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대장정, 출발하다
중국인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닌, 한낱 여행객에 지나지 않는 내가 59일간 1만 2,800킬로미터에 이르는 답사 여행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이 장거리 답사가 내 머릿속에 콱 박혀든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고 있을 때, 서울과 베이징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인천공항 서점에서 눈에 들어온 한 권의 책이 그 시작이었다. 서강대 정치학과 손호철 교수가 쓴 《레드 로드》라는 대장정 답사기였다. 1만 2500킬로미터 라는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대한 장기 답사, 그리고 중국 현대사의 한 장면인 ‘대장정’이 나의 몸속에 숨어 있던 역마살을 되살려냈다.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역마살이 살아 있을 때 떠나자
다음 해인 2009년, 나는 그 이전의 직업과는 무관하게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과 그동안의 중국 여행을 비교적 세세하게 기록해온 내 블로그를 융합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그리고 사전답사라는 명목으로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배낭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후 지금까지 1년이면 6개월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삼국지》의 조조와 제갈량을 찾아서, 중국 각지의 전통 음식을 찾아서, 각 지방의 독특한 전통적인 민가를 들여다보면서, 차마고도를 걸으면서, 탁발선비와 거란족과 여진족의 역사를 찾아서……. 2009년부터 해마다 내가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한 편씩 텔레비전 방송을 탔고, 2년 가까이 주간연재가 이어졌으며, 세 권의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그러다가 기억의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대장정 답사를 다시 꺼낸 것은 2012년 가을이었다. 대장정 80주년이 되는 2014년 10월에 맞춰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2~3주 정도의 통상적인 답사가 아닌 2~3개월이 소요되는 장기 답사는 역마살의 에너지가 생생할 때 해야지 뒤로 미루다가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아쉬움만 남길 것 같았다.
먼저 손호철 교수의 《레드로드》를 다시 꺼냈다. 대장정과 관련된 책은 죄다 찾아냈다. 《중국의 붉은 별》(에드가 스노우, 신홍범 외 옮김, 두레, 1995)은 친구에게서 빌리고, 주덕의 전기 《위대한 길: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아그네스 스메들리, 홍수원 옮김, 두레, 1986)는 중고로 구입했다. 베이징의 대형 서점에 쭈그리고 앉아 중국 현대사 책을 뒤져가며 중국어로 기록된 대장정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스토리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히스토리라는 것을 실감했다. 대장정은 기승전결을 갖춘 한 편의 위대한 장편소설이었다. 소설 같지만 소설이 아닌 생생한 역사였고, 그것이 오늘날 21세기 중국의 심장과 두뇌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2014년 1월 초에 출발하되 관광비자의 체류 기간에 맞춰 90일 안에 끝낸다는 목표만 정했다. 2013년 초의 일이다. 여행 주제가 정해지면 출발 날짜에 깃발을 꽂는 것이 먼저다. 여행의 형식이나 동반자, 세부 일정 등은 그다음 문제다.
국내외 자료를 찾아가며 혼자 대장정이란 큰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 가기 시작했다. TV 다큐멘터리 제작과 연계할까도 생각했으나 가까운 친구들과 한두 번 의논하고는 깔끔하게 접어버렸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프로젝트에 방송매체를 끼워 넣으면 더는 내 것이 아닐 수 있었고, 엄한 시어머니에 삐딱한 시누이까지 끼어들어 뒤죽박죽이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제작비를 조달하려면 다큐멘터리 세부 구성까지 상당히 갖춰야 한다. 그러자면 사전답사가 필요하고, 사전답사를 갈 바에야 나 혼자 가면 그만이라는 결론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었다. 카메라 무게를 감당하면서 장기간 여행하려면 전용 차량이 필요했다. 전용 차량은 곧 기사 인건비와 차량 임대비와 유지비를 부담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업의 협찬도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이념적 갈등이 민감하게 작용하는 시대에 중국 공산당이니 마오쩌둥이니 대장정이니 운운해봐야 소득도 없이 시간만 낭비할 게 뻔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블로그에 공개해서 동반자를 모으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왕초(나의 블로그 별명) 님의 답사 여행에 동행하고 싶다”는 덕담을 간간이 들었던 터라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기로 했다. 내 블로그에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여행에 관한 포스팅이 2500개가 넘었고, 하루 방문객도 평균 700~800명이었기 때문에 동반자로 나설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답사 여행의 제목을 ‘왕초의 작은 대장정’으로 정했다. 이 제목으로 블로그에 게시판을 신설하고, 대장정 답사 준비 사항을 하나씩 공개했다. 카메라 장비 보완에서부터 국내외 자료를 읽고 적은 메모까지, 시시콜콜하게 모두 공개했다. 특히 국내외 자료를 통해 알게 된 대장정의 속살과 개인적 소감을 ‘미리 읽는 대장정’이라는 제목으로 집중적으로 썼다. 공부도 되고 홍보도 되는 일석이조의 조촐한 준
비였다.
