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Modern China- Alternative Chinas: Hong Kong and Taiwan


11장 Alternative Chinas: Hong Kong and Taiwan *

Julia F. Andrews , Kuiyi Shen
번역 이은상


 ⇝아편전쟁 전후의 홍콩

⇝18-19세기 수출용 그림 外銷画

– 광둥의 광저우는 17-18세기 영국과 무역. 1842년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기 이전 홍콩은 광둥에 속한 항구였다.

– 건륭제의 일구통상 정책과 광저우

⇝19세기 후반 정치카툰

19세기 후반 영국의 조계지 홍콩은 청나라 정부에 비판적인 생각을 지닌 개혁가들에게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매력적인 항구였다. 홍콩은 중국 대중매체가 비교적 자유롭게 작동하는 곳이었다. 청나라 조정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홍콩에서 청나라 조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정치 카툰을 출판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허젠스何劍士(1877-1915)이다. 허젠스는 가오젠푸高劍父(1879-1951), 가오치펑高奇峰(1889-1933, 가오젠푸의 동생) 그리고 판다웨이潘達微(1881-1929) 등과 함께 『時事畫報』 그리고 후에 『平民畫報』를 발행했다.

– 화보의 문화적 함의: 석판인쇄술의 발명과 출판 혁명

⇝신해혁명 이후 여류 문인 플로라 퐁馮文鳳(Flora Fong, 1900-1961)

1911년 신해혁명 이후 홍콩에서 망명하고 있던 대부분의 청나라에 비판적이던 지식인들은 중국으로 돌아가고 홍콩은 곧 새로운 부류의 지식인들로 채워졌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자 청나라 체제를 지지하던 지식인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 조정에서 관료를 지냈던 그들은 청나라 말 전통 예술을 홍콩에 소개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펑스한馮師韓(1875-1950)이다. 펑스한은 전각과 묵죽에 뛰어났다. 그는 그의 조숙한 딸인 플로라 퐁馮文鳳(Flora Fong, 1900-1961)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이탈리아에서 유화와 사진 그리고 조각과 음악을 공부한 플로라 퐁은 15세에 홍콩과 광둥의 예술계에 이름이 알려졌다. 1919년에 플로라 퐁은 홍콩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홍콩에서 유일한 예술학교였던 샹장여자서화학교香江女子書畫學校를 설립했다. 플로라 퐁은 1934년에 상하이에서 설립된 중국여자서화협회中國女子書畫協會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홍콩 예술

바오샤오유. “Two Deer in Snow”.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Hong Kong Museum of Art.

예술가들은 1920년대 홍콩의 번영에 매료되었다. 1925년과 1937년 사이에 중국이나 해외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중국인들이 홍콩에 예술학교와 화실을 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는 바오샤오유鮑少游(1892-1985)가 설립한 라이칭미술학원勵精美術學院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바오샤오유는 교토시립미술공예학교京都市立美術工藝學校에서 그의 스승인 기쿠치 호분菊池 芳文(1862-1918)에게서 서정적인 수묵화를 배웠다. 가오치펑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던 야마모토 순코山元 春舉(1871-1933)와 다케우치 세이호竹內 栖鳳(1864-1942) 또한 교토시립미술공예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이러한 교토화단의 대표적인 거장들로부터 일본화를 배운 바오샤오유는 1916년 일본 문무성 미술 전람회文展에서 수상했다. 1927년 바오는 가오젠푸의 초청으로 중국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8년에는 홍콩에서 라이칭미술학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후 십여 년간 바오는 매우 인상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1937년 제2회 전국미전第二屆全國美展에 전시된 57점의 홍콩 풍광을 그린 작품들 가운데 48점이 그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것이었다. 일본화풍을 다소 변형한 그의 서정적인 작품은 영남화파嶺南畫派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중반 중국 미술계를 지배했던 ‘어떻게 중국 미술을 개혁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 홍콩을 휩쓸었다. 1926년에 판다웨이潘達微, 덩얼야鄧爾雅(1884-1954) 그리고 옹포예黃般若(1901-1968)는 광저우국화연구홍콩분회廣州國畫研究香港分會를 설립했다. 1927년에는 홍콩서화문학사香港書畫文學社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은 1920년대 광둥 국화國畫 화단에 존재했던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표상한다. 한 집단은 주류인 전통 중국 회화를 옹호하고, 다른 단체는 서구화된 화풍의 영남화파이다. 20세기 전반기 홍콩의 국화國畫는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광둥 회화라는 보다 큰 영역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중국과 해외에서 온 서양화풍의 중국 예술가들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홍콩에 매료되었다. 그들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영국 식민지인 홍콩을 투영하고 있으며, 수채화와 사실적인 구상의 유화를 선호한다. 1932년 상하이의 선구적인 상업화가인 쉬융칭徐咏青(1880-1953)이 홍콩으로 옮겨와 그의 화실을 열고 수채화와 소묘를 가르쳤다.

리톄푸. Martyrdom”. 1946. 캔버스에 유화. 100×177㎝. Guangzhou Academy of Fine Art.

