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E. 매클라렌(Ann E. MacLaren)
16세기 중엽에 이르게 되면 백화본 텍스트의 작자와 출판업자들은 그들의 독자층이 더 이상 교육 받은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국 출판 문화사에서 아마도 최초로 깨달았던 듯하다. 이 시기의 서문과 평점들은 이러한 텍스트들의 이질적인 독자층에 대한 인식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확대되고 강화된 이 텍스트들의 잠재적인 독자층에 관한 인식에는 관료, 문인, 새로운 부유층 출신의 수집가들, 속인들과 범인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天下之人)”이나 “네 부류의 사람들(四民)”과 같이 포괄적인 개념까지 들어 있었다. 독자층의 구성에 대한 생각이 역사적으로 변한 것은 이에 선행하는 필사 문화와 인쇄 기술, 그리고 명대 중기부터 증대된 경제의 상업화가 충돌한 결과였다. 가장 이른 백화체 서사는 필사 문화와 관련이 있다. 백화 텍스트는 손에서 손으로 다시 베껴지고 전해지는 동안 거리낌없이 텍스트를 변화시켰던 문인과 애호가들 사이에서 필사본의 형태로 수십 년 동안 유포되었다. 그러나 텍스트를 상업적으로 출판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가 되어감에 따라 (그리고 목판에 그것을 새기는 비용을 회수해야 할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편집자와 출판업자들은 일반적인 문인과 애호가 집단보다는 좀 더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텍스트를 마케팅하는 전략을 고안하게 되었다. 마케팅 과정에서는 본질적으로 출판업을 합리화하고 표적 독자층을 설정하려는 새로운 담론이 출현하게 된다.
이 연구에서 나의 목적은 15세기 말에서 17세기 중반에 나온 소설과 희곡 텍스트의 서문과 평점 자료들을 활용해 이 시기에 나타난 다음의 세 가지 경향을 추적하는 것인데, 곧 1)독자와 작가, 그리고 편집자 구성의 변화, 2)이 시기 독서 행위의 확대, 3)백화체 인쇄물에 대한 옹호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 시기, 특히 1570년 경 이후의 시기의 특징은 상업적 출판업자들이 출간한 책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통속적 또는 실용적 성격을 가진 책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으로까지 독자층이 확대되었다는 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주로 “독자층”에 있는데, 나탈리 지몬 데이비스(Natalie Zemon Davis)의 예에 따라 나는 이를 “청중” 또는 실제의 역사적인 독자와는 거리가 있는, 작가 또는 출판업자에 의해 내세워진 표적 독자층으로 정의한다. 개념적인 독자와 그들의 독서 행위에 대한 이 연구는 우리에게 실제 독자와 그들의 작품 이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명대(1368-1644년)에 급격하게 변화한 독자층의 개념이 가지는 역사적 특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논증하고 있으며, 게다가 상업적인 작가들과 출판업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특별한 문해력과 문화적 역량을 가진 독자층을 적극적으로 창조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이 연구는 메킨지(D. F. McKenzie)의 말을 빌리자면, “텍스트 생산, 전파, 소비의 모든 단계에 텍스트와 관련된 인간적 동기와 상호작용”, 곧 “인간적 동인(human agency)”이라는 개념을 포함시키는 일이 텍스트 연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나는 먼저 성리학자인 주시(朱熹, 1130-1200년)가 수립한 기준에서 시작하여 독자, 작가 그리고 독서 행위라는 개념 아래 놓인 패러다임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이 시기 텍스트 저술과 독해에 쓰였던 어휘가 확장되었던 것이 당시 백화체 인쇄를 합리화하려는 일련의 전제들, 즉 유교 경전의 (남성 엘리트) 독자라는 주시의 독자 구성을 급진적으로 확대했던 전제들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경서는 고대의 것이고 이해할 수 없지만, 백화 텍스트는 유가 경전의 핵심적인 도덕적 교훈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전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성상파괴적 관념이 특정 출판업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 16세기 초에서부터였다. 다음으로 나는 문인 집단에서 그보다 더 넓은 여러 사회 집단들로 목표 독자층이 확대되었던 16세기와 17세기에 이 새로운 독자들을 위해 쓰였던 어휘들을 추적하고자 한다. 독자라는 개념은 작가의 형성과 떨어져 논의될 수 없으므로, ‘호사자(好事者, 아마추어 수집가, 애호가)’라고 알려진, 텍스트를 읽고, 수집하고, 창작하거나 편집했던 이 모호한 집단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면서 작가, 편집자, 출판업자와 관련된 용어들을 논의하는 일 또한 필요하다. 출판업자와 작가는 그들의 잠재적인 독자층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다양한 독서 행위에 어울리는 텍스트들을 생산해냈다. 예를 들어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운문이 들어간 텍스트, 낭송하거나 노래할 수 있도록 고안된 텍스트, 읽기를 돕는 그림, 독서를 용이하게 하는 인쇄상의 특징, 그리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평점과 주석을 가진 텍스트 등이 그것이다. 나는 위샹더우(余象斗, 1560년-1637년경 이후)의 편집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데, 그는 아마도 교육 수준과 문해력이 낮은 독자들을 특별히 겨냥하여 평점을 쓴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경전
백화체 텍스트의 서문들에는 백화체 사용을 합리화하는 전제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 전제들은 곧 허구적인 글쓰기에 대한 옹호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서문은 궁극적으로는 고대에서 기원한 문학의 기능이라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지만, 16세기에 서문을 쓴 이들은 이러한 오래된 개념을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하였다. 중국 문명에서 문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생각 가운데 하나인 ‘문학이 도를 전해야 한다[文以載道]’라는, 즉 문학이 도덕적 가르침의 수단이라는 생각은 허구적인 백화체 텍스트까지도 근본적으로 정당화했다.