좋은 동반자들과 떠나는 왕초의 작은 대장정
2013년 9월 ‘왕초의 작은 대장정’ 답사 여행에 후원을 겸하는 동반자를 초청한다는 공지를 블로그에 올렸다. 최장 70일에 달하는 장기 여행이라 열흘 정도씩 나누어 구간별로 동반할 수 있게 일정을 미리 짰다.
동반자로 나설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걱정했는데, 드디어 한 사람, 두 사람 모이기 시작했다. 더 반가운 사실은 2013년 여름 중국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최북단의 후룬베이얼呼倫貝爾 초원을 함께 여행했던 동반자들 가운데 몇몇이 반년 만에 다시 동반자로 나서준 것이었다. 이 초원 여행은 내 블로그에서 북방 초원 답사 여행기를 읽은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2012년 여름부터 시작한 정기 배낭여행이다. 북방 초원과 삼림을 다니면서 탁발선비, 칭기즈칸, 퉁구스족, 거란족 등의 북방 역사를 음미하던 이 여행은 8인 소그룹으로 여행을 하면서 동아시아 북방의 역사와 문화, 음식 이야기 등을 풍부하게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이들이 다른 동반자를 추천하거나 데려오기도 했다. 안진홍(별명 산신령) 님은 심한용 님을 추천하여 각각 다른 기간에 참가했고, 엄문희(YES) 님은 놀랍게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일곱 살짜리 아들 동섭 군을 데리고 동반했다. 최치영 님은 고등학교 동창 정일섭 성균관대 교수와 짝을 이뤄 참가했다. 류시호 님은 부군인 김영준(삼청골) 님을 답사 여행에 참가하게 했다. 초원 여행 경험자 외에도 황인성 성공회대학 교수가 검색을 통해 답사 여행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8명의 동반자 그룹이 만들어졌다.
짧게는 9일에서 길게는 35일까지 각자 사정에 따라 동반 구간을 정했다. 중국인 운전기사를 포함해 많을 때에는 6명, 적을 때에는 3명이 참가했다.
이렇게 소그룹으로 다니게 되면 여행이 적적하지 않아 좋다. 혼자 다니면 음식을 많이 주문할 수 없어 국수나 볶음밥 또는 간식으로 때우기 일쑤다. 그런데 동반자들이 있으면 다양한 음식을 풍성하게 즐길 수 있어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무엇보다도 식탁에서 벌어지는 대장정의 역사와 여행, 중국 문화에 관한 자유 토크가 즐거웠다. 다른 시각에서 보는 대장정과 중국 이야기가 나의 좁은 식견과 편협한 시각을넓혀주었으니, 삼인행三人行에 필유삼사必有三師라 할만했다. 대장정 유적지를 찾아갈 때마다 내가 동반자들에게 안내문을 해석해주고 앞뒤 흐름을 보충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동반자들은 대장정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었고, 나도 공부하는 효과가 상당했다.
중국 여행을 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차와 운전기사다. 기사가 고집이 세거나 융통성이 없으면 황당한 일을 많이 겪게 된다. 비용은 비용대로 들어가고 팁까지 얹어주면서 상전처럼 모시기도 한다. 이런 부작용이 조금 심하면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여행 전체 일정을 함께한 중국인 기사 쉬단胥丹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윈난雲南에 상주하면서 직접 보이차를 만드는 정경원(쾌활) 님이 소개해준 기사였다. 말수는 적지만 유쾌한 그는 얌전하게 운전하다가도 시간을 맞춰야 할 사정이 생기면 적절하게 속도를 낼 줄도 알았다. 20대 초중반에 요리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 중국 음식을 주문할 때에도 좋은 도우미가 되어주었다. 차량은 정경원 님이 처음 한 달 동안 무상으로 빌려주었고, 후반의 한 달은 쉬단의 차를 쓰기로 했다. 호의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렇게 동반자와 기사와 차량이 확정되고 답사팀이 꾸려졌다. 이제 대장정의 길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답사 코스는 마오쩌둥의 중앙홍군이 지났던 노선을 따라가는 것으로 국한했다. 대장정은 마오쩌둥의 중앙홍군(제1방면군)만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네 갈래 대오의 장정을 묶어서 말하는 것이다. 중앙홍군 이외에 허룽賀龍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은 1935년 11월 후난성에서 출발하여 1936년 10월 간쑤성甘肅省 후이닝에서 제1방면군, 제4방면군과 합쳤다. 제4방면군은 1935년 5월 쓰촨성에서 출발해 그해 6월 중앙 홍군과 다웨이達維에서 중앙홍군과 만났다. 그러나 이후의 진로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어 갈라선 뒤 독자적으로 남하하여 청두成都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고난을 겪던 제4방면군은 1936년 10월 간쑤성 후이닝에서 제1방면군, 제2방면군과 다시 합류했다. 또 한 갈래는 홍25군이었다. 1934년 11월 허난성河南省에서 출발하여 이듬해 9월 섬서성에서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네 갈래의 장정 전체를 답사하는 것은 기간과 경비, 동반자의 참여 가능성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 마오쩌둥이 직접 걸어간 길을 따라 가며 현대 중국의 역사를 음미하는 데 의미를 두고 마오쩌둥의 대장정, 즉 중앙홍군의 대장정 노선만 답사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368일 걸렸다’고만 하면 그것은 행군이라는 행위만 미시적으로 조망한 것이다. 