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적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패왕별희>를 꼽았다. 개봉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장국영이 맡았던 디에이(蝶衣)가 짙은 분장을 하고 있는 포스터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각인돼 있나 보다.
‘패왕별희’는 중원을 평정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전장을 누볐던 초(楚) 패왕(覇王) 항우(項羽)의 이야기다. 끝내 한(漢) 유방(劉邦)의 계략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항우에게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애마 추(騶)와 애첩 우희(虞姬)가 있었다. 꿈도 사랑도 잃을 처지에 놓인 항우는 “역발산혜여 기개세로다…”는 저 유명한 노래를 부르면서 모든 것을 떠나보낸다.
이 흥미진진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청대에 이르러 만개한 경극(京劇)이라는 새로운 연극과 만났다. 다시 그리고 숱한 현대사의 곡절을 지나 천카이거의 영화와 만났다. <패왕별희>는 관객이 가장 사랑한 중국영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전통문화와 굴곡진 현대를 함께 보여준 영화가 됐다. 천카이거는 자신의 재주를 한껏 드러내면서 <황토지> 같은 진지한 실험영화도 아니고, <대열병>처럼 살짝은 위험한 정치적 영화도 아니고, <현위의 인생>처럼 구도의 길을 추구하는 인생에 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영화도 아닌, 적당히 상업적이고 적당히 대중적이면서도 적당한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는 1920년대 중엽, 북양군벌이 베이징 일원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 이야기다. 베이징의 경극학교에서 길러진 두 소년은 험난한 교육을 마친 뒤 경극 무대에 오르게 된다. 디에이는 우희의 역할을, 샤오러우(小樓)는 패왕의 역할을 맡아서 열연한 그들의 경극은 금세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샤오러우는 바로 그 때 홍등가의 아가씨 쥐시안(菊仙)과 열애에 빠져들고 있었다. 경극의 연기가 곧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디에이는 샤오러우를 향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으나, 결국 사랑을 잃고 일본 군인들과 돈 많은 영감을 전전하다가 아편쟁이가 되고 만다. 중일전쟁과 국민당의 귀환, 사회주의 혁명, 문화대혁명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치면서 세 사람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갈라진다. 영화는 수천 년 전 역사 이야기와 연극 이야기가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중첩하고 있다. 마치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 같은 형국이다.
영화에는 그렇게 고상하다고 말하기 싫은 로맨스가 있다. 중국 현대사가 그렇게 고상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핵심이 로맨스인 것만은 아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중국의 역사가 이야기가 되고, 다시 연극이 되고, 또 다시 영화가 되어 왔는지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중국 전통 연극의 대명사인 ‘경극’은 ‘베이징 오페라’라는 널리 알려진 영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이징의 연극이었다. 중국에는 지역마다 이렇게 자신을 대표하는 연극들, 즉 여러 지방극이 있어 왔다. 남부의 곤곡(崑曲)이나 상하이 일대의 월극(越劇), 허난(河南) 일대의 예극(豫劇)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짐작하듯이 이 연극들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청대 중엽 이후에 시작되어 민국(民國) 초기 시절에 성행했다. 그 중에서도 경극이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매란방(梅蘭芳)이라는 출중한 배우와 그(녀)의 연극이 1930년대를 전후하여 유럽으로 널리 퍼져나가면서 신선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경극은 배우 얼굴의 분장 색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구분할 수 있고, 노래와 대사, 동작이 어우러지는 연기가 있으며, 소품이나 배경을 활용하지 않으면서 손동작 등 최소한의 장치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고, 여자 역할도 남자 배우가 해야 할 뿐 아니라 한 번 맡은 역할은 배우 생활을 그만 둘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또 경극은 매우 실용적인 극단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즉 경영과 연기가 분리된 시스템을 활용해 극단 운영의 합리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영화 <패왕별희>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경극을 둘러 싼 이러한 안팎의 이야기가 조밀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육손으로 태어났기에 경극을 위해서 손가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던 디에이는 그렇게 ‘거세’의 상징을 통해 거듭나고, 스스로 우희가 되어 갔다. 몰락한 환관이나 일본군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극단의 경영을 위한 선택이었다…….
겨우 200년 남짓한 역사를 이어온 경극은 20세기 중반부터 급격히 추락했다. 그러니 오늘날 중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경극을 손꼽는 이들은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보고 싶은, 자신이 미리 정해 놓은 중국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콘텐츠라도 시대의 필요 속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거듭나는 것은 운명이다. 그러니 이제 젊은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쇠락한 경극 극장을 대신하는 21세기다운 콘텐츠를 창조해야겠다는 중국의 고민도 함께 깊어질 수밖에 없다.
천카이거는…
1950년대 중국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감독 천화이아이(陳懷皑)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화인 집안에서 적지 않은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랐을 청년은 자연스럽게 베이징영화대학(北京電影學院) 감독과에 입학하면서 자신도 영화인의 길을 선택했다.
졸업 이후 첫 감독을 맡은 <황토지>(黃土地)가 서양에서 호평 받으면서 이른바 5세대를 세상에 알린 ‘역사적 책무’를 담당했다.
<대열병>(大閱兵), <아이들의 왕>(孩子王), <현 위의 인생>(边走边唱) 등과 같은 초기 영화들은 때로는 도가적거나 때로는 진지한 삶의 모습을 담으려 노력했다.
<패왕별희>의 대성공 이후 사회주의의 예술 체제로의 귀환과 독립적인 영화 세계의 구축이라는 두 갈래 길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우왕좌왕, 그저 그런 상업 감독으로 전락해버린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매란방>(梅蘭芳), <조씨고아>(趙氏孤兒) 등 최근 행보를 보면, 결국 자신의 명성작인 <패왕별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중국의 옛 이야기를 그럴듯한 스토리로 재창조하는 일에 영화 인생을 바치기로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