이 시기에 영어권 국가에서 귀국하여 홍콩에서 자리 잡은 광둥의 유화 화가들 또한 20세기 초반 북미와 영국 회화의 전형을 따랐다. 그의 인생 대부분을 캐나다와 미국에서 지낸 리톄푸李鐵夫(1869-1952)는 1932년부터 일본군이 홍콩을 침략했던 1941년까지 홍콩의 주룽九龍에서 살았다. 그는 예술에 있어 미국 인상파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William Merritt Chase(1849-1916)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추종자였으며, 벨라스케즈Velasquez의 화법을 흠모했다. 정치에 있어서는 그는 혁명가였다. 쑨원孫文(1866-1925)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심지어 1909년부터 1911년까지 동맹회同盟會의 뉴욕 분회分會의 서기書記를 지냈다. 그래서 리톄푸는 말년에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메모: 중국 근대 사회와 전통 사회를 구별하는 한 가지는 문인士의 몰락과 새로운 지식분자의 부상이다.

이본. “The Unemployed”. 1941. 캔버스에 유화. 50.5×61㎝. National Art Museum of China, Beijing.

1930년대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3명의 서양화풍의 화가는 리빙李秉(1903-1994)과 이본余本(Yee Bon, 1905-1995) 그리고 루이스 찬Luis Chan陳福善(1905-1995)이다. 리빙과 이본은 광둥에서 태어났으나 캐나다에서 성장했다. 이 두 사람은 캐나다의 위니펙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1927년에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 예술대학Ontario Art Academy에 입학했다. 리빙은 1930년에 처음으로 홍콩에 왔으며, 1931년에는 루이스 찬 등과 함께 칭화 아트 클럽Qinghua Art Club을 구성했다. 이본은 토론토에서 4년 동안 캐나다 인상파 풍경화가인 J. W. 비티Beatty(1869-1941)의 지도를 받았다. 1935에 홍콩에 온 이본은 리빙과 함께 화실을 열었다. 리빙이 캐나다에 있는 동안 그는 1956년에 광저우로 돌아갔다.

일본 침략 발발 바로 전의 홍콩 예술은 두드러진 특색이 없었다.

루이스 찬. 무제. 1980. 종이에 수묵과 아크릴. 136×209㎝. Hanart TZ Gallery, Hong Kong.

루이스 찬은 가장 홍콩적인 예술가이다. 루이스 찬은 1905년에 파나마에서 태어나 1910년에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95년 죽을 때까지 홍콩을 떠나서 산 적이 없다. 그는 그림을 독학했다. 루이스 찬은 홍콩에서 법률사무소 타자수로 일하며 영국 런던에 있는 프 레스 아트 스쿨Press Art School의 통신 교육 과정을 통해 영국 수채화를 배웠다. 그는 곧 뛰어난 수채화가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1930년대에는 수많은 예술단체들이 설립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1960년대에 루이스 찬의 전통적인 수채화는 영국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1970년대에 와서 루이스 찬의 그림은 이전과는 달리 기이한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그는 그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풍경, 사람, 물고기, TV 프로그램/쇼, 범선, 광고 그리고 홍콩의 랜드마크 등을 놀라운 방법으로 그림 속에 형상화했다. 루이스 찬의 그의 환상적인 세계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그의 그림은 홍콩적이다.

항전시기, 1937-1945

덩펀. “Zhong Kui Snatches Little Demons. 1926.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123.5×58㎝. Hong Kong Museum of Art.

홍콩 예술세계는 항일전쟁의 발발로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중국 남부 도시로부터 수많은 망명자들이 홍콩으로 몰려들었다.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던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홍콩의 인구는 46만에서 140만으로 치솟았다. 1937년과 1938년에 상하이, 난징, 우한 그리고 광저우가 연이어 일본에 의해 무너지자 예술가들은 홍콩을 피난처로 삼았다. 홍콩으로 망명한 예술가들은 당시 중국 예술계의 주류 트렌드를 함께 가져왔다. 첫 번째 그룹은 상하이에서 온 좌익 성향을 지닌 예술가들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생각을 선전하기 위해 대중매체를 이용했다. 두 번째 그룹은 이미 홍콩에 자리를 확실히 잡은, 새로운 국화國畫를 옹호하는 영남화파들이다. 세 번째 그룹은 전통적인 화풍을 지향하는 화가들이다. 그들은 모두 전시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해야 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들은 예술단체를 설립하고, 책을 출판했으며, 자선 전시회를 주관했으며, 일본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홍콩은 망명자들의 땅이자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문화적으로 보여주는 중심이 되었다.

1938년에 홍콩에 정착한 덩펀鄧芬(1892-1963)은 광둥의 명문가 출신의 국화國畫 화가이다. 그는 1920년대 상하이에서 천마회天馬會와 함께 그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가오젠푸와 친했다. 가오젠푸를 통해 그는 장다첸張大千(1899-1983), 쉬베이홍徐悲鴻, 장신江新, 왕지위안王濟遠 그리고 판위량潘玉良 등과 같은 많은 상하이 예술계 인사들과 교유했다. 1933년에 덩펀은 광저우시립미술학교廣州市立美術學校 교수가 되었고, 이듬해에 홍콩에서 활동을 했다. 덩펀은 광둥 오페라 「夢覺紅樓」의 창작을 포함한 광둥 오페라에 공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귀신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그가 그린 나쁜 귀신들을 잡는 종규 그림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의 국화는 전통적이고 통속적인 광둥문화의 정수를 추출해내기 위해 현대 메트로폴리탄 비주얼 모드를 전용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덩펀은 가격표를 만들고 유명한 아트숍인 구화당九華堂에서 자신의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

