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다지다
17일째 아침이 밝아왔다. 눈을 뜬 곳은 길이 통한다는 퉁다오通道였다. 퉁다오는 후난성 서남부 끝이지만, 남쪽으로는 광시의 싼장三江 및 룽성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구이저우 리핑으로 통하는 지역이다. 3개의 성이 한데 만나는 교통의 요지다. 어디로 갈 것인가. 홍군에게는 중차대하고 절실한 질문이었다. 국부군의 추격에 덜미를 잡혀 샹강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홍군이 사투 끝에 험준한 산길을 넘어오니 이곳 퉁다오였던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이는 행군 노선을 넘어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에 관한 문제 제기였다.
절실한 질문, 어디로 갈 것인가
활로를 찾아야 했다. 전략전이 계획은 원래 샹강을 넘은 다음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후난성 서부의 홍군 제2방면군과 합치는 것이었으나 그 길은 이미 막혀버렸다. 게다가 코민테른과 통신이 두절된 지도 이미 몇 달째였기 때문에 이곳 퉁다오에서 중앙홍군은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첫 단추를 푼 사람은 저우언라이였다. 그는 인맥이 넓은 마당발이었고 조직 곳곳으로 통하는 신경세포의 결합체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와 국제 정세에도 밝았고 난창봉기를 주도할 정도로 조직과 무장투쟁 등 다방면에 경험이 풍부했다. 북벌전쟁이 한창이던 1927년 초에는 노동자 봉기를 일으켜 상하이시 임시정부를 만들어 장제스의 북벌군이 무혈 입성하는 것을 도왔다. 1927년 8월에는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에 대항해 난창봉기를 주도했다. 대장정 준비와 실행 지휘권을 위임받은 3인단의 한 사람이 될 만큼 코민테른의 신임을 받았다.
3인단에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이 결정하면, 저우언라이는 당·정·군 전체 조직의 집행을 총괄했다. 저우언라이의 촘촘한 연결망은 왕따 마오쩌둥에게도 이어져 있었다. 마오쩌둥을 들것에 실어서라도 대장정에 참가하게 했고, 마오쩌둥의 부탁을 받고는 장원톈, 왕자샹과 같은 종대에 배치되도록 손을 썼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내세우는 연출력을 발휘했다.
저우언라이는 퉁다오에 진입한 다음 날인 1934년 12월 12일에 공산당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3인단 회의를 열 수도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정치국 회의를 대장정 이후 처음으로 소집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 1년 동안 중요한 당정회의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던 마오쩌둥을 참석시켰다. 조직의 분란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명분도 있고, 새로운 리더십을 끌어내기 위한 절묘한 수였다.
대장정을 시작할 당시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던 보구(당시 직책은 정치국 총부책總負責)와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은, 정치국 회의를 소집한 것도, 마오쩌둥을 참석시킨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대장정에 관해서는 중국 공산당 정치국이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3인단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셋이서 모여 결정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경 기회주의라는 비판을 수차례 받으며 밀려난 인물을 대면하는 것도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정치국 위원이며 집행위원회 주석인 마오쩌둥을 당정회의에서 배제하는 것은 당규에 어긋난다며 밀어붙였다.
정치국 회의는 보구가 주재했다. 보구가 안건을 소개하며 개회를 선언하자, 오토 브라운이 이어받았다. 오토 브라운은 홍군이 샹강 전투 이후 상당히 피로한 상태이므로 휴식을 취해야 하며, 후난성 서부의 홍군 제2방면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으로 진군한다는 기존 방침을 재차 언명했다.
마오쩌둥이 즉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왕따 마오쩌둥은 1년 만에 참석한 정치국 회의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서진입검西進入黔(黔은 구이저우의 약칭)으로 요약되는 전병轉兵을 주장했다. 즉 북쪽의 후난성이 아니라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구이저우성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장제스가 이미 홍군의 행군 방향과 의도를 파악하고 후난성으로 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을 터이니 국민당의 힘이 덜 미치는 구이저우성으로 들어가 새로운 출구전략을 모색하자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서진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적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병사를 움직이면 적들이 구축해둔 수많은 토치카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둘째, 구이저우성은 국민당의 통치력이 약한 곳이고, 병력도 1개 군단밖에 없다. 셋째, 구이저우의 왕자례王家烈가 이끄는 국부군 제25군은 장병들이 총과 함께 아편을 피우는 긴 담뱃대를 하나씩 더 갖고 다녀서 쌍창병雙槍兵이라 불릴 만큼 아편쟁이가 많고, 그만큼 전투력이 약하다.
