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계선생문록초서문龍谿先生文錄抄序>
《용계 왕선생집》(龍谿王先生集)은 총 20권(卷)인데, 그 중 어느 한 권에도 학문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다. 권마다 대략 수십 편(篇)인데, 그 중 어느 한 편에도 학문을 논하지 않은 말이 없다. 학문의 방법은 한 마디로 개괄할 수 있는 것인데, 이처럼 분량이 20권에 이르고 수십 편에 이르르니, 군더더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단 읽어보면 지루함도 잊게 되고, 각 권마다 마치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독자들은 너무 쉽게 끝날 것을 걱정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아마 선생의 학문이 모든 것을 융합․관통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마치 창주(滄洲)의 드넓은 바다같고, 마음에 뿌리를 두고 말로 표현되어 때에 따라 저절로 나와서 막힐 줄 모르니, 자연히 질리지 않는 데다가 아름답고 조리있기까지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어느 누가 군더더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위로 아주 오랜 옛적부터 지금까지 선생의 이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없고, 지금부터 이후로도 견줄 만한 것이 없을 것이어서, 이후 학문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저술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조리가 명쾌하게 통하는 것이 이것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각 원판이 소흥(紹興)의 관서에 쌓여 있기만 하고, 찍어낸 것이 적기 때문에, 읽은 사람 역시 드물었다. 그리고 선생은 청장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조화롭고 부드러웠으며 함께 어울리고 자기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고[大同無我],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무슨 신기한 행동이 없어서, 세상 사람들 역시 선생의 사람됨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선생의 글을 읽으려고 했겠는가? 그들은 학문에 진정한 뜻이 없고 피상적인 지식만 가지고 서로 자랑하여, 끝내 스스로 오류에 빠지고 만다. 비록 선생의 천만 마디 말이 있다 한들, 그들이 어찌 이것을 보려 하겠는가?
이번 봄에 내가 초약후(焦弱侯)와 함께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던 도중, 창주(滄洲)를 지나다 하태녕(何泰寧)을 만났다. 하태녕은 용계선생을 마을의 선생으로 모셔, 평소 선생의 가르침을 깊이 흠뻑 받았고, 이미 오랫동안 선생의 책을 숙독했던 사람이다. 그는 다시 판을 새겨 찍어내서 산동(山東)⋅하북(河北) 수십 군(郡)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서, 초약후의 거처로 찾아와 선생의 전집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초약후는 그 당시 두 배에 책을 나누어 싣고 다녔는데, 갑자기 어디서 찾겠는가? 이에 하태녕은 이번 가을에 특별히 사람을 보내 가지러 오게 하겠다며 약속을 정하고, 내게 그 중에서 특히 뛰어나고 요체가 담긴 것을 점찍어 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우선 그 중 정수를 판에 새겨 찍어서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하고, 그 다음에 전체를 찍어서 천하와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겠습니다.
선생의 글은 한 글자라도 가벼이 여겨 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에, 전체를 찍어내지 않으면 드넓은 바다 속에 진주를 빠뜨린 것과 같은 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이 너무 방대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보지도 않고 먼저 질릴 것이요, 또한 책을 묶어두고 보지 않는 안타까움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절대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고, 반드시 두 번 찍어내겠습니다. 그래야만 선생의 가르침이 세상에 크게 뻗어나갈 것입니다.
선생의 학문이 모두 이 책에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그 뜻을 얻는다면, 한 마디 말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권이나 되는 책을 어디에 쓸 데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 읽으려고 든다면 한 편을 제대로 끝까지 읽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어찌 꼭 20권이어야 하겠습니까? 다만 우리 후대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한 편씩 한 편씩 끝까지 읽음으로써, 일언지하에 그 뜻을 얻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을 뿐입니다.”
하태녕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그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한가?
가을 9월, 창주(滄洲)로부터 하태녕이 보낸 사람이 하태녕의 서찰을 가지고 과연 남경으로 나를 찾아와서 책을 부탁했다. 마침 나와 초약후가 모두 집에 있었다. 초약후는 책을 주면서, 또한 내게 애초 하태녕의 편찬 취지를 밝힌 글을 몇 마디 적어서 함께 주라고 했다. 대략 따져보니 새해 2⋅3월이면 새로 새긴 판각을 내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로부터 하태녕의 학문이 멈추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권3)
卷三 雜述 龍溪先生文錄抄序
《龍溪王先生集》共二十卷,無一卷不是談學之書;卷凡數十篇,無一篇不是論學之言。
夫學問之道,一言可蔽,卷若積至二十,篇或累至數十,能無贅乎?然讀之忘倦,卷卷若不相襲,覽者唯恐易盡,何也?蓋先生學問融貫,溫故知新,若滄洲瀛海,根于心,發于言,自時出而不可窮,自然不厭而文且理也。而其誰能贅之歟!故余嘗謂先生此書,前無往古,今無將來,後有學者可以無複著書矣,蓋逆料其決不能條達明顯一過于斯也。而刻板貯于紹興官署,印行者少,人亦罕讀。又先生少壯至老,一味和柔,大同無我,無新奇可喜之行,故俗士亦多不悅先生之為人,而又肯讀先生之書乎?學無真志,皮相相矜,卒以自誤,雖先生萬語千言,亦且奈之何哉!
今春,余偕焦弱侯放舟南邁,過滄洲,見何泰甯。泰甯視龍溪為鄉先生,其平日厭飫先生之教為深,熟讀先生之書已久矣,意欲複梓行之,以嘉惠山東、河北數十郡人士,即索先生全集于弱侯所。弱侯載兩船書,一時何處覓索。泰甯乃約是秋專人來取,而命余圈點其尤精且要者,曰:“吾先刻其精者以誘之令讀,然後粹其全以付天下後世。夫先生之書,一字不可輕擲,不刻其全則有滄海遺珠之恨;然簡帙浩繁,將學者未覽先厭,又不免有束書不觀之歎。必先後兩梓,不惜所費,然後先生之教大行。蓋先生之學具在此書,若苟得其意,則一言可畢,何用二十卷;苟不肯讀,則終篇亦難,又何必二十卷也。公在我後人,不得不冀其如此而讀,如此而終篇,又如此而得意于一言之下也。”泰甯之言如此,其用意如之何?
秋九月,滄洲使者持泰甯手劄,果來索書白下。適余與弱侯咸在館。弱侯遂付書,又命余書數語述泰甯初志並付之。計新春二三月,余可以覽新刻矣。將見泰甯學問從此日新而不能已,斷斷乎其必有在于是!斷斷乎其必有在于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