《삼국지통속연의》 1494년의 서문에 있는 융위쯔(庸愚子, 쟝다치(蔣大器)의 필명)의 말은 이러한 원칙을 대표한다. “고인의 충성을 읽게 되면 자신이 충성스러운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효성을 읽게 되면 자신이 효성스러운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 만약 읽어 넘기기만 하고서 몸으로 힘써 실천하지 않으면 이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이것과 대를 이루는 것이 어떤 독자들은 부정적인 사례들로 인해 선행을 배우는 대신 묘사된 악행들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장주포(張竹坡, 1670년-1698년)는 유명한 염정 소설인 《금병매》에 붙인 자신의 서문에서 듣는 청중으로서의 여성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 특히 우려했다.
《금병매》는 절대 아녀자들에게 읽게 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금빛 휘장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면서 처첩들에게 이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남자 중에서도 이 이야기에 담긴 권계와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드문 것을 모른다. …… 만약 몇 명의 사람들이라도 이 이야기를 따라한다면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여기서 명대의 유명한 사대기서(四大奇書)를 “제대로 읽는 것[善讀]”의 중요성에 대한 청대(1644년-1911년)의 평점가 류팅지(劉廷璣, 활동기간은 1712년)의 관점을 보도록 하자. “《수호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이들은 탐욕스럽고 반역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삼국연의》를 제대로 읽지 못한 이들은 꾀를 부리고 속이려는 마음이 생긴다. 《서유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이들은 엉뚱하고 허황된 마음이 생긴다.” 《금병매》의 경우는 “이 책을 읽고 따라하고자 하는 이들은 금수이다.”
서문들을 보면 볼수록 경서가 심지어는 문인 계층의 몇몇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어렵고 관찬 사서에는 분명한 도덕적 메시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중국의 인쇄 출판 초기에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유명한 성리학자인 주시(朱熹)는 그의 저작인 <독서법(讀書法)>에서 경서가 본래부터 난해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고, 이러한 난해함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독서 방법을 추천하였다. 주시의 주석을 단 경서는 중국 전통 시기 마지막까지 교육과 과거 제도의 지배적인 커리큘럼을 구성하였으며 교육과 독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천년 동안 중국의 교육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명청 시기 동안 (엘리트) 독서 방법에 대한 성리학적 관념의 기준으로서 (문인 계층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을 명백하게 겨냥한) 독서에 대한 주시의 생각을 간단히 검토하는 일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설명하는 것처럼 이러한 관념은 3,4세기 후에 백화체 인쇄물 출판업자들의 광범위한 편집 행위 내에서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주시는 내적인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경서를 철저하고 반복적으로 읽을 것을 요구하였다. 《맹자》를 읽던 초기에는 그조차도 어려움이 있었다고 인정한 다음의 대목에서 우리는 최고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조차 그러한 고문(古文)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절대적인 노력이 요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하여 말하였다. “먼저 십 수 차례 읽으면 문장의 의미를 십분의 사, 오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주석을 보면 또 십분의 이, 삼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본문을 읽으면 또 십분의 일, 이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맹자(孟子)》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읽었더니 비록 본래 길었던 그 문장도 의미를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볼 수 있었다.”