저우언라이와 장원톈 등이 마오쩌둥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전부터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의견을 자주 경청했다. 장원톈은 한때 마오쩌둥처럼 들것 신세가 된 적이 있었고, 당의 전략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마오쩌둥과 의견을 같이했다.
마오쩌둥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해 오토 브라운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보구는 샹강 전투에서 참패한 후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보구는 코민테른이 비준한 전략전이를 쉽게 바꿀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일단 서쪽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북상하기로 했다. 기존 방침을 견지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전병 주장을 적절하게 수용한 셈이었다. 퉁다오 정치국 긴급회의가 끝나자 전선에서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마오쩌둥이 예상한 대로 후난성 서부로 향하는 길목에 국부군 20~30개 사단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퉁다오회의는 발언록이나 결의문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청되다시피 했던 마오쩌둥이 1년 만에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 당 중앙의 기존 방침에 반하는 새로운 전략적 대안을 제시하여 상당한 공감을 얻은 것은 큰 정치적 변화였다. 저우언라이가 3인단 회의가 아닌 정치국 회의를 소집함으로써 3인단의 전권 수임 체제를 스스로 깬 것은 마오쩌둥에게 재기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3인단이라는 공산당 지도 그룹을 밀어내고 공산당의 실권과 홍군의 지휘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서두르지 않았다. 정치적 반격을 할 때도 단판승부로 몰아가지 않았다. 한 사람씩 설득하여 한 단계씩 추진해나 갔다. 사실 새로운 전략에 대한 사전 작업은 장정의 행군 종대에 마오쩌둥을 장원톈, 왕자샹과 함께 배속시켜 ‘들것 3인단’이 만들어질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법은 없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것이 어느 날 수면 위로 올라올 뿐이다.
구이저우로 기수를 틀어라
우리는 퉁다오 시내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북쪽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공성서원을 찾아갔다. 어떤 자료에는 왕씨 민가에서 퉁다오회의를 했다고 나오는데 현지에서 확인해보니 민가가 아니라 서원이었다. 공성서원 정문 기둥에 ‘공농홍군 장정 퉁다오 전병회의 회지’라는 푯말이 번듯하게 걸려 있다.
송나라 시대인 1105년에 세워진 공성서원은 둥족侗族의 서원으로는 가장 잘 보존된 것이다. 그러나 정문의 현판만 공성서원일 뿐, 내부는 퉁다오회의를 기념하고 대장정을 설명하는 전시관이다. 900년의 묵향이 80년의 혁명사에 가려진 것이다. 당시 회의실을 재현한 방에는 테이블 하나에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장원톈, 주더, 왕자샹, 마오쩌둥 7명의 명패와 7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누군가의 회고에 따르면 퉁다오회의에서 마오쩌둥 혼자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고 하는데, 전시관에는 그렇지 않았다.
공성서원 근처의 큰길은 설날 대목을 앞두고 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시끌벅적한 장터가 되어 있었다. 폭죽과 장난감, 옷가지와 신발, 과자와 설날 용품들이 노점상 좌판에 넘쳐났다. 길일이었는지 웬만한 식당은 전부 결혼식 단체손님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은 결혼식장이 따로 없고, 손님들을 식당으로 초대해서 간단한 의례를 가진 뒤에 식사 대접을 한다. 우리는 쥐가 나올 것 같은 허름한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는 리핑으로 향했다.
후난성 퉁다오에서 구이저우성 리핑으로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노면이 나빠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지만, 창밖의 시골 풍경이 편안하고 정겨웠다. 퉁다오회의의 무게감이나 긴박감은 어느새 사라졌다.
가는 길에 쪽배 예닐곱 척이 협동해서 물고기를 잡는 광경을 보았다. 강의 아래위 양쪽에서 그물을 쳐서 가로막고는, 가운데로 들어간 쪽배에 있던 사람이 긴 장대로 수면을 내리치자 놀란 물고기들이 빠르게 헤엄쳐 도망가다 그물에 걸려들었다. 동네 남자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설날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어디에서나 명절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법이다.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장대로 내리칠 때마다 튀기는 물방울이 멋지게 사진에 담겼다.
