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퍼레이드
카이펑의 명절은 그런 관광객만이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서울내기들도 빠져들었다. 그 열광을 더욱더 고조시킨 것이 궁정의 이벤트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의 행사에는 하늘의 아들(天子)인 황제도 참가했다. 정월 초하루 의식, 하늘의 제사 등 황제가 참가하는 제사는 많았다. 황제에게는 천지의 번영과 농작물의 풍작을 기원하는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여진인이 세운 금의 경우는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사냥을 나갔다. 사냥이 그 유제(遺制)라고 한다면, 생각지 못한 곳에서 민족의 본질을 보게 된 것이다.
황제의 참가에는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가 따랐다. 장식한 투구와 갑옷을 몸에 걸치고, 군악대의 음곡(音曲)에 보조를 맞춘 퍼레이드가 행해졌다. 궁중의 의식은 수도에서는 일대 이벤트로서 펼쳐졌다.
《동경몽화록》에 의거해 카이펑의 명절을 보면, 궁중에서는 정월 의식과 군사 퍼레이드 외에 황제의 탄생일, 재숙(齋宿) 등 갖가지 의식이 있었다. 그때마다 군대와 군악대의 퍼레이드가 있고, 황족의 행렬이 있었다. 그런 것이 서울내기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의 잔치는 일본에서라면 교토의 마을 주민들의 마츠리(祭り),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이 행했던 군사 퍼레이드, 속칭 우마조로에(馬揃え)이다. 서구에도 여러 가지 퍼레이드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사례에 관해서는 풍부한 사료가 남아 있으면서도 연구자의 관심의 차이로 정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다. 송의 수도에서도 잔치와 군사 퍼레이드가 행해졌고, 화려한 행렬이 이어졌다는 것은 사료로 상상할 수 있다.
특히 국가적인 천지를 제사지내는 퍼레이드를 할 때는 2만 명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 우메하라 가오루(梅原郁)가 복원을 시도했던 대로다. 이런 류의 연구가 장치로서의 도시를 규명하는 것이긴 하지만, 중국학자의 관심은 오히려 도시 구조의 해명에 맞춰져 왔다. 현상 면의 연구가 다소 소홀히 되어버린 것이다. 불충분하지만, 당시의 풍경을 점묘해 보도록 하자.
송은 군사적으로는 강한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당 말 이래의 혼란을 통일한 국가였지만, 어느 쪽인가 하면 약병(弱兵)의 국가였다.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는 대체로 제국이라 불렸다. 그런데 송만큼은 지배자를 황제라 부르고, 관료체제를 완성해 전제 군주체제를 흔들림 없이 유지해온 국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조라 불린다. 진한(秦漢) 제국, 당(唐) 제국 등이라 부르는데, 송 제국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전제적인 체제를 갖추었으면서도 사대부의 자유로운 발언이 보였고, 서민문화의 발달이 보였던 것 등으로 인해 제국답지 않은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며 군사적인 약세를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송대는 그때까지의 혼란, 그리고 그 혼란의 주역이 군대였다고 하는 것을 거울삼아 군제를 바꿨다. 무인의 등용을 억누르고 문관을 등용하고, 군사적인 것을 컨트롤하는 것 역시 그들에게 위임했다. 군대도 모병이었다. 그 결과 군대는 약해졌다. 군대에서 밥을 먹는 이는 죽지 않으려 전쟁을 하고, 나이를 먹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약한 군대로는 송 주변에서 흥하고 망한 몇몇 민족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를 늘렸다. 그러나 약한 병사는 얼마를 모으든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송이 중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것도 전 국토를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북방의 지금의 베이징 일대는 요(遼)나라에, 서쪽은 서하(西夏)에 눌려 있었다. 금이 요를 대신하고 화북을 탈환해 남하했지만 결국 몽골인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북방 민족에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던 일대(一代)였다. 내적인 에너지가 높은 국가이면서 우리에게 약하다는 이미지를 주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연하게 군대가 존재했다. 대체로 두 가지로 대별된다. 금군(禁軍)과 상군(廂軍)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금군이라 불렸던 것이 정규군이고, 상군이라 불렸던 것은 잡역군이었다. 국가 방위의 중심이 된 것이 정규군인 금군이다. 《수호전》에 수도 80만 금군 총수 등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수호전》에서도 군대가 열병을 받는 장면이나 무술 시합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실제로 행해졌던 것이다. 그들이 화려한 무장을 하고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것이다.
