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06 쑤저우·항저우 강남수향

쑤저우·항저우 강남수향 – 물길로 이어지는 풍요로운 백성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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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쑤저우 방향으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로 주변에서 수많은 물을 보게 된다. 강이나 저수지는 물론 석탄을 그득 실은 납작한 배들이 줄지어 다니는 운하, 쪽배가 유려하게 빠져나가는 가느다란 수로, 그리고 크고 작은 양어장까지. 수면이 육지보다 더 넓고 수로가 육로보다 더 촘촘해 마을이 물위에 떠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창강 하류의 이런 마을을 강남수향江南水鄕이라고 한다.

수향은 살림집 하나하나가 물에 기대고 있고, 조금 큰 집은 담장 안쪽까지 물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길은 한쪽은 물길이고 한쪽은 뭍길이다. 물길은 저수지나 운하, 강으로 통하면서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진다.

밤에 등을 밝히면 물에 비친 등불에 그윽한 정취가 가득 차는 수향,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라 더욱 매력 있고 특색 있는 여행지로도 주목을 받는다. 강남수향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는 쑤저우의 저우좡周庄, 퉁리同里, 루즈甪直, 저장성 북부의 난쉰南潯, 시탕西塘, 우전烏鎭 등이 꼽힌다. 6대 강남고진江南古鎭이라고도 한다.

13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강남수향의 옛 마을은 그 숫자가 상당했다. 11세기 이후 강남고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저우좡과 퉁리는 마을이 형성된 이래 지명이 바뀐 적도 없고, 구획도 변경되지 않았으며, 물길 역시 옛날 그대로다. 건축물들은 명대에 지어진 것도 있고, 청조 말기와 민국 초기에 지어진 것이 많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대다수 고진은 입지조건의 변화와 육상교통의 발달로 이름만 남기고 사라졌다. 일부 수향은 육상교통이 관통하기 어려워 개발되지 않고 있다가 오히려 수향 보존 개발계획에 힘입어 수향의 풍모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원래 이곳은 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창강이 실어다 준 퇴적물이 쌓여 농지가 비옥하고 강수량과 일조량도 풍부해 이모작 벼농사와 함께 면화와 유채를 상업작물로 재배했다. 넓은 내수면의 어업 역시 주요한 산업이었다. 농수산물이 풍부해서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도 한다.

창강 유역은 신석기시대에 이미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고, 수당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지역이 되었다. 수나라가 경항대운하를 개착한 것은 바로 이 강남 지역의 물자를 북방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주민들은 벼농사를 지으면서 양잠과 방적을 병행했는데, 그것이 농사보다 수익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상업작물의 재배와 가공에 따른 물류가 늘어나면서 육로와 수로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발달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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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수향은 산시성 핑야오平遥나 윈난성 리장丽江의 고성과는 다르게 도시와 농촌 중간지대의 취락문화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가공 제조업을 하는 도시적 성격을 함께 갖는 독특한 마을로 발전했고, 자연하천과 인공수로를 이용한 시장이 출현했다.

이런 시장들은 특정 품목으로 전문화하기도 했는데, 저우좡과 퉁리는 쌀과 식용유의 집하장이 되었고, 난쉰이나 우전은 양잠시장으로 발전했다. 우전에는 지금도 당시의 방적공장을 그대로 재현해 보여주는 곳도 있다.

물산이 풍부한 강남수향 사람들은 소비문화가 주를 이루면서 자연을 숭상하고 세상과 다투지 않는, 안일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생활기풍을 갖게 되었다. 동아시아 봉건사회에서는 사농士農에 비해 공상工商을 낮게 여기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 지역에서는 농업과 상업을 병행함으로써 중상의 기풍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강남 지역은 경제적 발달에 따라 문화를 숭상하고 교육을 중시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노래를 부르고, 뽕나무를 키우면서 율시를 읊었다. 과거에서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고 시문을 읊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독특한 지리환경과 경제적 요인, 그리고 인문적 요소로 인해 강남고진은 독특한 품격의 물의 문화를 창출한 것이다.