대장정의 큰 의미를 ‘참담했지만 결과가 성공적이었던 마오쩌둥의 탈주’와 ‘끈질겼고 상당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빨갱이를 박멸하진 못했으며 최종 결과는 오히려 역전패한 장제스의 추격전’으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큰 의미의 대장정은 상하이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1927년에 시작되었고, 시안西安사변 이후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면서 종결된 ‘국민당과 공산당의 10년 내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27년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의 흔적을 찾아 보고, 10년 내전을 종식시킨 장쉐량張學良의 시안사변 현장을 대장정 노선 앞뒤에 배치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답사 코스를 정리했다.
초반은 인천(출국)―상하이(중국 공산당의 탄생지,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현장)―창사(마오쩌둥의 출생과 성장)―징강산(마오쩌둥의 토지혁명과 유격전)―장시성 루이진(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도)으로 구성했다.
그런 다음 본론에 해당하는 중앙홍군의 368일에 걸친 대장정 노선을 따라가기로 계획했다. 위두(대장정 집결 출발지)―싱안(홍군 최악의 참패)―쭌이(마오쩌둥의 부활)―구이양(사도적수)―쿤밍(육군강무당)―자오핑두(창강 도강 지점)―안순창과 루딩(다두하 도강)―자진산(첫 번째 설산)―다웨이(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회사)―헤이수이현과 마오얼가이(습지 입구)―반유(습지 출구)―바시(마오쩌둥 일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하루’의 현장)―라쯔커우(협곡 돌파)―하다푸(홍군 전사들이 잠시 휴식을 취한 곳)―난량(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의 혁명 근거지)―후이닝(제1, 제2, 제4방면군 회사)―우치(중앙홍군의 대장정 종착 지점) 여정이다.
마지막 구간은 마오쩌둥 대장정 368일 이후의 역사 현장인 즈단(바오안 시대)―옌안(옌안 시대)―시안(시안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으로 구성했다.
여행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2014년 1월 6일 월요일 아침 김포공항에 들어서면서 답사 여행이라는 과제만 생각하기로 했다. 오직 나의 인솔만 믿고 따라오는 동반자들과의 장기 여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행의 최종 목적은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8년 동안 배낭을 지고 중국을 드나든 게 70회를 훌쩍 넘는데도 떠나기 전날은 항상 심란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비행기가 어지럼증을 일으키며 상공으로 치솟아 오른 뒤에야 차차 평온함을 찾기 시작했다.
답사 첫 구간의 동반자는 전직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출신인 안진홍님과 황인성 성공회대학 교수님 두 분이었다. 황 교수님은 며칠 전 상하이에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진홍 님은 나와 함께 출국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창밖으로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보이다가 이내 사라지고 바다가 보였다. 한동안 바다 위를 날다가 잠시 육지가 보
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상하이 훙차오虹橋 공항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 상하이에 내렸다.
황인성 교수님은 예정했던 숙소에서 만났다. 동반 일행의 첫 번째 일은 저녁 식사였다. 비 오는 날 축축한 저녁이라 후난성의 매운 음식을 찾았다. 산신령 님과 황 교수님은 서로 초면이지만 유쾌하게 식사하면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처음 대하는 중국 음식을 꺼리지 않고 유쾌하게 먹는 모습만으로도 좋은 동반자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59일의 여행 내내 하루하루 확인했듯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축복은 좋은 동반자를 만난 것이었다.
다음 날 오전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창당 유지遺址와 장제스가 제1차 국공합작을 깨버린 412 상하이 쿠데타의 흔적을 찾아가기로 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답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