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과 <집결호> : 하나 된 중국의 꿈, 명분과 실리의 형제 맺기


조금 과장하면, 중국은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다. 지리와 기후, 민족 분포는 물론 유구한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왕조들의 모습이 그렇다. 중원의 패자(覇者)들은 저마다 꿈과 이상을 드높였다.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주 왕조, 천하 통일의 꿈을 실현한 진 왕조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까지 각양각색으로 중원을 지배해 왔다. 그 중 오늘의 대륙 중국에 가장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왕조는 무엇일까? 적잖은 사람들이 시황제가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여 세운 진 왕조를 떠올릴 것이다. 무엇보다 ‘통일’과 ‘강력한 중앙 집권’이라는 이념은 매우 유사하다. 오늘날 중국의 이상은 ‘하나 된 중국’을 실현하는 일이다. 삼국지 첫 머리에 나오는 “천하의 대세는 나뉨이 오래 되면 합해지고 합함이 오래 되면 나뉜다”는 말을 역사가 증명해주었다고 믿는 중국은 다시 한 번 그 말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의 구호가 “하나 된 꿈, 하나 된 세계”로 정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어에서 ‘하나’라는 뜻의 ‘퉁이(同一)’는 ‘통일’이라는 뜻의 ‘퉁이(統一)’와 그 발음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집결호集結號, 출처 v.sogou.com

왕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최근 중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대작 영화들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5세대가 빛을 잃어갈 무렵, 중국 영화는 대중적 흡인력을 갖춘 코미디나 블록버스터라는 처방을 필요로 했다. 장이머우는 이를 기회 삼아 <영웅>, <연인>, <황후화>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5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영화를 만들던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온갖 규제와 금지 조치를 겪었던 장이머우는 권력과 화해하기 시작한다. 진시황의 천하 통일을 그린 <영웅>은 힘없는 자들이 어떻게 권력 앞에 엎드려야 하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자 <연인>은 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한 왕조의 수립 과정에서 생겨난 고사 성어를 빌려(<연인>의 원제는 유방의 한이 항우의 초를 포위 공격한 전투에서 생겨난 성어인 ‘십면매복(十面埋伏)’이다) 찬란했던 당 왕조에 저항한 쿠데타 세력을 응징한다. <황후화> 역시 절대적 힘 앞에서 무너지는 권력 내부의 실패를 다룬다. 장이머우가 주도해 온 중국의 대작 영화들은 한결 같이 정부의 요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적 선택에 머무른다. 그의 영화들에서 기존 권력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실패한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명장投名状, 출처 1905.com

최근 중국에서 건너온 블록버스터 두 편이 잇달아 개봉했다. 천커신의 <명장>과 펑샤오강의 <집결호>가 그것이다. 이들 영화는 각각 청 왕조 말기 태평천국 운동과 1945년 이후 국공내전 및 6․25 참전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블록버스터가 갖춰야 할 이야기와 볼거리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에 역사-전쟁 영화는 더 없이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두 영화를 보면 중국 영화도 전투 장면 등의 볼거리가 더 이상 비웃음을 사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기술적 성과를 이뤄냈다. 천카이거 감독의 <무극>이 볼품없는 컴퓨터그래픽 처리로 냉대 받았던 점을 생각하면, 한국 기술진의 참여가 있긴 했지만 <집결호>의 사실적 묘사는 훨씬 수준이 높아졌다. 할리우드 영화의 스펙터클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적절한 간격을 두고 등장하는 전투 장면을 통해 익숙한 리듬을 체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결호>는 철저하게 대륙 중국 내부의 문제에만 집중한다. 전쟁은 상대가 있는 행위다. 공산당은 국민당을 맞아 싸웠고, 남한군과 UN군에 맞섰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쟁은 말 그대로 ‘내전’이었고 6․25는 ‘참전’이었다. 중국은 내전에서 거의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고, 참전에서는 확실한 승리도 패배도 없이 휴전했다. <집결호>는 상대가 있는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설명하려는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국민당과 UN군은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 동안 승리의 노래로만 일색을 이뤘던 전쟁 ‘이후’의 풍경 속에도 소외됐던 마이너리티가 존재했다는 새로운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힘들었던 전투와 고난의 시간을 극복하고 잊혀졌던 특수 부대의 존재와 전우들의 시신을 발굴하고 마침내 이들이 ‘열사’로 추대된다는 이야기 속에서 구지디 중대장 개인의 노력보다는 당과 국가 명의의 ‘공식 통지’ 전달 장면이 더욱 부각된다. 내부의 갈등과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당과 국가는 그토록 노력했으며, 그로 인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영화는 더 아름다운 세상이 찾아왔음을 강조한다. 영화는 ‘하나의 중국’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해 정중한 예의를 갖춘다. 그런 까닭에 <집결호>는 주류 이데올로기를 오락적으로 포장한 ‘주선율’ 영화의 변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천커신의 <명장>은 조금 미묘하다. 방청운(리롄제 분)과 조이호(류더화 분), 강오양(진청우 분)이 목숨을 담보로 서로에 대한 의리를 다짐하며 의형제를 맺을 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는 대륙과 홍콩, 대만을 잇는 통일 중국의 상징을 설파하는 듯 보인다. 침체를 극복하고 대륙이라는 시장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홍콩 영화의 현실적 선택을 보여주는 듯했다. 천커신 역시 대륙의 엄격한 검열 제도에 맞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분위기는 큰형 방청운의 욕심으로 파국이 시작되면서 사뭇 달라진다. 셋 사이에 전투와 사랑으로 인해 내분이 생겨나면서 영화는 <집결호>와는 달리 하나의 목표지점으로 수렴되지 못한다. 내분이 일어나자 막내 강오양은 의미심장한 대사를 반복한다. “큰형이 옳아요!” 하지만 빅 브러더가 옳았다는 그의 외침은 조이호가 죽임을 당하고 다시 자신이 결국 큰형과 맞서 목숨을 겨룰 때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만다. 국가광전총국(중국 영화를 심사, 관리하는 당국)으로서는 세 형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더없이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천커신은 태평천국이라는 쿠데타를 진압하고도 청 왕조로부터 버림받는 방청운을 통해 상징적 메시지를 던진다. 역사를 다룬 영화들은 오늘의 상황을 유비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때 흥미를 더하게 된다. 따라서 단일한 결말로 수렴되는 <집결호>보다는 다원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명장>이 영화적으로는 더욱 문제적이다.