좌익 예술가들의 주된 활동영역은 카툰, 신문의 시사만평 그리고 판화였다. 중화전국목각계항적협회홍콩분회中華全國木刻界抗敵協會香港分會처럼 중화전국만화작가협회홍콩분회 또한 활발하게 활동했다. 중화전국만화작가협회홍콩분회는 1939년 5월7일부터 10일까지 홍콩에서 30명의 작가들이 100점 이상의 작품을 출품한 대규모 자선 만화전시회를 열었다. 일본이 아직도 영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예술가들은 반일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전시회 타이틀을 사용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적 정서는 분명했다. 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이들은 예첸위葉淺予(1907-1995), 장광위張光宇, 장정위張正宇, 루사오페이魯少飛, 딩총丁聰, 황먀오쯔黃苗子, 위펑郁風, 후카오胡考, 터웨이特偉, 천옌챠오陳煙橋, 루즈양陸志癢 그리고 리빙홍黎冰鴻 등을 포함하여 당시 최고의 만화가와 상업예술가들이었다. 전시회 주최 측에 의하면, 4일이란 짧은 기간의 이벤트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와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을 포함하여 3만 명 넘는 사람들이 이 전시회를 관람했다고 한다. 탕잉웨이唐英偉가 결성한 중화전국목각계항적협회홍콩분회도 1940년 5월에 루쉰魯迅을 추도하는 기념비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통적 화풍의 중국화를 지향하는 그룹 또한 시대적 위기에 대응했다. 1940년 2월에 당시 홍콩에서 망명 중에 있던 예궁춰葉恭綽와 황반뤄黃般若(1901-1968)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진작시키기 위한 이벤트를 조직했다. 150명 개인 수장가들의 2천 점이 넘는 광둥 골동품들이 홍콩대학의 풍핑산馮平山 도서관에 전시되었다. 9일 동안 이 전시를 보기 위해 20만 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풍핑산 도서관을 방문했다. 망명자들의 유입이 일본이 홍콩을 점령한 뒤 1941년 말에 다시 역전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국민당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인 충칭과 공산당의 통제 하에 있는 중국 서북부의 옌안으로 망명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예술가들은 1940년 이후 명목상 왕징웨이汪精衛 괴뢰정부의 관할 하에 있는 상하이 등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부는 해외로 도망갔다.

1946년에 발발한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일본 패망 이후에도 중국에 병합되지 않고 식민지로 남은 홍콩과 마카오로의 새로운 이주 물결을 일으켰다. 반半식민지적인 상하이의 대중매체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사회와 정치에 관한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했던 수많은 비非공산주의 진보주의자들은 우익 성향을 지닌 국민당 정권의 언론 검열에 대해 분개하거나 심지어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 황신보黃新波(1916-1980)는 그의 모더니스트 동료 장광위張光宇와 랴오빙슝廖冰兄 등과 함께 1947년 3월 홍콩에서 옌켄화회人間畫會를 설립했다. 당시 황신보는 유화 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듬해 지하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홍콩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옌켄화회에 가입하여 현대 예술과 카툰에 관한 책의 출판과 외국 예술가들 작품의 복제뿐만 아니라 『대공보大公報』와 Sing Tao Daily星島日報 그리고 『문회보文匯報』의 새로운 예술 증보판을 포함한 일련의 출판과 전시에 참여했다. 옌켄화회는 많은 회원들이 1949년과 1950년에 중국에서 직책을 맡기 위해 떠나게 됨에 따라 와해되었다. 황신보는 새로운 정부 하에 있는 홍콩에서 그의 초현실주의 추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예술

구칭야오. “Travelling in Snow”.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인구가 75만 명으로 불어났다. 대부분 상하이에서 부를 축적한 부유층들은 그들의 재산을 중국에서부터 홍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공산당 정권에서 탈출한 일부 국민당 정부 관료들은 식민지 홍콩에 영구히 정착했으며, 다른 무리들은 홍콩을 타이완이나 다른 외국으로 움직이기 전 임시 망명지로 삼았다. 중국의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광둥 지역에 거주하던 많은 중국인들 또한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10년에서 15년 동안 홍콩의 예술계에는 광둥에서 온 예술가들과 상하이와 난징 그리고 베이징 예술계에서 온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지닌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1950년에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온 국화 화가 구칭야오顧青瑤(1896-1978)는 1930년대 중국에서 전개된 전통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여류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상하이의 시전여자중학에서 미술과 역사를 가르쳤으며, 1934년에는 중국여자서화회中國女子書畫會가 결성되는데 일조했다. 그녀는 쑤저우 문인화에 뿌리를 둔 화풍을 홍콩으로 가져왔다. 구칭야오는 홍콩에서 중국여자서화회의 또 다른 핵심 멤버인 허우비이侯碧漪와 합류했다. 1950년대 홍콩에서 대부분의 고급 단계의 예술 교육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58년에 영국 식민지 홍콩에서 최초로 신아학원新亞學院에 예술을 전공하기 위한 정규 교육과정이 개설되었을 때 구칭야오가 강사로 임명되었다.