리핑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기로 했다. 교통경찰이 알려준 4성급 호텔은 얼마 전 개업한 현대식 호텔이었는데, 비수기라 숙박비가 저렴했다.
탄핵의 장이 된 리핑회의
중앙홍군은 국민당의 통치력이 취약하다는 이유로 퉁다오에서 북상하지 않고 서쪽으로 행군하여 리핑에 이르렀다. 홍군은 리핑을 손쉽게 점령했다. 홍군이 온다는 소식에 왕자례의 구이저우군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리핑 점령 3일째인 1934년 12월 18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 회의가 소집되었다. 보구,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장원톈, 왕자샹, 리푸춘 등이 참석했고, 오토 브라운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퉁다오회의가 마오쩌둥의 무대 재입장을 알렸다면, 리핑회의는 보구, 오토 브라운의 기존 전략과 마오쩌둥의 서진입검 전병이 본격적으로 정책 대결을 벌인 회의다. 이번 회의는 저우언라이가 주관했다. 보구가 먼저 발언했다. 퉁다오에 이어 리핑까지 점령하면서 전황이 상당히 호전되었으니 곧장 후난성으로 북상하여 홍군 제2방면군과 합치자고 주장했다. 이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코민테른이 이미 결정한 전략 방침이라고 강조하면서 거수로 표결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홍군의 전략전이가 이미 장제스에게 간파된 상황에서 북상하여 후난성 서부로 들어가는 것은 장제스의 20여 개 사단이 만들어놓은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난성 서부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먼저 쓰촨과 가까운 구이저우 북부의 쭌이遵義를 중심으로 새로운 혁명 근거지를 구축한 뒤, 적절한 시기에 홍군 간부들도 참여하는 정치국 확대 회의를 열어 국부군의 5차 토벌전에서 패배한 원인과 교훈을 분석하자고 주장했다.
전략의 변경에만 머물지 않고, 패전의 원인과 책임을 분명히 밝히자고 주장함으로써 당정군을 지휘한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리더십에 대해 날 선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정치국 성원 대다수가 마오쩌둥의 제안으로 기울자 보구는 코민테른 대표인 오토 브라운이 불참한 회의에서는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논쟁이 더 확대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국 회의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이번 회의는 군사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코민테른이 군사고문으로 파견한 오토 브라운이 불참한 것은 당연하다고 맞받아쳤다. 평가 분석과 함께 책임과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러나 종국에는 결론을 지어 문건으로 작성되었다. 후난성 서부에 혁명 근거지를 만든다는 기존의 방침은 실현이 불가능해졌으니 장제스 중앙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해 쓰촨 남부와 구이저우 북부에 걸쳐 새로운 혁명 근거지를 구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쭌이로 진군하고, 다시 정치국 확대 회의를 열어 장제스에게 패한 원인을 규명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보구와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3인단, 특히 보구와 오토 브라운에 대한 탄핵 결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실 최고 책임자는 결과로 말해야지 과정에 대한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홍군은 5차 토벌전에 나선 국부군에 쫓겨 탈주해야 했고, 탈주해서도 목표에 도달하기는커녕 샹강에서 끔찍한 참패를 당했으니 우두머리가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했다. 저우언라이는 3인단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탄핵의 장을 열어주었고, 마오쩌둥과 장원톈 등이 탄핵으로 몰아간 셈이었다. 결과를 분석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조직에 필요한 건강한 자기치유의 방법이다.
또 하나 돋보이는 것은 보구가 기존 방침을 고수하면서도 반대 의견을 용인했고, 탄핵조차 토론을 통해 제기될 수 있게 허용했다는 사실이다. 보구의 이런 유연한 태도는 훗날 장궈타오가 보여준 권력 지향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인민들이 만들어준 홍군교
리핑에 숙소를 잡고 나서 리핑회의가 열렸던 곳을 찾아 차오가翹街까지 걸어갔다. 차오가는 뱀의 몸통처럼 좌우로 휘어진 고풍스러운 거리다. 늦은 오후에 이 길을 걸으니 시간의 향기가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리핑회의는 리핑시 중심지에 있는 청대 민가에서 열렸다. 길가 쪽으로 상점을 내고 안쪽에 창고 겸 주거 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상가 주택이다. 근처에는 홍군이 리핑에 주둔할 때 마오쩌둥, 천윈 등이 묵었던 집임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다.
