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암기定林庵記
나는 오랫동안 산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만력(萬曆) 무술(戊戌) 년(1598)에 초약후(焦弱侯)를 따라 남경에 이르러 정림암(定林庵)에 갔다. 암자는 여전히 아무 탈이 없었다. 이는 정림(定林)이 살아있을 때 평소 약후(弱侯)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림이 제자를 받지 않아 암자를 지킬 후계자가 없었지만, 초약후가 승려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이곳을 지키게 한 것이니, 지금 주지가 그 사람이다. 사실 그는 정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암자를 그저 정림이 창건했다는 것만으로 정림암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헛된 것이 아닌가?
정림은 암자를 창건하여 막 완성될 무렵, 이 곳을 버리고 떠나 우수(牛首)로 가서, 또 대화암각(大華嚴閣)을 창건했다. 이 또한 약후가 비문에서 그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다. 대화암각이 창건되자마자 또 그곳을 버리고 떠나 초(楚) 지방으로 와서, 당시 천중산(天中山)에 있던 나를 방문했다. 결국 천중산에서 세상을 떠나, 천중산에 탑을 세웠다. 마백시(馬伯時)가 이 산에서 은거할 때 특별히 산 속에 거처를 하나 짓고, 한 승려를 골라 그 탑을 지키는 일을 전담하게 했다.
이제 정림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12년이 흘렀건만,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이렇게 정림암을 다시 찾아와 볼 수 있게 되었다. 금릉(金陵)에는 이름난 사찰이 많으니, 보잘것없는 정림암 하나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마는 서까래가 오래 되고 기와가 헐어도 사람들은 차마 허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암자가 비록 작아도 사실은 정림이 오랫동안 여기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그 이름을 정림암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헛된 것이리오!
정림은 남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입에 자극적인 채소나 고기를 먹지 않고, 장가도 들지 않고, 날마다 그의 주인 주생(周生)을 따라 강론에 참석했다. 정림은 그 당시 주안(周安)이라고 불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일찍이 주생을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주안이 양군(楊君)⋅도남(道南)을 따라 서울에 갔을 때 만났었다. 그 때 이한봉(李翰峰)선생이 서울에 있었는데, 내게 “주안은 학문을 안다. 자네가 학문을 하려면 주안을 우습게 보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안은 본래 주생을 따라 두건과 신발을 가지고 다니는 일을 맡아보던 심부름꾼이었다. 주생은 학문에 열심이지 않았지만, 주안은 차를 끓여 들이고 식사를 준비하면서 틈틈이 곁에서 듣고, 혹은 처마 끝에 혼자 서 있기도 하고 혹은 기둥 곁에 몸을 웅크리고 있기도 하면서, 조금도 흔들림없이, 포기하지 않고 게으름 피우는 법이 없어,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 또한 이한봉선생은 “주안은 주생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자, 동남(東南) 지방의 이름난 인물인 도남이 해가 다 가도록 허물어져가는 절간에서 책을 읽는 것에 탄복하여 다시 도남을 스승으로 섬겼다”고도 했다. 주안 한 사람이 도남으로부터 도를 배울 수 있었고, 또한 이선생의 감탄과 부러움을 얻고, 약후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으니, 이로써 주안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
2년 후 내가 금릉에 와서 주안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도남이 또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주안은 약후에게 “저는 중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한 해가 되도록 산사(山寺)에 있었는데, 그저 이 머리카락만 늘어났을 뿐입니다. 그러니 깎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애원했다. 약후는 어떻게 할 수 없어, 결국 나와 관동명(管東溟) 등 여러 사람들과 약속하여, 주안을 운송선사(雲松禪師)에게 보내 삭발하고 제자가 되게 하고, 법명을 정림(定林)이라고 했다. 이것이 정림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래이다. 약후가 또 거소 옆에 따로 암자를 만들고, 내가 ‘정림암’(定林庵) 세 글자를 써서 편액을 달았다. 이것이 또한 정림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래이다.
약후가 말했다. “암자는 남아 있는데 그 암자의 주인은 죽었구려. 암자를 보니 마치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소. 그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그 암자는 아직 남아 있소. 암자가 있으니 사람 또한 있는 것 같구려. 비록 그렇지만, 이제 그 주인이 이미 죽었으니, 암자 또한 어찌 홀로 남아 있을 수 있겠소. 그저 기록이나마 남겨서 오래오래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오.”