때로 주시는 고전이 가진 관념적인 명료함에 주목하기도 했지만(“성현의 말은 해와 달처럼 분명하다(聖賢之言, 明如日月)”). 학생들이 고대의 텍스트에 반영되어 있는 내재적인 도덕 원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할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성인의 수많은 말들은 당연한 이치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염려하여 다시 책에 적어둔 것이다. …… 그러나 사람들이 주의 깊게 읽지 않는 것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성인의 말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경서를 읽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힘써 노력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주시(朱熹)가 사용한 은유는 경전에 숙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절대적인 물리적 노력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텍스트의 피부 아래까지 간파하고, 텍스트를 꿰뚫어 보기 위해 마치 토기에 있는 것과 같은 “틈”(縫罅)을 찾고, 군사적 포위 공격을 통해 대규모의 습격을 감행하듯이 텍스트에서 의미를 힘써 얻어내고(須大殺一番), 혹독한 옥리가 죄수를 다루듯이(酷吏治獄) 또는 도적을 잡듯이 텍스트를 캐물어야 할(看文字如捉賊) 필요가 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마치 누군가의 몸을 깎아내듯이 해야 한다. “한 겹을 걷어내면 또 한 겹이 드러난다. 피부를 걷어내면 살이 드러난다. 살을 걷어내면 뼈가 드러난다. 뼈를 걷어내면 골수가 드러난다. 산만한 태도로 읽으면 결코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읽는 동안에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야 하며 눈이 지칠 때까지 읽어야 한다. 읽는다는 것은 고대인들의 경우처럼 주시에게도 암송을 의미했다. “무릇 독서라는 것은 읽을 때 속으로 생각해서만은 안 되고 입으로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 …… 배우는 이의 독서는 반드시 몸을 바로 하고 정좌하여 천천히 읽으면서 나지막하게 읊조려야 한다.” 독자는 무엇보다도 인쇄된 글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기민하고도 활동적인 실천가이다. “인쇄되어 있기만 한 말들은 살아있지 않은 것과 같다.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써먹을 수 없다. 반드시 여러 차례 깊이 새겨 익숙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살아난다.” 독자는 성인의 말에 대한 공동 저자가 되도록 고무되기도 한다. “책을 볼 때에는 대체로 먼저 숙독하여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되게 하라.”
독서에 대한 주시의 이론은 텍스트의 암송과 “소유”를 강조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필사본 문화에서 필수적인 독서와 학습 관습을 영속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연구자에게 그의 “독서법”은 “인쇄 지향적인 그 당시의 학생들을 인쇄 문화 이전의 전통으로 돌려보내려는 복고적인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살아 있을 당시 오히려 그는 독서 전통으로부터 이탈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했다. 예를 들면, 주시와 동시대 사람인 루샹산(陸象山, 1139-1193년)은 주시가 인쇄된 텍스트나 도표를 교육에 이용했다는 사실을 비판했다. 어쨌거나 주시의 이상화된 모델이 송대(960-1279년) 혹은 어떤 다른 시대의 실제적인 독서 행위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주시 모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명청 시기에 성리학적 정독의 통속적 해석을 전파했던 가정교육 지침서들에서 암암리에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로 “부지런히 읽기(勤讀)”의 예들이 쓰여 있는 이 책에서 독서의 목표는 성인들과 소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거 시험에 급제해 관리가 되는 것과 같이 좀 더 평범한 것이었다.
간략화·통속화의 유사한 과정이 주시의 사후 몇 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그의 프로그램을 제도화하였다. 원대(1279-1368년)에는 그의 빡빡한 커리큘럼 모델을 축소한 형태가 공식적으로 장려되었다. 윌리엄 시어도어 드 베리(William Theodore de Bary)는 주시가 주석을 단 사서(四書)에 기초하여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한” 커리큘럼이 어떻게 교육받은 몽골인들의 “가장 낮은 평범한 수준”을 겨냥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농민 출신인 명의 첫 번째 통치자 태조(1368년-1398년 재위)는 더욱 간략화된 성리학 커리큘럼을 제정하여 그것을 제국 전체에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매우 축약된 형태로도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지나치게 어려웠다. 경서는 난해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유가 경전을 통한 보편적인 도덕 교육이라는 태조의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명대에 서문을 쓰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소설 사업을 합리화하기 위해, 경서와 사서(史書)가 난해하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 때쯤 되면 이는 이미 친숙해진 수사였다)을 동원했다. 예를 들면 초기의 《삼국연의》 서문(1522년)을 쓴 어떤 이(슈란쯔(修髥子) 【옮긴이 주】)는 관찬 사서의 난해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한 손님이 나에게 물었다.
“……역사책(《삼국지》)이 이미 그 전말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또 《삼국지통속연의》가 있는 것은 군더더기에 가깝지 않은가?”
나는 말했다.
“그렇지 않네. 역사서(《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건이 상세하고 문장이 고문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가 숨어있고 그 뜻이 심오하여, 박식하고 부지런한 학자가 아니고서는 책을 펼치고 [읽다가] 내용이 어려워서 잠들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야. 이 때문에 호사가(好事者)들이 친숙한 말로 개작하여 책을 펴 내었으니(檃括成編), 이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에 통달하게 하고자 함이지.”