강남수향은 친수성親水性이 높은 마을로서 물이 흐르는 형태에 따라 서로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물이 일방으로만 흐르는 경우에는 띠처럼 긴 형태가 되었고, 물이 사거리와 같이 십자 형태로 흐르면 난쉰과 같은 별 모양이 만들어졌다. 물이 그물망처럼 이어지는 곳에서는 저우좡과 퉁리처럼 둥근 형태가 되기도 했다.

수로는 사방의 농촌과 도시를 연결해주었고, 화물운송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육로는 보행에 적합한 수준으로 좁았지만 점포에서 진열한 상품들이 길까지 나오기도 했다. 행인들은 진열된 상품 가운데로 지나갈 정도로 임의롭고 시장처럼 항상 시끌벅적했다. 길 위로 지붕을 얹거나 의자를 설치해서 행인들이 비와 바람을 피하거나 잠시 쉬어 갈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기루騎樓라고 하는데 남방 도시 가로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살림집은 상업적 필요에 의해 물과 접해 있고 뭍으로도 열려 있다. 1층에 선 장사를 하고 2층이나 후면에 살거나下店上宅, 前店後宅, 점포 뒤에 공장前店後坊을 차리는, 주거와 생산, 판매가 일체화된 독특한 주거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점포가 가로에 접하는 전면은 한 칸으로 좁고, 전면이 좁은 대신 안으로 깊고 천정天井 역시 좁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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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물과 교합하는데 물가에 벽돌을 쌓아 안정시킨 다음, 별도의 지지대 없이 방을 물 위로 내어 앉히거나(좌: 출도出挑), 수로 중간에 기둥을 박아 공간을 확보하거나(중: 조각루弔脚樓), 집의 몸체가 물을 건너기도(우: 침류枕流) 한다.

물가에 배를 댈 수 있는 작은 부두를 설치하거나 물에서 집으로 직접 들어가는 계단을 만들기도 하고(아래 좌측 사진), 심지어 규모가 큰 저택에서는 물길이 담장을 지나 마당 앞까지 직접 들어올 수도 있다.

수로가 워낙 촘촘한 탓에 다리도 많다. 다리는 대부분 공교拱橋(아치교:아래 중간 사진)로서 교공橋拱으로 배가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다리 중간을 높게 만든다. 강남수향에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길을 잇는 것이며, 부귀영화가 들어오는 길로 문을 여는 것과 같다.

유명한 다리들도 많다. 퉁리에는 마을 중심부 수로가 합쳐지는 지점에 태평교, 길리교, 장경교라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 명청시대에 다리를 수리한 기록이 있으니 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세 다리를 삼교라고 하는데, 인생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 다리를 차례로 건너는 풍속이 있다. 다리 이름에 1년 내내 건강하고, 생업이 번성하고, 오래 잘 살라는 축원을 담고 있으니 다리 이름 그대로 축원을 받고 싶은 백성들의 소망이 서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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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좡의 쌍교雙橋(위의 우측 그림)도 유명하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로가 T자 형태로 만나는 곳에 세워진 세덕교와 영안교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세덕교는 반원의 아치교이고, 영안교는 평평한 석판을 가로놓은 석량교石梁橋다. 이 다리는 1980년대 천이페이陳逸飛라는 중국 화가의 손을 통해 중국 문화를 서방 세계에 알리는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84년 미국에서〈고향의 회억-쌍교〉라는 작품을 한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그림을 미국의 한 석유사업가가 구매했고, 그가 중국을 방문할 때 덩샤오핑에게 선물하면서 민간외교의 상징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1985년에는 UN에서 이 그림을 기념우표로 발행하면서 쌍교가 더욱 유명해졌다.

지금도 수많은 중국인이 기념사진을 찍는 다리다. 작은 다리에 역사가 쌓이고, 문화로서 ‘고향’이 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내려앉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삶이 진하게 묻어 있는, 작지만 위대한 건축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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