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중金河中의 루쉰 소설 번역

김광주와 이용규 이후 본격적으로 루쉰의 소설을 번역한 사람은 한학자 이가원이다. 그는 1963년에 노신선집을 출간했고, 1975년에 루쉰의 소설집 『吶喊』, 『彷徨』, 『故事新編』을 완역하여 한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이가원이 루쉰 번역에 끼친 공헌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나중에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

그럼 중국문학 전공자 중 루쉰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사람은 누구인가? 놀랍게도 학계의 교수들이 아니다. 그는 바로 김하중*이다. 서울대 중문과 출신으로 잡지 [여원], [마당] 등을 편집했고, 도서출판 지인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金夏中)과 헷갈리지만 다른 인물이다.

그는 1981년 루쉰의 『吶喊』과 『彷徨』 그리고 라오서(老舍)의 『駱駝祥子』를 완역하여 금성출판사 세계문학대전집 제23권으로 출간했다. 내가 알기로 라오서의 『뤄퉈샹쯔』번역도 김하중에 의해서 처음 이루어졌다.

루쉰 번역사나 중국 현대문학 번역사에서 김하중은 중국문학 전공자로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후 루쉰 번역이나 수용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김하중을 거론하는 이는 드물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그가 이 책 뒤에 부록으로 게재한 루쉰과 라오서 소개 및 연보를 읽어봐도 전공 학자 이상의 치밀함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쉰 소설을 번역한 김하중(金河中, 1936~)과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金夏中, 1947~)은 완전히 다른 인물입니다. 바로잡습니다. 김하중(金河中) 씨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주는 카페 글이 있어서 아래에 전재합니다. 루쉰 번역사나 중국문학 번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중국문학가 김하중과 서린동 일식집

김 승 환

우리 시대의 미식가를 꼽으라면 나는 두 말없이 김하중을 친다.

70년대, 여성교양지 <여원>(발행인 김명엽)의 편집국장실로 그를 찾아가면 으례 로이얄 호털 사우나실로 먼저 간다. 벗은 몸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게 사나이들끼리 우정의 한 표본처럼. 그리고는 비누 냄새 풍기며 충무로 일식집 <대원>에 들려 오뎅에다가 따근한 니혼슈 한 잔을 나누는 것이 공식 행로(行路)였다.

서울대 문리대 동창(과는 다르지만)인 젊은 황명걸이 대구를 찾았을 때, 술상을 손수 내오는 김하중의 모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는데, 영남의 규모 있는 집안의 풍습이 대개 이러했고 그 아들의 반듯한 손님 접대도 어머니의 유전자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잠시 안산에 내려가 있을 때도 친구들을 오이도의 맛난 횟집에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는데 사람 좋아하기는 그의 재기 발랄한 부인도 남편을 닮았다.

그의 신사다운 풍모를 명동에 보인 것은 56년, 서울대 1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의 명동 길라잡이는 시인 황명걸이었다. 그렇게 어울린 우리들은 몽파르나스(이일이 명명한 목노집), 할머니집 등에서 안주도 없이 막걸리에 취해 명동을 휘저으며 기고만장했다. ‘기고만장’한 패거리로는 강민, 송혁, 박성룡, 인태성, 김춘배, 김광수, 심우성, 황명걸, 민영 등이었는데 어느날은 통금금지에 쫓겨 집창촌이던 양동으로 진출하여 술자리를 벌였던 사건이 새삼스럽다. 물론 양동 술자리도 김하중이 앞장섰던 것이다. 아아, 안개처럼 사라진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이여.

한 15년쯤 전의 초여름이던가.

그의 초청으로 강원도 인제땅 내린천에서 이틀이나 머문 적이 있다.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 이장 집에 짐을 푼 우리(잡지 편집인 하재기와 나)는 미산 계곡의 소용돌이 치는 옥 빛 물길과 개천 방죽에 흐드러지게 핀 철쭉의 황홀한 꽃 향연에 넋을 잃었다. 이 고장에서는 ‘철쭉꽃 필 때 꺽지탕’이란 말이 전해 오는데, 꺽지 매운탕에다 마시는 소주는 내 내장 저 밑바닥까지 유쾌하게 했다.

김하중의 처 외숙(신정철 / 해태그룹 사장 역임)이 방태산 자락의 빼어난 풍광에 반해 사유지를 구입, 개인산 약수터 오르는 산길에 규모 있는 산막(山幕)을 짓고 오가는 산사람에게 무료로 개방했는데. 김하중 가족은 한여름의 더위를 이 산막에서 담요를 덮고 나곤 했던 곳이라 남다른 감회를 잊지 못해 바캉스 시즌 전에 몇몇 친구를 초대했던 것인데 그 패거리에 하나가 우리다.

화제거리 건강 의학서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의 저자 화타 김영일도 김하중의 벗인데 그가 이곳 상남면에 약방을 두고 있어 찾아본 적이 있다. 그가 쓰는 한약재의 대부분이 방태산에서 나온 것이란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계약 채취해서 말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값싼 중국제와는 차등이질밖에.

사람을 두루 사귀는 것도 김하중의 장끼다.

가까운 친구가 큰 병 치레를 하자 앞장 서서 모금함을 돌린 것도 김하중이다.

‘야, 너희들 말로만 병문안을 하면 되냐!”는 그의 말은 누구도 뒷걸음질 못 치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시인 강민에 이어 제2대 잡지기자협회 회장을 지낸 것도 다 이런 앞장서는 기질에 연유한다. 좌우간, 두 사람의 따뜻한 우정에 나도 한 다리 끼어 지금껏 김하중의 맛난 시식(試食)의 동반자가 되어 있다.