예술 활동을 위한 공식적인 체계의 부재 속에서 1950년대에 많은 예술 단체와 집단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1955년에 설립된 The Free China Ca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같은 단체들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적 생각을 공유했던 수묵화가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1956년에 차오사오안趙少昂(1905-1998, 영남화파 2세대. 양산선과 함께 嶺南五老), 양산선楊善深, 바오사오유包少游, 리옌산李研山 그리고 황반뤄 등에 의해 설립된 병신사丙申社 또한 주로 광둥 영남화파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카탈로그를 제작했다. 1956년에 설립된 홍콩중국미술회는 아마도 홍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였다. 홍콩중국미술회는 정치적 문제, 적어도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중립적이었으나, 원래는 영국 식민지 예술가들이 그린 유화와 수채화만을 보여주는 홍콩미술회의 대안으로 인식되었다. 홍콩중국미술회의 문화적 아젠다는 식민 당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영국 문화원British Council은 연간 전시와 저널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영국 문화원은 중국미술회와 공동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중국화를 순회 전시했다. 1958년에 중국미술회는 정식으로 홍콩 정부에 등록했다. 중국미술회의 회원은 2백 명이며, 영국 문화원이 1955년에 설립한 Hong Kong Arts Festival의 일부가 되었다.

차오사오안. 「파초」. 1969.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184.8×87.1㎝. 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홍콩의 예술단체를 설립하는데 활발하게 움직였던 차오사오안과 루이 서우콴呂壽琨(1919-1975)은 영남화파를 계승한 화가들이다. 차오사오안은 광저우에서 가오치펑의 가르침을 받았다. 1925년에는 그의 개인 작업실인 영남제판소嶺南製版所를 세웠다. 1927년에는 바오사오유도 가르친 적이 있는 포산시립미술학교佛山市立美术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1930년에는 광저우에 영남화원嶺南畫院이라는 개인 화실을 열었다. 그는 1934년에 난징, 톈진 그리고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1937년에는 광저우시립미술학교廣州市立美術學校 회화과의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홍콩으로 이주했다.

홍콩이 점령되자 차오사오안은 마카오로 피신했다. 그리고 국립중앙대학과 국립예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충칭으로 갔다. 전쟁이 끝나고 1948년에 차오사오안은 홍콩에 영남화원을 다시 열었다. 차오사오안은 영남화풍의 충실한 전승자였다. 그의 화조화는 가오젠푸의 스승인 거렴居廉(1828-1904)의 화풍을 계승했고, 그의 撞粉/撞水는 가오 형제의 방법을 따랐다. 그의 학생들 대부분은 영남화풍을 따랐지만, 일부는 모더니스트가 되었다. 차오는 가끔 다른 화파나 배경의 화가들과 공동 작업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홍콩의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당시 3세대였던 영남화파는 계속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딩옌융. 「까치, 매화 그리고 바위」. 1967. 족자. 종이에 수묵. 139×70㎝. Hong Kong Museum of Art.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가 세계적으로 쇠퇴함에 따라 영국 제국 또한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식민지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책이 요구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홍콩의 영국 정부는 홍콩 거주민들에게 홍콩은 특별한 곳이며 그래서 홍콩 특유의 정체성을 향유한다는 일종의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화적 지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홍콩 정체성 형성으로 홍콩 중국인들은 공산주의 체제 하에 있는 중국과 결별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에 홍콩의 지역문화와 예술을 고취시킴으로써 홍콩의 문화적 자각 의식 성장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것은 새로운 교육 및 문화기관들이었다. 1967년 3월부터 10월까지 좌익 단체들의 공산당 지지 캠페인과 가공할 만한 폭력은 홍콩 대중들을 중국 정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문화대혁명이 예술과 음악 그리고 전통문화를 파괴한 것과 함께 홍위병들이 고분과 사원 그리고 족보에 대해 자행한 신성 모독은 홍콩이 중국과 잇고 있던 끈을 더욱 단절시켰다. 홍콩인들이 홍콩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도록 한 영국 식민정부의 노력과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중국의 행위는 홍콩을 하나의 특별한 문화 공간으로 만들었다.

독특한 현대 홍콩 예술의 발달에는 아마도 1950년대 후반 신아학원에 예술과가 개설된 것이 일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1963년 홍콩 중문대학 예술과의 전신인 신아학원의 미술 교육과정은 가장 영향력 있는 장기간 교육과정이었다. 중국 전통예술을 가르치는 신아학원 예술과는 처음 20년 동안 홍콩 문화와 동일시되는 수묵화의 새로운 추상적 형태가 발전하는 중심지였다. 신아학원은 쳰무錢穆(1895-1990)와 그 밖의 다른 중국 이주자들에 의해 1949년 10월10일에 설립되었다. 1957년 1월 딩옌융丁衍庸(1902-1978)과 천스원陳士文(1907-1984)은 테크닉 훈련과 철학적이며 미학적인 함양을 균형 있게 하라는 주문과 함께 신아학원에 예술과를 개설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초대 교수진은 쑤저우에서 태어난 국화 화가인 왕지쳰王季遷(C. C. Wang, 1907-2003)과 전각가인 쩡커뤼曾克耑 그리고 일본에서 공부한 딩옌융과 프랑스에 유학한 천스원 등 4명이었다. 처음 몇 년 동안 이 학과는 고대 중국화 걸작 전시회와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던 현대 추상화가 자오 우키趙無極(1921-2013)의 개인전을 기획했다.

광저우 근방에서 태어난 딩옌융은 당시 신아학원에 들어와서 예술 행정가로 알찬 경험을 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가와바타미술학원川端畫學校에서 공부하고, 1921년부터 1925년까지는 명문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서 예술 교육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딩옌융의 예술에 대한 접근은 그가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본 현대 프랑스 회화 전시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24년에 도쿄에서 전시회를 가진 밝은 색채와 다소 과장된 형상과 붓놀림이 자유로운 그의 초기 유화는 야수파에 속했다.