의식의 준비는 꼼꼼하게 이루어졌다. 3년에 한번 있는 대례 때에는 2개월에 걸쳐 리허설을 되풀이했다. 그런 때의 행렬이 2만 명을 넘었던 것이다. 깃발을 늘어놓고 군대가 위용을 갖추고 행진했다. 게다가 선두에는 코끼리가 행진했다. 수도의 대로를 그런 행렬이 행진하는 모습은 상상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은 아니었을까?
그런 퍼레이드의 기본 구성은 오늘날과 그리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화려한 의상, 그리고 음악. 무엇보다 국가에는 의식을 주재하는 요소가 있다. 대담하게 말하면, 국가가 국가인 이유는 의식을 얼마나 능숙하게 해치우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화이다. 특히 도시에서의 이벤트의 경우에는 한층 양식화가 진전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음악이 연출했다.
지금도 항구 마츠리(港祭り)나 긴자 마츠리(銀座祭り) 같은 것에는 화려한 고적대가 나온다. 소년 소녀로 이루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경찰이나 소방청, 또는 자위대 같은 조직의 사람들에 의한 것도 있다. 조직적으로 통제된 사람들에 의한 음악 연주는 이벤트를 성대하게 고조시킨다. 중세의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수도인 카이펑에는 이제까지 서술해온 바와 같은 공식적이고도 정례적인 행사 외에도 행사가 줄을 이었다. 궁정의 전통적인 의식이나 황태자의 결혼, 외국 사신의 환영 리셉션 등등. 그밖에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한 행사에도 관계했다. 그럴 때는 음악이 필요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음악도 예절의 중요한 하나로 상당히 엄격하게 논의되었다. 음악을 연주하는 전문적인 직무가 정부에 설치되어,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앙양했다. 그럴 때 출연한 것이 정부 직속의 악대와 군악대였다. 일본의 궁내청(宮內廳)이 아악부(雅樂部)를 두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것이다. 덧붙이자면, 정부 직속의 궁정 악무의 교육기관을 교방(敎坊)이라 했다. 북송 말에는 폐지되어 일반에서 모집해 의식을 대비해 연습했다고 한다.
군대에 음악대를 둔 것은 송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균용직(鈞容直)이라 했다. 이들은 군대나 궁정에서 행사가 있을 때 활약했는데, 10일 정도의 휴식 시간에는 비어 있는 땅에서 교방과 연주 연습을 했다. 이것은 일반인들의 관람도 허용되었다. 송 왕조도 상당히 멋있는 일을 했다.
그럴 때는 여자나 아이들이 모여 구경하고, 이것을 노리고 주전부리나 과일 등을 파는 조그마한 점포도 나왔다. 길옆에서 과자 등을 집어먹으며, 군악대의 연주를 즐기는 것은 우아한 일이다.
당 현종이 궁정의 전용 극단을 즐겼던 것은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송 왕조의 서민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덧붙여 말하자면, 가부키의 세계를 이원(梨園)이라 불렀던 것은 이 현종의 오케스트라인 ‘황제이원제자(皇帝梨園弟子)’에서 유래한 것이다.
군악대가 그 진가를 발휘했던 것은 군대의 퍼레이드나 공적인 행사가 있을 때였다. 봄의 열병식 등이 활약의 장이었다. 그밖에도 황제의 출어(出御)에도 활약했다. 행렬의 선두에 서서 연주를 했던 것이다. 정월 14일의 우웨관(五岳觀)으로의 행행(行幸) 등, 교방과 군악대의 양자가 어울어져 제군(諸軍)의 기마대도 음악을 연주하면서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광장에서의 연습은 그때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활약의 장은 공식적인 행사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명절 때도 참가해 음악을 펼쳐놓았다. 쑹쟝이 들뜬 마음으로 걸었던 원소절 때에도 교방이나 군악대 역시 출연했다. 복장을 착용한 근위군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예인을 참가시켜 연주를 했던 것이다.