나는 원래 암자에 대한 기록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림의 암자는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기록하여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후세 사람들이 정림이 누구이며 정림이라는 이름을 딴 이 암자가 무엇인지 모를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행(志行)이 남달랐던 승려는 많았다. 단지 정림 뿐이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유독 그가 비천한 처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성현의 큰 도에 뜻을 둔 것을 남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비천함이라면, 도를 듣지 않은 것보다 비천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정림은 스스로 그 자신이 어떠한지 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낮게 보아 천하게 여겨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 세상에 번듯하게 면류관을 쓰고 늠름하게 강단에 올라서, 입만 열면 인(仁)․의(義)를 말하고 손으로 먼지 낀 붓끝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야말로 높고도 귀하신 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그 누구인가? 하물며 강단의 말석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으랴? 또한 하물며 남의 종 노릇하는 천한 사람들과 채찍을 들고서 마소나 몰고 다니는 무리들은 자기들은 너무 고생만 한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주머니나 배를 채우는 데 아무 도움될 것이 없다면서 서로 몰려와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웃으니, 그들에게 스스로 귀하게 여기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림처럼 기꺼이 머리 숙여 마음을 낮추고, 곤궁한 사람에게 예를 다하고, 날마다 처마나 기둥에 기대어 흔쾌히 자신의 천한 신분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필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야 말려는 사람일 것이다! 옛날에도 없었다. 이는 마땅히 기록을 해야 하겠기에, 드디어 기록을 남긴다. 암자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오로지 암자에 정림이라는 이름을 붙인 유래만을 기록한다. 아아! 도에 대해 허황되게 떠들지 않고, 학문은 실효를 거두는 것에 힘썼으니, 이 정림암은 참으로 헛된 것이 아니로다.(권3)
卷三 雜述 定林庵記
余不出山久矣。萬曆戊戌,從焦弱侯至白下,詣定林庵,而庵猶然無恙者,以定林在日素信愛于弱侯也〃林不受徒,今來住持者弱侯擇僧守之,實不知定林作何面目,則此庵第屬定林創建,名曰定林庵,不虛耶?定林創庵甫成,即舍去,之牛首,複創大華嚴閣,弱侯碑紀其事甚明也。大甫成,又舍去,之楚,仿余于天中山,而遂化于天中山,塔于天中山。馬伯時隱此山時,特置山居一所,度一僧,使專守其塔矣。今定林化去又十二年,余未死,又複來此,複得見定林庵。夫金陵多名刹,區區一定林庵安足為輕重,而舊椽敗瓦,人不忍毀,則此庵雖小,實賴定林久存,名曰定林庵,豈虛耶!夫定林,白下人也,自幼不茹葷血,又不娶,日隨其主周生赴講,蓋當時所謂周安其人者也。余未嘗見周生,但見周安隨楊君道南至京師。時李翰峰先生在京,告余曰:“周安知學。子欲學,幸毋下視周安!”蓋周安本隨周生執巾屨之任,乃周生不力學,而周安供茶設饌,時時竊聽,或獨立簷端,或拱身柱側,不不倚,不退不倦,卒致斯道,又曰:“周安以周生病故,而道南乃東南名士,終歲讀書破寺中,故周安複事道南。”夫以一周安,乃得身事道南,又得李先生歎羨,弱侯信愛,則周安可知矣。後二年,余來金陵,獲接周安,而道南又不幸早死。周安因白弱侯曰:“吾欲為僧。夫吾迄歲山寺,只多此數莖發,不剃何為?”弱侯無以應,遂約余及管東溟諸公,送周安于云松禪師處披剃為弟子,改法名曰定林。此定林之所由名也。弱侯又于館側別為庵院,而余複書“定林庵”三字以匾之,此又定林庵之所由名也。
弱侯曰:“庵存人亡,見庵若見其人矣。其人雖亡,其庵尚存;庵存則人亦存。雖然,人今已亡,庵亦安得獨存;惟有記庶幾可久。”余謂庵已不足記也,定林之庵不可以不記也。
今不記,恐後我而生者且不知定林為何物,此庵為何等矣。夫從古以來,僧之有志行者亦多,獨定林哉!子獨怪其不辭卑賤,而有志于聖賢大道也。故曰:“賤莫賤于不聞道。”定林自視其身為何如者,故眾人卑之以為賤,而定林不知也。今天下冠冕之士,儼然而登講帷,口談仁義,手揮塵尾,可謂尊且貴矣,而能自貴者誰歟!況其隨從于講次之末者歟!又況于仆厮之賤,鞭箠之輩,不以為我勞,則必以為無益于充囊飽腹,且相率攘袂而竊笑矣。肯俯首下心,“歸禮窮士,日倚簷楹,欣樂而忘其身之賤,必欲為聖人然後已者耶!古無有矣。是宜記,遂為之記。不記庵,專記定林名庵之由。嗚呼!道不虛談,學務實效,則此定林庵真不虛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