상하이에서 몇 년 동안 교편을 잡은 뒤 1928년에 딩옌융은 광저우로 옮겨와 광저우시립예술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이 시기에 딩옌융은 중국화, 특히 팔대산인, 석도, 금농 등의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들은 그의 후기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1932년에 딩옌융은 상하이로 돌아와 신중국예술대학에서 가르쳤다. 전시에는 충칭에 있는 국립예술학원에서 가르쳤다. 1945년 딩옌융은 관량關良, 린펑미엔林風眠, 우다위吳大羽, 팡간민方幹民, 팡쉰친龐薰琹, 니이덕倪貽德 그리고 리중성李仲生(1912-1984) 등과 함께 충칭에서 자오 우키가 기획한 중국현대회화전에 유화 작품을 전시했다. 그의 작품에서 전통과 모더니즘의 접목은 그의 사회 활동과 평행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상하이에서 천스원, 관량, 니이더, 저우비추周碧初, 탕윈唐雲, 주치잔朱屺嶦, 쳰딩錢鼎 그리고 쑹중宋鍾 등과 함께 9인화회九人畫會를 조직했다.

왕지쳰. “Landscape No. 305”. 1974.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90.1×61㎝. 왕지쳰 가족 소장.

딩옌융은 1946년에 남부로 돌아와 광둥성립예술전과학교廣東省立藝術專科學校의 교장이 되었다. 1949년 10월14일에 그는 홍콩으로 와서 중학교 선생과 개인 레슨을 하며 살았다. 딩옌융은 1957년에 수묵화가인 루이 서우콴, 차오사오안 등과 함께 소규모 예술모임인 7인화회七人畫會를 조직했다. 1957년부터 1978년까지 신아학원에서 딩옌융은 중국예술사와 이론뿐만 아니라 수채화, 유화 그리고 중국 화조화를 가르쳤다. 그의 후기 작품은 팔대산인의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어느 정도 추상적인 수묵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야수파에서 비롯된 과장되고 왜곡된 형태의 그림을 보여준다. 딩옌융은 모더니즘과 문인화 전통을 잘 절충했다.

신아학원 초대 4명 교수진의 한 사람인 왕지쳰은 구칭야오와 유사한 전혀 색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왕지쳰은 쑤저우 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에 구린스顧麟士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린스가 수장하고 있던 뛰어난 예술품들을 통해 감식안을 키웠다. 그는 1932년에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쑤저우대학(東吳大學)에 입학했다. 같은 해, 우후판吳湖帆에게 그림과 감식안을 키우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그는 1935년에 런던 대박람회를 위한 선정위원회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49년 그는 상하이에서 뉴욕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남은 삶을 뉴욕에서 보냈다. 왕지쳰은 간혹 중국계 미국인 화가로 여겨지지만 그가 이른바 홍콩 신수묵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헌은 대단했다. 1957년에 신아학원에 수묵화 과정을 개설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지만 1962년부터 1964년까지 홍콩으로 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예술과의 학과장으로서 홍콩 중문대학으로의 합병을 감독했다. 1974년 그는 다시 예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홍콩에서 4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구린스와 우후판에게서 문인 산수화를 배웠지만 왕지쳰의 예술은 그가 신아학원에 관여했던 시기에 크게 변화한다. 1960년대 중반 홍콩 중문대학 예술과는 신수묵화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추상 표현주의에 크게 고무되었다. 왕은 전통적인 산수화의 정치精緻한 윤곽과 옅은 터치 대신에 구겨진 종이 위에 거칠게 먹물을 가볍게 두드려 그리기 시작했다.

자오 우키. “En Memorie de May”. 1972. 캔버스에 유화. 200×525㎝. Collection of the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모더니즘에 관한 정보는 1950년대 후반에 입수가 가능했지만 1958년 자오 우키에 의해 파리에서 신아학원으로 가져온 것만큼 직접적인 정보는 드물었다. 전시에 충칭에 있으면서 국립예술학원을 졸업한 자오 우키는 1948년 파리로 이주했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다.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에 매료된 그는 1958년에 추상적인 화풍을 취했다. 1958년 봄에 그는 신아학원의 초대를 받아 그의 작품 20점 이상을 전시했다. 자오의 강의는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추상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몰입은 홍콩의 많은 젊은 화가들을 고무시켰다.

반 라우. “Bamboo in the wind”. 1986. Stainless Steel. 400×100㎝. Hangzhou Municipal Government.
루이 서우콴. “Zen Painting”.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121×65㎝. Collection of Yiqingzhai, Hong Kong.