군사 연습
알랭의 말이 아니더라도, 군대의 퍼레이드는 아름다운 것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복을 차려입고, 정연하게 보조를 맞춰 행진했다. 이것은 비록 약병의 송이었음에도 바뀌지 않았다. 원래 군대라는 것은 바깥에 대해서는 약해도 안으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인 것이다.
카이펑은 제국의 수도였기에 무슨 일이 있든 화려했고, 외국 사절의 왕래나 궁중의 의식 등 공식적인 일도 많았다. 계절마다 명절 등도 성했기에 서울내기들은 이럴 때만 되면 살판났다. 군대의 퍼레이드는 그런 의식을 한층 고조시켰다고 생각된다. 《수호전》에서도 쑹쟝 등이 황제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이는 퍼레이드를 하는 대목에서 한층 더 열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한 것은 황제의 출어(出御)에 수반되는 퍼레이드였을 것이다.
황제의 출어는 화려했지만 엄격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제복을 차려입은 군인의 퍼레이드에 잔치 분위는 더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다. 3년마다 행해지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 하늘에 제사 드리는 제사 때에는 행진하는 의장병과 함께 치장을 한 7마리의 코끼리가 이끌어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켰다고 한다.
카이펑의 시내에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군대의 퍼레이드가 행해졌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화려한 것이 군사 연습이었을 것이다. 매년 3월 20일에 수도의 서쪽 진밍츠(金明池)와 츙린위안(瓊林苑)에서 행해졌다. 여러 금군의 군대가 머리에 꽃을 꽂고 몸에는 금실을 수놓은 비단 진우직(陣羽織)과 금대(金帶)를 두르고 천자 앞에 나아갔다고 한다. 상상만 해도 화려하지 않은가?
황제는 우선 진밍츠에 이르렀다. 여기는 초대 황제인 태조가 부하 장군들로부터 연회 때 시덥잖은 말을 빌미삼아 싸우지 않고 병권을 접수했다는 건국의 전승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련(水練)을 행했다.
이 군사 연습을 할 때에는 우선 연회가 행해졌다. 그 어전 앞에 의장병이 위엄을 바로잡고, 여러 가지 데몬스트레이션이 펼쳐졌던 것이다. 만함식(滿艦飾)의 군선(軍船)의 행진. 그 위에서 행해졌던 연기. 음악과 곡예, 때로는 꼭두각시 인형극이나 연극. 이것이 끝나면, 군선의 행진과 교련, 어떤 군선이건 눈부시게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그 위의 장교와 군인들도 위엄 있게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 교련이라는 것도 배의 행진에서부터 작은 배로 큰 배를 항구로의 예인하고, 동서 진영으로 나뉘어 모의 합전을 하는 것까지 여러 가지였다. 연습은 마지막으로 양군에 의한 표간(標竿)의 쟁탈전으로, 표간을 뺏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수련(水練)이 끝나고 황제가 물러난 뒤 연못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었다. 이번에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배를 띄우고, 고용한 예인들과 즐겼다. 여기에는 서민을 대상으로 배를 빌려주는 장사꾼도 있었던 듯하다.
수련의 열병을 끝낸 황제는 츙린위안(瓊林苑)으로 옮겨 육상의 연습을 열병했다. 여기에는 소나무와 잣나무 고목이 무성한 정원과 요정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전국에서 진기한 꽃을 모아 놓은 정원도 있었는데 이곳은 아주 훌륭한 유람지이기도 했다. 평소에도 육상의 예행연습이 행하여졌지만, 그 부근의 큰 길에서는 폴로 등의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 가능했던 듯하다. 그러나 궁전에는 평소에는 사람의 출입이 가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궁전에 행신했던 황제는 제군의 연기 연습을 보았다. 기록을 읽어보면 이것은 두 패의 진영으로 나누어 북 따위(타악기)를 잡고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대강의 형태는 갖추고 있지만, 군사연습이나 퍼레이드라고 하기보다는 연기였다고 하는 편이 낫다. 음악에 맞추어 깃발을 흔들어 보거나 무기를 조정해 보거나 하였다.
