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 글방선생이 여름날 달 밝은 밤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하간헌왕(河間獻王)[유덕(劉德)]의 사당 밖 논두렁에 앉게 되었다. 글방선생은 함께 <시삼백편>을 강하고 문제를 내는데, 북이 울리고 종이 울리듯 그 목소리가 낭랑했다. 또 문하생들에게 효경을 외게 하고는 다시 <효경>을 강하기 시작했다. 문득 고개를 드는데 보니 사당문 앞에 있는 두 그루의 오래된 박달나무 아래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시험 삼아 다가가서 보았더니 그 모습이 남다른 것이 귀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글방선생은 이곳이 하간헌왕의 사당 앞으로 절대 요괴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앞으로 나아가 성명을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장(毛萇), 관장경(貫長卿), 안지(顔芝)로 하간헌왕을 뵙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말에] 글방선생은 크게 기뻐하면서 재배하고 경문의 뜻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모장과 관장경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선생께서 강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우리로서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뭐라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글방선생이 다시 절하며 물었다.
“<시경>의 뜻이 심오하고 미묘하니 저희 같은 어리석은 이들에게 그 내용을 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안지 선생님께서 <효경>을 한번 강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안지가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의 문하생들이 외운 효경은 앞뒤가 맞지 않고 내용이 빠져 있어 제가 전한 <금문경>과는 아주 크게 다릅니다. 저 역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별안간 하간헌왕의 전교가 들렸다.
“문 밖에서 술 취한 사람이 주정하고 시끄럽게 떠든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얼른 쫓으렷다!”
나는 지금 이 이야기와 노학구가 저승사자를 만난 애당(愛堂) 선생의 이야기가 모두 박식하고 고귀한 선비들이 무지한 유학자들을 꾸짖기 위해 만들어낸 우스개 이야기라 생각한다. 그런 즉 역시 “텅 빈 굴에 바람이 부니 오동나무 열매에 새가 날아들어 둥지를 트는”격이네!
相傳有塾師, 夏夜月明, 率門人納涼河間獻王祠外田塍上. 因共講三百篇擬題, 音瑯瑯如鍾鼓. 又令小兒誦孝經, 誦已復講. 忽擧首見祠門雙古柏下, 隱隱有人. 試近之, 形狀頗異, 知爲神鬼. 然私念此獻王祠前, 決無妖魅, 前問姓名, 曰: “毛萇ㆍ貫長卿ㆍ顔芝, 因謁王至此.” 塾師大喜, 再拜請授經義. 毛․貫並曰: “君所講適已聞, 都非我輩所解, 無從奉答.” 塾師又拜曰: “詩義深微, 難授下愚. 請顔先生一講孝經, 可乎?” 顔回面向內曰: “君小兒所誦, 漏落顚倒, 全非我所傳本. 我亦無可著語處.” 俄聞傳王敎曰: “門外似有人醉語, 聒耳已久, 可驅之去!” 余謂此與愛堂先生所言學究遇冥吏事, 皆博雅之士, 造戲語以詬俗儒也. 然亦“空穴來風, 桐乳來巢”乎?
4
돌아가신 아버지 요안공(姚安公)은 성품이 엄하기 때문에 문하에 행동이 단정치 않은 빈객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다 떨어진 옷을 입은 한 사람과 말씀을 나누시다가 우리 형제들을 불러 그 사람에게 예를 갖추게 하고 말씀하셨다.
“이 분은 송만수(宋曼殊) 선생의 증손이시다. 오랫동안 그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오늘에야 이렇게 뵙게 되었다. 명나라 말년 전란이 났던 그 해, 너희 증조부께서는 11세의 나이로 전쟁 통에 이리 저리 떠돌다가 다행히 송만수 선생을 만나 목숨을 보존하시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꼼꼼하고 세세하게 그를 돌봐주시고 그의 생계를 도모하시면서 우리 형제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의리상 마땅히 갚아야 할 은혜면 굳이 인과응보를 따질 필요 없다. 그런데 인과응보 역시 틀림없다. 옛날에 아무개 공이 다른 사람의 은혜를 받아 새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부귀해진 뒤에 가세가 기운 은인의 자손을 보고 길 가다 만난 사람처럼 모른 척했다. 나중에 그가 병을 얻어 막 약을 먹으려는 순간 정신이 없을 때 은인이 나타나 그에게 편지 두 통을 주었는데, 편지 봉투가 붙어 있지 않았다. 편지를 꺼내 보았더니 그 해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보낸 서신이었다. 그는 약사발을 땅에 떨어뜨리면서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고 했다는 구나. 그 부자는 그 날 밤에 죽었단다.”
先姚安公性嚴峻, 門無雜賓. 一日, 與一襤縷人對語, 呼余兄弟與爲禮, 曰: “此宋曼殊曾孫. 不相聞久矣, 今乃見之. 明季兵亂, 汝曾祖年十一, 流離戈馬間, 賴宋曼殊得存也.” 乃爲委曲謀生計. 因戒余兄弟曰: “義所當報, 不必談因果, 然因果實亦不爽. 昔某公受人再生恩, 富貴後, 視其子孫零替, 漠如陌路. 後病困, 方服藥, 恍惚見其人手授二札, 皆未封. 視之, 則當年乞救書也. 覆杯於地曰: ‘吾死晩矣!’ 是夕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