유명한 명대 사상가 위안훙다오(袁宏道, 1568년-1610년)는 경서를 읽는 일의 지루함을 《수호전》과 같은 허구화된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수월함과의 대비를 통해 설명하였다. 그는 책을 좋아하는 이와 질문자 사이의 대화를 지어내어 이 관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사람들이 《수호전》이 기이하다고 말하는데, 과연 기이하다. 나는 십삼경 또는 이십일사를 볼 때마다 책을 펼치면 어느덧 졸음이 왔다.” 그는 한대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는 교육받은 이들과 글자를 모르는 이들 모두(“의관을 갖춘 관리에서 시골의 사내와 아녀자까지(自衣冠以至村哥里婦)”)에게 전해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관찬 사서인 《한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설명이 필요했다. 이러한 까닭에 ‘연의(演義)’ 본이 출판된 것이었다. “(경서는)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지만 통속적인 글은 뜻이 통하기 때문에 ‘통속연의’라고 이름 붙였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 즉 “책 읽기를 좋아하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天下之好讀書)”이 독자층으로 상정되었던 것이다.
훨씬 더 대담한 생각, 즉 허구적인 글쓰기는 경서보다 읽기가 더 쉬울 뿐만 아니라 또한 경서에 대한 대체물로서 그것과 동일한 핵심적인 도덕적 지혜들을 전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은 명대였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교육가와 관리로서 높은 지위를 다양하게 거친 취유(瞿祐, 1341년-1427년)가 쓴, 문언으로 된 이야기들의 모음집 《전등신화(剪燈新話)》에서 최초로 발견하였다. 1378년에 쓴 서문에서 취유는 자신의 작품이 “음란함을 가르치는 것에 가까워(近于誨淫)” 감히 작품을 유포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원고를 책 상자 안에 보관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손님들이 그것을 구하러 왔고 그는 그들을 모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자 취유는 경서 자체에도 “부도덕함(淫)”과 “기이한 사건(怪)”의 영향을 받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시경》에는 연인과의 도피나 색정적인 사랑을 그린 시가 포함되어 있으며 《춘추》에는 혼란과 강탈의 시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허구적인 이야기일지라도 경전과 유사한 교훈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융위쯔(庸愚子)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삼국연의》 서문(1494년)에서 동일한 생각을 구체화하였다. 그는 “역사서의 문장은 이치가 은미하며 뜻이 심오하다(然史之文, 理微義奧)”라고 기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독자층이 넓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에 어려움을 겪게 되니 종종 그것을 버려 두고 다시 보지 않는 것은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대의 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지》에 대한 뤄관중(羅貫中)의 ‘연의’ 본은 “문장이 너무 심오하지도 않고 언어가 너무 속되지도 않으며 실제의 일을 기록하기로는 역사와 거의 같아서 이를 독송한다면 누구나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50년 후에 위안펑쯔(元峰子)는 《삼국지전(三國志傳)》(삼국지에 대한 다른 형식의 텍스트)에 붙인 1548년의 서문에서 이 유명한 소설이 “역사와 동등할” 뿐만 아니라 유가의 주요 경전에 대한 대체물이 된다고까지 선언함으로써 융위쯔(庸愚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즉 이 작품에는 《역경》에서의 길흉에 대한 전조, 《서경》에서의 통치술, 《시경》에 표현된 인간의 감정, 《춘추》에서의 포폄의 판단, 《예기》에서 발견되는 예절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안펑쯔에 따르면 작가로 추정되는 뤄관중(羅貫中, 약 1330년-1400년)은 관찬 사서가 모호하게 기술되어 “평범한 능력(庸常)”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했다고 한다. 이제 이 작품이 삽화를 곁들여 출판되었으니,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몇 세대 이후에 이러한 생각은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중국 문명의 성스러운 텍스트들을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긴 했지만, 서구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그런 텍스트들은 백화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하게 유사한 예는 아마도 좀 더 광범위한 독자층을 위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가 경전의 정수를 활용해서 백화체 서사를 편집하고 출간한 명청 시기(약 1550년 이후) 문인들의 행위일 것이다. 중국의 경우 루터의 독일어 성서 출판에 필적할 만한 백화로 된 인쇄본이 나왔던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들 사이에서는 백화체 소설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갔고, 그리하여 백화로 된 인쇄본에 대한 옹호라고 부를 수 있는 논리가 전개되었다. 이와 동시에 독자층에 대한 새로운 어휘들이 성리학적 정독 모델에서 제시된 것보다 훨씬 폭넓은 독서 행위의 범위와 함께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