모더니즘의 전후 형태에 대한 관심은 이 시기에 이미 증가하기 시작했다. 1956년 모더니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문예신조文藝新潮』가 발간되었고, 이듬해는 루이 서우콴이 회원인 홍콩예술가협회가 같은 목적에서 창단되었다. 1958년 모더니즘 작가와 예술가들을 규합하기 위해 현대문학예술협회現代文學與藝術協會가 우시우스 웡王無邪(1936- ), 와이림 이葉維廉, 리잉하오李英豪에 의해 조직되었다. 회원의 일부는 최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조각가 창 이張義와 반 라우文樓(1933- )는 타 이베이에 있는 타이완사범대학에서 공부했다. 베트남 태생의 반 라우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추상적인 조각을 추구했지만 모더니즘과 이 시기 홍콩과 타이완의 문화 환경에서 독특한 중국 주제들의 결합에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문학예술협회의 주된 목표는 홍콩의 모더니즘 예술과 문학의 동양적 형태를 촉진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1959년에 『신사조新思潮』, 1963년에 『희망봉好望角Cape of Good Hope』 등 두 종의 잡지를 발간하고, 3개의 Hong Kong International Art salon을 1960년, 1962년 그리고 1964년에 조직했다. 이 살롱들은 유럽과 미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타이완뿐만 아니라 홍콩의 모더니즘 작품들을 보여줬다. 타이완과 홍콩에서 발달한 모더니즘 운동의 연결은 특히 이 시기 양쪽 예술계에 중요했다. 문화 행정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발전은 1960년대 초반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 홍콩 예술을 진작시키기 위해 개관 전시 “Hong Kong Art Today”와 함께 새로이 지은 홍콩 시청에 한 갤러리가 세워졌다. 이러한 권위 있는 장소의 설립은 예술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 갤러리의 초대 관장인 존 워너John Warner는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으로 새로운 매체의 이용을 포함한 실험과 독창성을 강조했다. 모더니즘은 이제 장소와 점진적으로 증가해 가는 주류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초반기에 작품을 전시했던 작가들 중에는 신수묵화의 선구자인 루이 서우콴과 모더니즘 조각가인 반 라우가 있었 다. 1948년에 홍콩으로 이주한 뒤 루이 서우콴은 여객선 회사의 조사관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1964년 시청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했으며 1966년에 홍콩 중문대학 예술전수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홍콩 현대 수묵화 운동의 선두적인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많은 모더니즘 협회에 참여함과 동시에 황반뤄의 전통화풍을 탐색하며 서구 모더니즘과 전통적인 중국화를 비평적으로 분석했다. 그의 그림은 점차적으로 추상적으로 변모했다. 그의 혁신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63년에 현대문화예술협회는 루이 서우콴에 관한 연구서를 출판했다. 그의 자아 표현적인 탐색은 수묵화에 모더니즘적인 요소들을 가미시켰다.

최신 서구 추상 표현주의와 전통적인 아시아 재료들을 결합한 추상적 신수묵화는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청 갤러리의 열띤 환영을 받았다. 추상적 수묵화가 처음부터 작품을 제작한 작가들에 의해 홍콩 문화의 상징으로 주장되기보다는 종종 아시아 철학이나 동방의 미학과 관련하여 논의되었지만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홍콩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추상적 수묵화를 논하게 되었다. 영국도 중국도 아닌 이 예술은 민족-국가 너머 실질적인 필요에 의한 독립적인 문화를 제안했던 방법에 의해 진작되었다. 신수묵화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시기에 전통적 형태의 현대 예술은 대체로 제도권 밖에 있었다.

우시우스 웡. “Cloudy Harmony”. 1978. 종이에 수묵. 136×67㎝. Hong Kong Museum of Art.

신수묵화에서 두 번째 영향력 있는 인물인 우시우스 웡王無邪(1936년 생)은 현대 문학과 현대 서구 스타일의 예술과 디자인에 깊이 뿌리를 둔 입장에서 수묵화에 접근한다. 모더니즘에 매료된 그는 1957년에 루이 서우콴에게 수묵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자오 우키가 신화학원에서 강의했던 해인 1958년에 그는 현대중국문학미술협회를 창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웡은 미국에서 디자인과 추상화를 공부하고, 1966년에 홍콩 중문대학의 전수과가 제안한 디자인 과정을 운영하기 위해 홍콩으로 돌아왔다. 1967년에는 새로운 시청 아트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를 맡았다. 제스처적이고 서예의 자연스러움을 언급하는 루이 서우콴의 작품과는 달리 웡의 그림은 텍스트적인 빽빽함을 통해 송대의 기념비적 산수화와 관련한 철학적인 심오함을 제시한다. 이렇게 기하학적으로 상상한 1970년대 작품에서 웡은 동시에 중국 산수화와 서구 모더니즘의 철학적 토대를 탐문하고 있다.

류쿼쑹. “Eclipse”. 1971. Set of seven panels. 120×519㎝. 종이에 수묵채색. 개인 소장.

신수묵화의 세 번째 중요한 인물은 류쿼쑹劉國松(1932년 생)이다. 그는 1971년에 홍콩 중문대학 예술과에서 가르치기 위해 타이완에서 홍콩으로 이주했다. 그는 1972년부터 1976년까지 학과장으로 있으면서 전수과의 현대회화 교육과정을 진작시켰으며, 1977년에는 그의 학생들과 함께 홍콩현대수묵화협회를 설립했다. 그가 홍콩 중문대학에 있던 21년 동안 류쿼쑹은 홍콩에서 신수묵화의 강력한 대변인이었다.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뒤 그의 예술과 이론은 중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류쿼쑹은 모더니즘의 초기 지지자였다. 1956년 타이완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타이완에서 모더니즘 예술을 고취하기 위해 5월화회五月畫會를 설립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에게 열광했다는 이유로 5월화회는 공산주의 성향을 지녔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것은 계엄령 하에 있던 타이완에서는 치명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타이완에서 전시를 할 수 없었던 5월화회의 회원들은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파리 청소년 전시회Paris Youth Exhibition 같은 국제적인 전시회에 출품했다.

황중팡(해럴드 웡). “Layered Clouds and Folded Peaks”. 2000. 족자. 종이에 수묵채색. 365.8×123.8㎝. Nelson Atkins Museum of Art.

