려 하겠는가?
망천장(輞川莊)은 왕유가 서안의 남쪽 종남산(終南山)에 마련한 자신의 집을 말한다. 빈 숲[空林]은 왕유가 거처하는 곳이 인적이 드문 것을 말하고, 동치(東菑)는 왕유가 개간한 밭을 말한다. 연기가 더디 난다는 말은 비가 그치긴 하였지만 아직 저기압 상태라 다소 흐린 것을 말한다.
山中習靜觀朝槿 산 속 조용한 삶 아침 무궁화 보고
松下清齋折露葵 솔 아래서 재계하며 아욱나물 뜯네
습정(習靜)은 정양(靜養)하는 생활에 익숙한 것을 말하는데 아침에 무궁화를 보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 이름과 달리 인생의 짧음을 의미하는 뜻이 있다. 그래서 조근(朝槿)이라 한 것이다. 이런 덧없는 삶을 관조하여 참 삶인 정양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즉 산중에서 은거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소나무 아래서 재계하는 것과 아욱을 뜯는 것은 무슨 관계인가?
소나무 아래 도사처럼 앉아 재계한다는 것이 아니라 왕유의 집에 소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며, 아욱을 뜯는 것은 채소로 반찬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재계 때는 육식과 훈채를 멀리 하기 때문이다. 즉 왕유 자신이 채소 반찬을 먹으며 재가 신도처럼 지낸다는 말이다.
野老與人爭席罷 촌 노인으로 남과 허물없이 지내는데
海鷗何事更相疑 갈매기 무슨 일로 다시 날 의심하나
‘촌 노인으로 다른 사람과 자리 다투기를 끝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촌 노인은 왕유 자신이 이제 처음 장안에서 올 때처럼 도시 사람이 아니고 이제 시골 사람으로 적응했다는 말이며, ‘자리다툼을 한다.’는 것은 남들이 자신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격의 없이 지낸다는 것이다. 춘추 시대 양자거(陽子居)란 사람이 본래 예절을 따지고 까다로워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는데 그가 노자(老子)의 가르침을 받고 소탈한 태도를 취하자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서로 다툴〔爭席〕’ 정도로 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자(莊子)》 우언(寓言)에 나온다.
여기서 ‘파(罷)’자가 있어 흔히 ‘남들과 공명을 경쟁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해석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시골 노인이 되어 남들과 허물없이 지내다가 왔다는 말이다. 즉 그런 대화 자리가 끝 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남을 속이려는 기심(機心)이 이미 없으니 갈매기들이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들어야 할 텐데 왜 안 그런가라고 따지는 것이다. 일종의 유머이다.
이렇게 한 글자씩 의미를 알고 이 시를 보면, 참으로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라 그야 말로 은거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지닌 사람이 산수에 묻혀 사는 생활을 그림으로 그려낸 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 산수시를 잘 쓴 시인들의 시는 이처럼 단순히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산수에 시인의 철학과 삶이 담겨 있는 것이 많다. 산수화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바로 이것이 산수시(山水詩)이다. 168회에 소개한 맹호연의 시와 더불어 이 시는 참으로 격조 있는 산수시라 말할 수 있다.
365일 한시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