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접하며 그의 언행으로부터 내가 받은 그의 인상은 다른 무엇보다도 애국자라는 것이었다. 애국자라는 것도 물론 협의의 애국자라는 의미가 아니고, 정상의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강하게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다분히 인간적이랄까, 민족적 휴머니즘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는데, 그의 모든 문장의 발원은 거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눈은 항상 중국과 중국인의 미래에 쏠려 있었고, 어쩌면 현실의 중국과 중국인을 어떻게 합리적이고 행복한 미래로 살려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현실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그의 신랄한, 때로는 욕설로도 볼 수 있는 필봉이 사실은 자국민에 대해 끓어오르는 애정의 변형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그처럼 냉철하고 각박한 붓은 그저 방관자일 뿐이라면 구사할 수 없는 것이다. 저 화기애애하게 친근하게 지낼 수 있는 그리고 늘상 눈물에 젖은 듯한 눈빛은 결코 그의 인간적인 차가움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으며, 그 반대였다. 항상 뭔가 들씌운 듯 애국(애민족愛民族)의 열정에 불타 있는 듯한 모습은 때로는 귀기마저 띤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는가라는 것을 말하자면, 나는 아무래도 수십 년간의 ‘계몽주의’를 보듬으면서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또 그 인생을 개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인생 일반이 아니라 항상 현실의 구체적인 중국 사회와 중국인이라고 하는 안계에 있어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청년시대, 신해혁명의 풍조에 의해 양육되고, 스스로 혁명운동에 몸을 던졌던 그는 결국 평생을 혁명가로서 살았다. 공허한 인생론이나 이론을 위한 이론은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이라는 유서遺書같은 소품 중에서 “공허한 문학가나 미술가가 되지 말”라고 그의 아들에게 훈계한 것은 반어법적인 풍자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실제의 인생에, 중국의 현실 개혁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문학가나 예술가의 놀음을 경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