차오가에는 리핑회의 기념관도 있다. 입구 한쪽에 있는 표지석을 보니 예전의 장시江西회관을 기념관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리핑의 인구와 소득, 경제에 비해 기념관이 터무니없이 커 보였다. 마오쩌둥의 재등장과 공산당의 부활 지점이라는 의미와는 어울릴지 모르겠다. 기념관 본관 정면에 새겨진 ‘위대한 전환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偉大轉折從這裡開始)’라는 문구가 손님들을 맞아주었다. 안에는 다른 기념관과 비슷하게 대장정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늦은 오후에 입장하여 관람 시간이 지났지만 직원에게 양해를 구해 끝까지 둘러보고 나왔다.
오랜만에 호텔 식당의 밝은 조명 아래 풍성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식탁은 곧 그날 돌아본 대장정 유적에 대한 프리토크 시간이었다. 샹강 전투에서의 참패가 마오쩌둥에게 회생의 기회가 된 것은 천운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늘이 내려준다고 해서 누구나 영웅이 되는 것도 아닐 터이다. 마오쩌둥은 과연 하늘이 낸 인물일까?
다음 날 아침 기념관보다 더 생생한 대장정 유적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호텔에 비치된 관광정보 소책자를 보니 리핑 시내를 조금 벗어난 시골에 꽤 유명한 홍군교가 있었다. 리핑 시내에서 23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가오툰진高屯鎭 인근의 사오자이少寨라는 마을에 있다는 것만 알고 찾아 나섰다. 가오툰에 도착하여 현지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설명이 정확하지 않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반복하다가 겨우 찾아냈다. 두 사람은 큰길에서 내려 찾아보기로 하고, 나는 멀리 돌아가는 찻길로 가기로 했다. 안진홍 선생님과 정일섭 교수는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면서 들길을 걸어 찾아왔고, 나도 차를 타고 접근하는 길을 찾아내 홍군교에서 만났다.
홍군교는 동네 사람 아니면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난간도 없는 작은 나무 다리였다. 다리 아래로 맑은 물이 흘렀다. 폭 1미터, 길이 70미터 가량의 다리는 두 사람이 마주치면 조심스레 비켜주어야 했다. 다리 한쪽에 홍군교의 연원을 설명한 표지가 있었다. 1934년 12월 국민당 군대가 접근해오는 홍군을 저지하려고 다리를 끊어버렸다. 홍군이 차가운 개천 물을 건너려고 하자, 인근 주민들이 널빤지와 각목 등을 가져다 밤새 다리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홍군은 겨울의 추운 강물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었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허름한 다리를 홍군교라고 불렀다.
한 젊은 농부가 다리 아래 강물에서 밭에서 거둔 무를 씻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빨간 무였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무 몇 개를 사서 날로 먹어보니 상큼한 맛이 그만이었다. 하나씩 더 먹으라고 건네는 농부의 손길에서 넉넉한 농부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때 정일섭 교수가 말을 꺼냈다. 무 하나 더 건네는 이 농부의 마음과 다리를 놓아주던 당시 농민의 마음이 같을 것이라고.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작은 마음을 베푸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이다. 답사 여행을 전부 마치고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도 정교수는 리핑의 홍군교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홍군교를 찾아 논둑을 걸어갈 때 맡았던 시골의 냄새도 그랬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홍군에게 자발적으로 협조한 농부의 마음도 그대로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소수인 홍군이 다수인 국부군을 막아낸 동력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정 교수가 느낀 대로 홍군은 국부군에 비해 규율이 잘 잡혀 있었다. 소비에트를 구축할 때나 대장정 행군을 할 때나 지역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그런 마음 때문에 오히려 인심을 얻었다. 볼품없는 홍군교지만 인민과 홍군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뿐 아니라 정서적 교감이 담겨 있기에 더없이 귀하게 다가왔다. 리핑회의 기념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승자의 오만이 묻어 나오지만, 소박한 홍군교는 백성과 전사의 교감이 담겨 있기에 감동을 주는 것 같다.
그에 비하면 강제로 징집된 국민당 군대는 많이 달랐다. 촌락별로 징집 인원이 할당되었고, 도주할까 봐 밧줄로 묶어 끌고 가기도 했다.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압송하는 풍경이었다. 장교와 일반 사병의 차별이 심했고 일상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이렇게 몸에 밴 폭력성 때문일까,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면 하급 병졸까지 주민에게 행패를 부리곤 했으니, 이것이 홍군교는 있어도 국민교는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