김하중은 1936년 경북 함창에서 태어났다. 1월 17일생이니까 띠로 따지면 뙈지다. 그의 기질이 유순하면서도 불 같은 저돌성, 그리고 뛰어난 후각(嗅覺) 등이 띠로 말미암았다면 농담일까.

한국 전쟁의 어수선한 피난시절, 그는 대구 경북고등학교의 문예부장이었는데 경북대학의 문예부장인 소설가 이규헌과의 친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구상, 최태웅, 김요섭, 최계락 등 창공구락부 소속의 문인들과도 친교가 각별했고 육군신문 기자였던 박성룡, 재사 이어령과도 역전의 ‘꽃자리’다방에서 어울리곤 하였다. 의사이며 수필가였던 양병탁(까뮈의 <이방인> 번역) 등과 어울려 실존주의 문학에 한껏 취하기도 했다. 그때 대구는 부산에서 옮겨온 문화 중심지였다..

그의 일본 음식 취향과 식견은 향촌동(대구의 명동) 자그마한 오뎅집의 젊은 오너였던 곤도(近藤 / 그의 일본인 스승이었던 성씨)에게서 발효되고 숙성되었다.

“일식의 기본은 다시((汁/다시마 가다랑이포 멸치 등을 끓여 우린 국물)야. 왜 된장이 맛 있어야 진짜 일식 맛을 아는 거야.”

곤도의 이 주장은 망팔(望八)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끄떡 없는 김하중의 철학이다.

생선의 숙성법과 칼질, 끓고 익히는 법에다가 기본 상차림까지, 곤도는 젊은 김하중의 일본음식의 교양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중국음식에 대한 탁월한 식견은 그가 읽은 중국고전의 힘이다. 중국음식을 아는 체 하는 나의 상식도 실은 그에게서 얻어 들은 교양이다.

1955년, 서라벌 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며 시인의 꿈에 부풀었던 그는 송지영 교수의 청산유수 같은 중국문학 예찬을 듣고는 이듬해 서울 문리대 중국문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치고 졸업한 뒤 1963년, <여원>잡지사에 입사한다.

<여원>은 김하중에게 잡지 편집인의 지평을 열어줌과 동시에 그의 평생의 반려가 되는 여인을 만나게 한다. <여원> 편집국의 데스크(부장)까지 올랐던 뛰어난 잡지편집인 민숙현과의 로맨스가 그것이다. 로맨스는 무르익어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의 재원이었고 공화당 총재와 의장으로 있다가 3선 개헌안에 반대한 기개있는 정치인, 정구영(1891~1978)의 외손녀이기도 한 그녀와 결혼한다.

그녀는 방송국의 구성작가, <방송문예> 편집자로도 이름을 떨치는데, 그것보다 출판 기획자로 더 유명하다. <경기여고 100년>, <이화여대 100년 야사>라는 방대한 저서의 집필자이기도 하다.

김하중은 <여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74년, <지인사(知人社)>라는 출판사를 차린다. 출판사명 그대로 그가 사람 대하기가 얼마나 지고한 철학이었나를 알게 한다. 몇 가지는 잘 나가고 몇 가지는 창고에 쌓이고 하여 출판의 상업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때 펴낸 번역서 <공자전(孔子傳)>과 금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번역서 <수허전>, <홍루몽>, <노신(魯迅) 작품선> 등은 그의 중국문학의 교양과 학문적 성취도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82년에는 월간 <마당>(발행인 박정수)의 편집 주간으로 자리 잡는다. 역시 그는 생리적으로 출판 경영 쪽 보다는 잡지 편집 쪽이 더 맞았나 보다. 의식 있는 이 교양지도 2년을 못 버티고 그는 다시 월간 <전통문화>의 편집 주간으로 자리를 옮긴다(84~86). 두 잡지 다 잡지사에 기록될만한 월간지지만 <전통문화>를 만들 때가 더 보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88서울올림픽을 즈음하여 설립된 <범민협>(회장 남덕우) 운영실장으로 발탁되어 홍보물 <올림픽 광장>을 출간한다(88~90). 그리고 이어서 <자유평론사>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재외 교민을 위한 잡지 <고국 소식>을 세계 각국으로 홍보하는 데 힘썼다(92~2000).

그리고는 은퇴후, 갯바람 살랑이는 안산으로 집을 옮기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몇 년을 보냈다.

좀처럼 서울출입을 삼가던 그도 부산 친구(소설가 이상태)의 초대에는 기꺼이 응해 김광수와 나를 데리고 하룻밤 역전 호텔에서 밤을 지새우며 술잔을 기울이던 기억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그는 그 노령에도 화를 낼 일이면 앞뒤를 안 가린다. 공중 목욕탕안에서 물때를 버스럭거리는 자가 있으면 지금도 벼락 같이 소리를 지른다. 어긋남을 용서 못하는 반듯한 사나이ㅡ, 그의 일식 기호 성향도 그 음식의 정갈한 내밀과 외양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식집 <신성>이 서린동 바닥에서 거의 반세기 넘게 번창하는 까닭은 생선을 썰고 끓이는 기술의 탁월함 말고도 고창사람들의 호남의 진한 인심에도 이유가 있다. 사장(문재환)은 김하중과 그의 친구들이 오면 별미의 갈치 김치를 내오는가 하면 회를 듬성듬성 더 썰어 내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집이 김하중을 즐겁게 하는 것은 저 대구 향촌동 오뎅집의 그 된장국, 곤도의 다시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출처: 東 梧 齋 〈왕눈의 멋과 맛〉 http://cafe.daum.net/Dongori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