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嫦娥/ [唐] 이상은李商隱
운모 병풍에촛불
그림자 깊어지고
은하수 점점 떨어져
샛별도 침침하네
항아는 영약 훔친 걸
틀림없이 후회하리라
바다 같은 푸른 하늘에
밤마다 마음 띄우니
雲母屛風燭影深, 長河漸落曉星沉. 嫦娥應悔偷靈藥, 碧海靑天夜夜心.
—운모로 만든 병풍이라 촛불 빛이 찬란하게 반사될 터이다. 하지만 촛불 그림자가 어둑어둑 깊어지니 촛불이 다 타서 꺼져가는 시간이다. 중천에 떠 있던 은하수도 기울고 샛별도 침침하게 빛을 잃어간다. 불면의 밤을 지새운 작중 화자는 쓸쓸하고 고독하게 새벽을 맞고 있다. 고운임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삶의 고난에 지쳐 잠조차 잃은 것인가? 꺼져가는 촛불, 기울어가는 은하수, 침침한 샛별이 작중 화자의 심정을 적막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서쪽 하늘에는 아직 지지 않은 항아(嫦娥) 즉 달이 떠 있다. 새벽달이므로 역시 그믐에 가까워 스러져가는 하현달이다.항아는 달의 여신이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항아는 명궁(名弓) 예(羿)의 아내로 서왕모가 예에게 준 불사약을 훔쳐 먹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달 속으로 들어가 선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중 화자는 그 항아가 불사약 훔친 일을 후회할 거라 장담한다. 후회의 행위가 바로 다음 구절에 묘사된다. 항아는 벽해(碧海) 같은 하늘에 밤마다 나타나 자신의 몸을 점점 축내며 고독하게 방황한다.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지 않는다면 왜 저렇게 새벽까지 하늘 끝을 서성일까? 영약(靈藥)을 훔친 자신의 죄행을 뉘우치는 것일까?아마도 대답은 그 너머에 있는 듯하다. 이 대목이 바로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한 관문이다. 독수공방하며 슬픔의 밤을 지새우는 이유다. 항아는 영약을 먹고 장생불사의 선녀가 되었지만 결국은 냉기 가득한 광한궁(廣寒宮)에서 고독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고독한 삶 또한 장생불사다. 고독 forever다. 밤마다 휑한 하늘을 홀로 방황하는 삶을 영원히 지속해야 한다. 아마도 작중 화자가 사랑한 고운임은 속세를 떠나 부처의 길로 들어선 비구니거나 장생불사의 도(道)를 닦는 여도사일지도 모른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톨릭의 수녀와 같다. 작중 화자에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물론 작중 화자는 시인 이상은의 투영이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를 사랑함에 어찌 잠을 이룰 수 있겠는가? 항아의 몸(달)이 스러지는 것처럼 작중 화자의 심신도 시나브로 스러진다. 그리고 성불의 길은 냉궁(冷宮)에서 영원히 적막한 삶을 사는 길일 뿐이라고 쓸쓸하게 비유한다.이상은의 시는 먼저 화려한 색채감에 눈이 현란해진다. 운모의 구름빛, 촛불의 붉은빛, 은하수의 은빛, 샛별의 금빛, 바다의 벽옥빛, 하늘의 푸른빛에다 선녀 항아의 어여쁜 자태까지 보태져 전체 시가 찬란한 프리즘을 연상하게 한다. 이상은은 흔히 눈부신 색채 뒤에 자신의 작시 의도를 감춰 놓는다.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춘기 소년 같다.청나라 기윤(紀昀)은 이 시를 평하여 “죽은 사람을 애도한 시지 항아를 읊은 시가 아니다(此悼亡之詩, 非詠嫦娥)”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비유하여 항아가 영약을 훔쳐 먹고 하늘로 날아간 것으로 보았다. 이 또한 일리 있는 분석이다. 이상은의 시는 화려하고 난해하다. 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더욱 심오한 맛과 깊은 정취를 선사한다.(사진출처: 痴古山人的博客)
한시, 계절의 노래 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