당시에 이미 화약을 사용한 연습도 있었다. 그러나 가면을 쓰고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연기를 했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마치 싸구려 시대극은 아니었을까? 그밖에도 기묘한 모양이나 분장을 하고 적을 때려눕히는 이가 있는 등, 다소 연기에 지나지 않는 연습도 많았다. 금의 공격으로 누란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송은 진언(進言)에 의해 기묘한 주술의 군대를 만들어 대처하려고 했다. 애당초부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 표면적인 새로움과는 달리 내면에 잠재한 고루함을 보여주는 연습이었다.
유목민족처럼 말을 부리는 연기도 있었다. 이것은 군대만이 아니다. 궁정의 여관(女官)이나 환관도 연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마찬가지로 치장한 당나귀를 올라타고 하는 구기였다. 모두 합해서 1백 명 정도가 되는 일종의 폴로이다. 그런 맛보기 놀이 뒤에 황제는 사전(射殿)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제는 여기서 활을 쏘았다. 쏜 화살이 날라 가면 “과녁에 맞았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와하는 함성이 일었다고 한다. 사기성이 농후한 연습이었다. 그밖에도 화살을 받아내는 연기도 있었다고 했기에, 마치 무협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교련의 열병을 끝낸 황제는 환궁했지만, 그때도 수행 신하에게 꽃을 내리고 황제 자신도 꽃으로 장식하고 귀환했다고 한다. 우아한 풍경이었다.
그밖에도 2월에는 제군(諸軍)이 교외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던 듯하다. 이를테면, 동지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을 한식이라 하고 그 사흘간이 청명절이다. 이 기간 동안 성묘하기 위해 밖에 나갔다. 그럴 때도 절 등의 행사 외에 군사 퍼레이드가 행해졌다. 사람들이 외출할 때는 점포나 구경거리가 나왔다. 여기서도 군악대가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황제가 자리에 임하는 연습이 화려했을 것이다.
때는 봄, 물이 따뜻해질 무렵 꽃이 피어나고 여기에 맞춰 새도 노래했다. 따사로워지면, 시내에도 장사꾼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된다. 사람들의 나들이도 시작된다. 그럴 때 행해졌던 화려한 군사 연습은 사람들의 아주 좋은 화제이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사람들에게 부여한 잔치였다. 명절 또한 당시 도시 경관이었다.
송이 문치국가였다는 것은 자주 지적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술한 바와 같이 문인 관료의 등용과 약한 군대가 그런 이미지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의외로 군대가 참가한 것이 많다. 국가적인 이벤트가 되면, 더더욱 그랬다. 이것은 잔치에 군대가 활발하게 출동했다는 것으로도 상상할 수 있다. 궁중에서의 공식 행사나 군사 퍼레이드가 있을 때 군악대가 출연해 연주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군대가 퍼레이드의 선두에 서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정부 직속의 군악대가 시민의 잔치 마당에까지 참가해 연기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기관이 참여하게 된다면, [외견상] 도시 거주민이 주체적으로 추진하는 듯이 보여도 실상은 정부가 전통에 따라 연출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전통대로 전개한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잔치에 도시 거주민의 의향이 미묘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거기에 정부도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송대의 도시 이벤트의 실태를 상세히 보러 가는 것 말고도 관여해 가는 국가의 본질도 보러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군사 퍼레이드와 군악대가 참가했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거리에서 군악대의 연주를 즐겼던 것 자체는 그 시대에 대해 밝은 인상을 갖게 한다. 북송의 궁정은 좁고 어떤 경우에는 관청 건물도 빌린 것이었다. 이것이 강한 지배가 관철되었다고 하는 송 왕조를 개방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전제 군주의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생각만큼 소통이 안 되고 답답한 시대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도시에서 생활의 연출자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