1960년대 초반 류쿼쑹은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송대 산수화를 처음 본 이후 현대 수묵화를 그리기 위해 캔버스 대신에 종이와 먹 그리고 콜라주를 선택했다. 이때부터 그의 모더니스트로서 전통에 대한 도전은 그의 토착 예술 유산을 겨냥했다. 루이 서우콴과 우시우스 웡처 럼 류쿼쑹은 그의 예술 이론에 관한 글을 씀으로 말미암아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초기 경력에서 한 중요한 면모는 그의 예술을 지칭할 때 국화 대신에 수묵화라는 용어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제적인 예술에 있어 그의 위치를 매우 의식했다. 그는 방랑자처럼 국가라는 편협한 지역주의적 용어의 사용을 피했다.

국제적인 것을 지향하는 현대 아시아 회화의 선구자라는 그의 역할은 1980년부터 중국에서 찬양을 받았다. 1981년에 류쿼쑹은 베이징에 있는 새로이 설립된 중국화연구원中國畫研究院의 초대를 받아 그의 작품을 전시했다. 2년 뒤 그는 중국미술관에서 중국에서 최초로 그의 개인전을 열었다. 1983년에 중앙미술학원에서 가진 일련의 강의에서 피력한 류쿼쑹의 예술과 예술에 대한 생각은 예술가들이 문화대헉명의 고도로 정치화된 예술의 대안을 갈구하던 시기에 환영을 받았다. 중국의 실험수묵화의 뿌리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홍콩과 타이완의 신수묵화, 특히 류쿼쑹의 예술과 이론에서 찾아야 한다.

구칭야오의 걸출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해럴드 웡Harold Wong黃仲方(1943년 생) 또한 상하이에서 태어나 5살 때 그의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하여 1956년 구칭야오에게서 개인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승과 제자 모두 예술품 수장가 집안이다. 해럴드 웡은 예술품 수장가 웡파오셰黃寶熙의 아들이며, 구칭야오는 청 말 저명한 화가이자 수장가였던 구윈顧雲(顧若波)의 손녀다. 두 사람 모두 집안에 수장되어 있는 중국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고전에 대한 감식안을 가질 수 있었다. 구칭야오는 중화민국 시기에 상하이에 있었으며, 해럴드 웡은 전후 홍콩에서 살았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웡은 극히 평범한 직업을 선택하지 않고 1977년부터 1990년까지 홍콩에서 고대 중국화를 전문으로 하는 갤러리를 운영했다. 그때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는데 정열을 쏟았다. 그가 國畫의 전통적인 테두리 안에서 실험한 것은 현대 회화에서 거의 유일하다.

포스트모더니즘

1970년대 홍콩은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홍콩은 자본주의 세계이다. 홍콩은 번영과 질서 의식, 합리성, 실용성, 현실성, 평화와 자유로움에 자부심을 느낀다. 홍콩 정체성의 부호로서 신수묵화의 부상은 경제적 그리고 도시 발전의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안전 의식과 우월감은 홍콩의 미래에 대한 영국과 중국 간의 협상이 1979년에 시작되었을 때 산산이 부서졌다. 1981년 영국 여권 규정의 변경은 홍콩인 대부분을 영국 이민의 부적격자들로 만들었다. 1984년 마가렛 대처 정부는 식민지 홍콩은 신제新界에 대한 임대가 만료되는 1997년에 중국에게 반환될 것임을 선언했다. 이러한 결정은 홍콩 거주민들에게 홍콩인들은 1984년에 명백하게 법적 보호와 합리적인 경제 체제 그리고 그들이 익숙한 개인의 자유가 결여된 나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특별한 후식민의 상황을 만들었다. 근본적으로 홍콩의 안정성에 기반을 두었던 홍콩 정체성의 연약함이 드러났다.

창 초우 초이. “A Calligraphic Inscription by the ‘King of Kowloon’”. ink graffiti. exhibited January 2008, Telford Plaza, Kowloon.

해외로의 이민이 곧바로 시작되었지만 반환에 관한 홍콩 현지 관심의 가장 극적인 표현은 5년 뒤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사건에 뒤이어 발생했다. 문화대혁명 때 중국인들을 엄습했던 공포가 전례 없는 정치적 활동주의의 시기로 진입한 홍콩인들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입법회를 위한 직접 선거가 1991년을 시작으로 도입되었다. 1995년에 홍콩예술발전국香港藝術發展局이 설립됨에 따라 실험적이며 혁신적인 형태의 예술에 대한 공공 자금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중국과 홍콩의 관계가 1997년 홍콩 반환에 발맞춰 더욱 긴밀해짐에 따라 홍콩의 현재 위태로워진 지역 특성은 보편화된 불안의 문제가 되었다. 자신을 ‘카오룽의 황제九龍皇帝’’라고 칭했던 괴짜 거리 낙서예술가 창 초우 초이曾灶財(1921-2007)는 1990년대에 그가 영국에게 돌려달라고 한 세습재산인 공공건물을 글씨로 뒤덮었다. 포스트모던이라기보다는 순진하지만 창과 그의 활동은 당시 보편적인 관심을 정확하게 반영했기에 마치 행위예술 또는 공공미술인 것으로 호평을 받았다. 예술 비평가와 매체에 의해 현지 영웅의 지위로까지 격상된 과거의 부당함에 대한 그의 돈키호테 같은 공상적인 집착은 미래에 대한 공포를 말해준다.

