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호이야기-002 공춘供春 공춘수영호供春樹癭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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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이싱 사람 저남강(儲南强)은 쑤저우를 노닐다가 우연히 길가 좌판에서 자사호 하나를 발견한다.  호의  표면은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있고  뚜껑은 없었다. 당연히 지나가는 어느 누구도 이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저씨는 호를 들어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호의 형태는 고졸하고 황토색을 띄었다. 사질이 많은 자사였다. 표면은 울퉁불퉁하여  엉기고  포개지며 나사산의 모양이 숨었다 드러났다 하였다. 호 손잡이 아래에는 공춘(供春) 두 자가 전서로 쓰여 있었고 호 바닥에는 대명 정덕 팔년 공춘(大明正德八年供春)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저남강은 속으로 설마 이 호가 오래전 실전된 공춘호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은화 한 냥에 이 호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호의 내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저씨는 이를 판매한 쑤저우의  상인을 다시 찾아가 이 호가 샤오싱의 부숙화(傅叔和) 집에서 흘러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샤오싱 부숙화의 집에서는 원래 비념자(费念慈)의 소유물이었다는 것을 듣게 된다. 다시 비념자의 집에서 오대징(吳大澂)의 소장품이었다는 것을, 또 오대징은 심균화(沈均和)에게서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일의 전후 맥락을 파악한 후 당시 많은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처 이것이 공춘의 진품임을 밝혀 내었다.

 그렇다면 공춘이 누구길래 저남강이 이리도 애를 쓰며 구하려고 한 것일까? 공춘(일설에는 공춘龔春)은 금사사(金沙寺)의 승려와 함께 자사호의 비조(鼻祖)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자사호는 금사사의 승려가 처음 만든 것으로 공춘은 자사호를 만든 이들 가운데 최초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그 출신이 비천하였는데 원래  장쑤 이싱의 진사 오이산(吳頤山)의  노복이었다. (일설에는 여종이라 하였으나 여종이 어찌 주인을 따라 암자에서 기거하며 주인의 시중을 들며 사찰의 승려에게 자사호를 배우겠는가? 이러한 이야기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명대 정덕,  가정 연간 사람이며 언제 태어나고 죽은 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오이산이 금사사에서 공부할 때 공춘은 주인을 모시는 틈틈이 금사사의 노승에게 자사호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가 만든 자사호는 새롭고 정교하며 기품있고 자연스러웠으며 질박하고 견고하여 오래지않아 세상에 공춘의 명성이 떨치게 되었다.

저남강은 이 공춘호를 구한 후 매우 이를 아껴 종일 쓰다듬고 문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싱 성밖 시시(西溪)에 춘귀루(春歸樓)를 지어 공춘호를 보관하였다. 일설에는 저씨가 영춘각(迎春閣)을 지어 소중히 보관하려 했는데 일본군의 침공으로 이루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춘귀루나 영춘각은 모두 공춘호가 돌아온 것과 공춘호를 맞이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는 이미 유실된 뚜껑의 복원을  황옥린(黃玉麟)에게 부탁하였다. 황옥린은 호의 뚜껑을 호박 꼭지 모양으로 만들고 저남강의 호를 참조하여 자사호 하나를 더 복제하여 만들었다. 저남강이 공춘호를 얻은 후 중국과 해외 소장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는데 영국 왕실박물관에서 이 소식을 듣고 미화 2만 달러에 구매를 원하였으나 저씨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후에 유명한 중국화가 황빈홍(黃賓虹)은 이 호를 보고 매우 좋아하였다. 그는 본래 이 자사호가 은행나무의 옹이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으나 황옥린이 만든 뚜껑은 이 호와는 어울리지 않아 잘못 재현한 것이라 여겼다.   저남강은 다시 민국시기 자사호 고수 배석민(裴石民)에게 청해 이 호의 뚜껑을 만들게 하였다.  뚜껑이 완성된 후 이싱의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반치량(潘稚亮)에게 부탁하여 뚜껑의 안쪽 가장자리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

호를 만든이는 공춘, 황옥린이 착오로 호박꼭지 모양의 뚜껑을 만들었다. 오백년 후 황빈홍이 이 호가 나무 옹이 모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2만 달러와 이를 바꾸려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다시 호의 뚜껑을 만든 이는 배석민이고 반치량이 이를 기록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호를 노리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인들은 이 호를 8000원에 팔라고 협박하였다. 저남강은 이 호를 깊은 산 속 땅 밑에 묻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이를 꺼냈고 신중국 성립 이후 그는 이 호를 다른 문화재와 함께 국가에 헌납하였다. 공춘호는 쑤저우 쑤난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 난징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후에 중국역사박물관(현 중국국가박물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호가 공춘호 진품이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앞서 저선생이 이 호를 구할 때 뚜껑이 유실되어 뚜껑의 제작을 황옥린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런데 황옥린은 1914년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1928년 자사호 뚜껑을 황옥린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비교적 믿을만하다.

저씨가 호를 구입하였을 때 원래 뚜껑이 있어 이 뚜껑에는 전서체로 ‘옥린’이라고 쓰여 있었다. 호 뚜껑은 호박꼭지 모양이었다. 저씨는 호는 공춘이 만든 것이고 뚜껑만 후에 청말의 명인 황옥린이 만든 것이라 여겼다. 이에 황빈홍의 의견을 듣고 당대의 자사호 명인 배석민에게 다시 뚜껑 제작을 맡긴 것이다.

고급공예미술사 판츠핑(潘持平)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 번째 이 호의 조형은 매우 독특하다. 노복 출신이자 처음 자사호를 배운 공춘이  이 정도 수준의 자사호를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두 번째 이 호의 자사 재질은 매우 부드럽고 매끄럽다. 명대 자사 가공기술을 넘어선다. 세 번째 이 호의 낙관은 전서체이다. 그런데 명대 자사호에서는 이러한 전서체 서명은 보이지 않는다. 네 번째 이 호에 사용된 자사니료는 황갈색의 단니(團泥)인데 단니는 명대에 사용되지 않은 청대 이후에 사용된 재료이다. 다섯 번째 이 호의 원래 뚜껑에 전서로 “옥린”이라는 서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청말 황옥린이 이 호를 제작한 것을 보여준다. 황옥린은 일찌기 오대징에게 고용되어 그의 집안에서 자사호를 만들었다.  이러한 수영호를 많이 만들었고 지금도 상하이와 이싱 등지의 많은 사람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저남강이 구입한 이 공춘호 역시 그 자신이 직접 조사를 하여 오대징의 집에 소장되어 있었던 호라고 밝힌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이유를 종합할 때 이 공춘호는 황옥린 자신이 공춘의 이름을 가탁하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구징저우(顧景洲)나 쉬시우탕(徐秀棠) 등 당대 자사 명인들도 동의하여 이 공춘호를 후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 공춘호에는 다른 황옥린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많은 인물들이 관련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있다. 단지 사연 많은 위작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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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옥린의 공춘수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