흥미롭게도 두 영화는 모두 ‘형제 맺기’ 장면을 보여준다. <명장>에서 세 주인공이 형제를 맺는 장면은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떠올리게 한다. <집결호>에서는 지뢰를 밟은 중대장과 이를 구해준 구지디가 ‘형제’가 된다. 구지디에게는 함께 전투에 나섰다가 몰살당한 47명의 또 다른 ‘형제’들도 있다. 흔히들 중국 사람은 의심이 많다고들 한다. 그래서 친구가 되기도 쉽지 않다. 친구란 뜻이 중국어인 ‘펑유(朋友)’는 우리보다 훨씬 자주 쓰이는 말이긴 하지만 우리의 ‘친구’라는 말만큼 농도가 짙진 않다. 앞에 ‘라오(老)’ 자를 붙이고 나야 더 격이 올라가는 ‘진짜 친구’ 정도의 의미가 된다. 하물며 ‘형제’, ‘슝디(兄弟)’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펑유’, ‘라오펑유’, ‘슝디’로 이어지는 중국의 인간관계에는 무엇보다 명분과 의리의 기제가 작동한다. 중국인은 오랜 시간을 두고 상대를 관찰하면서 그의 인간됨이 어떠한지,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는지를 살핀다. 합격점을 얻고 나면 그제야 그 격에 맞는 친구나 형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겉으로 말하는 명분과 의리 이면에는 엄연한 실리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주었거나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라오펑유가 되거나 슝디가 될 수 있다. <명장>의 방청운은 자신의 부상을 무릅쓰고 전투에서 곤경에 처한 조이호와 강오양의 목숨을 구한다. <집결호>의 구지디 역시 희생을 무릅쓰고 중대장의 목숨을 구한다. 목숨을 구해준 일은 무엇보다 앞선 실리라고 할 수 있다. 방청운은 이후 자신의 또 다른 실리를 위해 ‘슝디’의 명분을 버린다. 구지디는 끝까지 자신의 명분을 찾기 위해 탄광에 묻힌 47명의 ‘슝디’의 시체를 찾아 헤맨다.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명분과 실리의 안과 밖은 그렇게 짝을 이룬다. 오늘 대륙 중국은 홍콩이라는 한 ‘슝디’를 되찾아 왔다. 그리고 다시 상봉해야 할 ‘슝디’ 하나를 더 남겨 두고 있다.

** 박스

<명장><집결호>의 제작비

중국 영화가 대형화하면서 제작비 또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명장>은 400억 원 가량이 투입되었으며 <집결호>는 중국과 한국의 자본 100억 원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명장>은 주인공 리롄제의 출연료로만 제작비의 3분의 1가량을 지불했으며 <집결호>는 대부분 특수효과 비용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3월초 현재 <명장>이 중국 내에서 거둬들인 관객 수입은 200억 원쯤 된다고 하니 리롄제의 몸값은 충분히 뽑아낸 셈이다. <집결호> 역시 중국 내에서만 300억이 넘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