포비 칭 잉 만. “Beautiful Flowers” 일부. 1996. installation with sanitary napkins, colored eggshells, and chair with light bulb, dimensions variable. 작가 소장.

베이징이나 런던, 워싱턴 D. C. 또는 모스크바에서 결정이 내려진 전적으로 외적인 사건들은 홍콩인들의 사고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세계 예술 동향, 특히 예술의 주류가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환된 것과 대칭을 이룬다. 해외에서 유학한 젊은 세대인 홍콩 태생 예술가들은 새로운 매체와 예술적 관심 그리고 종종 사회적, 정치적 성향에 관여한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성향은 1996년에 홍콩 최초로 예술가가 운영하는 출판과 세미나 회의 그리고 그 밖의 활동들과 함께 설치와 행위예술 전용 전시공간인 Para Site 藝術空間의 설립을 가져왔다. Para Site 藝術空間를 설립한 예술가들 가운데 홍콩폴리테크닉 교수인 창 탁 핑曾德平(1959년 생)과 포비 칭 잉 만文晶瑩(1969년 생)이 포함된다. 근처에 있는 한 오래된 상업지역에 있는 빌린 공간에서 특정 장소에 설치하는 작품을 전시한 그들의 첫 번째 전시는 현지의 이웃과 역사에 있어 홍콩의 순간에 반영되었다. 광둥 오페라 공연을 위해 임시 무대를 만드는데 대나무와 아연 도금한 철판을 사용한 창의 작품 “Hello! Hong Kong―Part 3″은 현지 광둥 문화 그리고 광둥 문화와 홍콩의 식민시기 및 해양 과거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가냘프게 들리는 멜랑꼴리한 아리아의 사운드 트랙과 함께 유리병에 있는 사진들, 종이반죽으로 만든 배 그리고 물질적으로 홍콩의 과거와 현재 문화를 연결해 주는 다른 물체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페인트 벗겨진 벽과 낡은 광고 이미지들과 함께 홍콩 부두 건설에 관한 슬라이드가 깨지기 쉬운 배를 비추고 있었다. 급속하게 사라지는 전통 공연예술과 공예에 대한 향수가 홍콩에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홍콩의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에 있어서 1996년 홍콩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반향은 그 시대와 공간에 있어 특히 의미심장하다.

호시우키. “Walking on Two Balls”. 1995. installation with video, flip book, and two wooden balls. 작가 소장.

포비 만은 그녀의 1996년 작 “Beautiful Flowers”에서 공개 전시에 관한 금기를 깼다. 얼핏 보면 조각한 꽃들의 바다 같은데, 이 설치 미술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꽃잎은 생리대 그리고 한가운데는 빨간색으로 칠한 계란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이 월경과 재생산을 언급함으로써 그렇게 홍콩에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빨간 계란은 중국 남부 관습에서 아기의 탄생 100일 축하를 나타내고 그래서 문화적으로 특정적인 언급이다. 호시우키何兆基(1964년 생)는 매우 다른 시각에서 신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의 1995년 비디오에서 그는 두 개의 조각한 큰 공 위에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일시적으로 몸을 못 쓰게 함으로써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보는지를 배우는 방법에 도전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맥락에서 이 작품은 또한 많은 관찰자들에 의해 비유적으로 해석되었다. 홍콩 반환을 전후한 불안정한 시기에 살았던 많은 예술가들에게 홍콩 현지의 관심을 탐색하고 서구 설치 미술품과 행위 모드로 표현된 포스트모던 예술의 전시는 그들이 아직까지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중국인의 정체성에 관여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다.

윌슨 카호 셰. “Victoria City”. 2006. 비단에 수묵수채화. 71×95㎝. 개인 소장.

홍콩예술발전국의 재정 지원을 받아 홍콩―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 행정구로 알려진―은 2001년부터 비엔나 비엔날레 참가를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2005년 당시 Para Site 藝術空間과 관련된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이며 예술가였던 찬 육컹陳育強(1959년 생)은 설치 미술품인 “Empty City, Inverted, Suspended”로 홍콩을 표현했다. 예술적, 문화적 정체성과의 투쟁은 특히 홍콩 태생의 젊은 세대 예술가들이 부상함에 따라 반환 후 홍콩에서 강력한 테마이다. 예를 들면, 윌슨 카호 셰Wilson Ka-ho Shieh石家豪(1970년 생)는 홍콩 다운타운의 옛 이름인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서로 다른 시기와 스타일의 서로 다른 국적의 회사들에 의해서 건설된 이 도시의 주요 건축물 랜드마크들을 건축 디자인의 특징을 반영한 의상을 입은 민족적으로 다양한 여성들을 묘사함으로써 의인화했다. 이 이미지들은 홍콩을 공간적으로 그리고 홍콩의 도시 역사에 친숙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의뢰로 건설된 I. M. Pei의 Bank of China 빌딩은 1989년에 완공되었다. 셰는 이 건물을 삼각 디자인과 우아한 선의 여인으로 묘사했는데 이 건물의 민족을 그녀가 머리에 쓰고 있는 삼각형의 쿨리 모자로 나타내었다.

*이 글은 필자가 몇 년 전에 영남학파와 홍콩미술이 궁금하여 공부삼아 Julia F. Andrews 와 Kuiyi Shen이 쓴 The Art of Modern China(2012)에서 관련 부분 11. Alternative Chinas: Hong Kong and Taiwan을 정리, 번역해 두었던 겁니다. 저처럼 홍콩미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관심 있는 선생님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