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공부하는지 대충 안다고 생각해서인지 가까운 동료의 글은 사실 잘 안 읽는다. 그래도 이 경우는 좀 달랐다. 이 책을 내라고 부추겼고, 출판사와 연결까지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같은 학과의 송대사 전문가 김영제 교수가 2019년 출간한 《고려상인과 동아시아 무역사》(푸른역사) 얘기다.
몇 군데 언론에서 꽤 상세히 다뤄줘서 김영제 교수도 드디어 세간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중국사 연구자로서는 이미 그 실력을 높이 평가받은 지 오래지만 역시 한국사와 관련된 주제를 다뤄야 작은 스포트라이트나마 받는다.
“…고려 상인들 송에 어떤 물건 팔았을까(세계일보),””…왜 상감청자를 중국에 팔지 않았을까(아시아경제),””..왜 상감청자 대신 값싼 자기를 수출했나(연합뉴스).” 세 언론사 서평의 제목이 약속이나 한 듯 비슷했다. 한국이 자랑해 마지않는 청자 대신 저렴한 자기를 중국에 수출했다는 것이 흥미를 유도하리라 봤기 때문일 것이다. 김 교수는 당시 중국의 실질적 수요와 가격 경쟁력에 따라 이를 밝혀내었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한국사 연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연구 방법을 제시한 데 있다.
고려시대사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분야다. 신안 앞바다 보물선 얘기는 들어보았겠지만 그 시대의 교류사, 특히 해양 무역사 연구는 제대로 된 연구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국내에 남겨진 고려사 관련 자료나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사류의 사료에 나타나는 내용만으로는 그 실상을 다루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원래 당송시대 재정사 위주의 사회경제사를 연구한 김영제 교수는 그 시대의 문집이나 지방지까지 포함한 사료에 해박한 연구자다. 이를 바탕으로 이 책에서 그동안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주목하지 않은 새로운 사료를 활용하여 고려 상인을 비롯한 동아시아 무역사의 일단을 재구성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책 속에 김 교수가 최초로 활용한 미개척 사료”가 상당하다는 얘기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역사 연구자라면 모두 잘 알 것이다.
그러니 기존 국내에서 나온 일부 관련 연구와는 차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서두를 장식한 송나라나 고려의 상인들이 항해를 위해 활용해야만 했던 계절풍과 항해술, 선박 등은 기존의 연구 방식으로는 접근이 어려웠던 문제들이다. 상인들의 국적이나 입국 수속 등 1부의 마지막에 다루어진 주제들도 마찬가지다.
2부에서 본격적인 해상 왕래를 다룬다. 고려시대의 무역이 송나라 상인 즉 송상 위주로 진행되었을 걸로 봤던 기존의 인식과 달리 고려 상인들 나름대로의 무역 활동을 복원했다. 특히 당시 무역에서 중요한 매개자로 송나라 사람인지 고려 사람인지 헷갈렸던 송도강宋都綱을 고려에 귀화한 선주로 추정한 것은 탁견으로 보인다.
마지막 3부는 고려와 남중국 사이의 교역품에 대해서 다룬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중국을 둘러싼 전 세계 무역 전반의 실상을 이해하고 고려와 중국 사이의 수출입 품목도 그 틀 속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고려 후기 원나라와 은 무역 역시 동아시아 전체 맥락에서 다루었으며, 당시의 과도한 유출이 명나라로 하여금 해금정책과 함께 제한적인 조공무역만 허용하게 했음을 적시했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고려와 송 양측의 사료를 입체적으로 검토하여 송도강의 성격을 밝힌 것이다(164-178쪽). 그 논증 과정이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일전에 공식 두세 개를 활용한 역사 연구와 열 개를 활용하는 연구의 차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후자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하다.
다른 측면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사 연구도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데 동의하면서도 적절한 연구 모델을 제시하지 않아 공허한 측면이 있었다. 이 책은 그 공허함까지 채워주는 좋은 사례다. 김 교수는 더욱이 각 장의 말미에 후속 연구를 위한 제언”을 붙여서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고려 도강 문제를 다룬 장의 “제언” 부분에서 당시의 무역사를 보는 시각에 대해 김 교수는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려 도강을 이용한 해상무역을 다루었다. 이 사실은 고려시대를 더 이상 한국사의 시 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고려 상인이면 응당 고려 출신 사람일 것이라는 단순 논리는 더 이상 적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 같은 화교 도강이 무역에 개입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들이 주도한 것처럼 이해하여 소극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편협한 시각이다. 당시 고려는 자체적으로 저선을 제작하기보다는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이는 요즘 종종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공유경제의 개념과 마찬가지이다.”(179쪽)
이 책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세 편의 서평이 나왔다(김성규 [역사학보 244집, 2019년], 김한신 [동양 사학연구 149집, 2019년], 이강한 [경제사학 72집, 2020년]). 주례사식 서평마저 아주 드문 한국 학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그만큼 뜨거운 감자일 수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에는 김영제 교수의 고려강수(송도강)에 대한 논지에만 초점을 맞춘 비평 논문까지 나왔다(이진한, “고려강수 탁영, 서덕영 관련 사료의 재검토” [한국문화 96집, 2021년]. 고려시대 무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이 교수는 김 교수의 주요 논지에 수긍하며 자신의 기존 연구를 성찰했다고 한다.
《고려상인과 동아시아 무역사》를 흥미롭게 읽고 이 책을 내도록 권하길 잘했다고 안도했다. 더욱 이 한국 학계에서 드문 유익한 논쟁까지 유발하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한국사 애호가들이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위에서 언급한 서평들과 함께 살펴본다면, 학술의 진수 한 자락까지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