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2세秦二世
4. 범증(范增)이 초왕(楚王)을 세웠다는 주장은 흥망과 관련이 없다
회왕(懷王)을 옹립한 것이 항량(項梁)의 뜻이 아니라 범증(范增)의 건의 때문이라는 것은 그저 백성의 바람이었을 따름이다. 신하와 군주의 명분이 섰는데 그 마음이 서로 풀리지 않았으니, 항량이 성공한다 해도 회왕은 당연히 삼초(三楚)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회왕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량이 패배하자마자 바로 상장군(上將軍)의 권한을 빼앗아 송의(宋義)에게 주어 버렸다. 송의는 마침 적당한 틈을 만나 회왕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함께 계책을 세우며 무척 기뻐했다. 그러나 그가 진나라를 멸할 계책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항량의 권력을 탈취할 계책이 있었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었다. 송의가 안양성(安陽城)에 틀어박혀 움직이려 하지 않자 항우(項羽)가 목을 베어 버렸는데, 그가 조(趙)나라를 구원하는 데에 늑장을 부려서가 아니라 속히 공격하자는 자신의 주장을 빼앗아 버린 데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송의가 안양성에 틀어박혀 진격하지 않은 것은 진나라와 조나라가 싸우면서 지칠 틈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회를 이용해서 항우의 병력을 챙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들이 제(齊)나라의 재상이 되자 무염(無鹽) 땅으로 보낸 것은 병사들이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는 것이 가련히 여기지 않고 스스로 잘난 체한 것이 아니라, 회왕을 위해 제나라에 외부 지원 세력을 세움으로써 송의 자신의 지위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였다.
송의가 죽자 장수들이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를 앞장서 세운 것은 장군의 가문입니다.”
여기서 항우의 정황과 송의 정황, 그리고 회왕이 항씨 가문에서 끝내 안주할 수 없는 정황을 모두알 수 있다. 조나라를 구원하는 일은 송의에게 명령하고, 관중에 들어가는 일은 패공(沛公) 유방(劉邦)에게 명령했다. 항량이 죽어 항우가 고립되자 하필 그를 송의 휘하의 비장(裨將)으로 삼음으로써 회왕이 항씨의 권력을 탈취하려는 계책은 성공했지만, 초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승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다행히 진나라의 군주가 2세였고 그 재상이 조고였으며, 그 상장군이 장한(章邯)과 왕리(王離)였기 때문에 초나라 군주와 신사 사이의 틈을 이간질할 수 있는 이가 없었을 따름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패공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던 마당에 하물며 모략의 재능도 보잘것없었던 송의나 그저 용맹하기만 했던 항우 같은 이들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군주와 신하는 그저 명분만을 대의(大義)로 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정해주고, 자신의 품성에 맞으며, 정서적으로 순조로운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아니면 하루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범증이 초나라 회왕을 세웠다는 주장이나 삼로동공(三老董公)이 의제(義帝) 즉 회왕의 장례를 치르라는 계책을 제시한 것도 오래전부터 흥망과는 관련이 부족했다.
5. 조고, 초나라가 진나라 종실(宗室)을 멸할 것을 약속하다
진나라가 패망시켜 치욕을 준 것은 육왕(六王)의 후예였다. 그들을 정벌하여 변방으로 이주시켜 과부와 고아로 남은 처자식들이 바로 군현(郡縣)의 백성이다. 그런데 2세의 목을 베어 종실을 멸하려고 초나라에 투항하여 관중(關中) 땅을 나누어 왕을 옹립하기로 약속한 이는 조고이다. 그러므로 적국이 원한을 갖고 있지만 원한을 풀 능력이 없을 수 있고, 백성이 원한을 품고 있지만 혹시 차마 풀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지만, 소인을 너무 가까이하면 재앙이 반드시 소인에게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여자와 소인은 키우기 어렵다.”라고 한 것이다. 성인도 어려워했거늘 하물며 재능이 중간 정도인 군주와 그 아래의 군주들이야 어떠하겠는가?
소인의 마음을 지혜로운 이는 추측할 수 없고 강인한 사람도 통제할 수 없다. 틀림없이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그럴 수도 있고, 틀림없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그렇게 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항우는 포악하고 패공은 현명했고 장한이 원만을 산 것은 이제 막 일어난 새로운 일이지만, 온 천하가 조고의 살을 씹어 먹고 그 가죽을 이불 삼아 눕고 싶어 했다. 그러니 설령 조고가 진나라 영씨(嬴氏)의 종실을 멸하고 관문을 열어 제후들에게 설명한다 해도 어찌 칼날을 피할 수 있겠으며, 하물며 식읍(食邑)을 받아 관작(官爵)에 봉해질 수 있었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가 진나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알겠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진나라를 함께 짓이겨 고깃덩어리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호해(胡亥)를 죽여서 어떤 요행을 바라고자 했다면 어찌 다만 호해가 어리석어서 장막 안으로 화살이 날아 들어오는데도 모르고 있었다고 하겠는가? 현명하면서 계책에 익숙하면서도 또한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재앙과 복의 바깥에 무뢰한 욕심[無藉之欲]이 있고, 삶과 죽음의 바깥에 정해진 방향이 없는 속임수[無方之譎]가 있으며, 잠깐 사이에 급변하는 감정[忽變之情]이 있다. 이로움도 깨닫지 못할 때도 있지만 어디에서나 왕성히 나타나는데, 그런 뒤에는 군자들은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도 그것을 어려워했으니, 참으로 어렵지 않은가!
해진 솜옷으로 배의 틈을 막으면 물이 새지 않도록 종일토록 조심해야 한다.
《주역》 〈기제괘(旣濟卦)〉, “륙사(六四)”: 繻有衣袽, 終日戒.
‘종일’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자신을 수양하고 작은 일에도 신중하지 않은 채 그것을 다루는 술수를 바라면서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6. 법이 엄밀해도 천하를 이길 수는 없다
누가 진나라의 법이 엄밀하여 천하를 이길 수 있다고 했는가? 항량(項梁)은 역양(櫟陽)에서 체포된 일이 있는데, 기주(蘄州,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치춘현[蘄春縣])의 감옥을 관리하는 아전 조구(曹咎)가 사마흔(司馬欣)에게 서신을 전한 덕에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청탁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뇌물을 써서 부탁하곤 했지만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항량은 초나라 대장군의 아들이니 진나라에서는 더욱 꺼리는 인물인데 사마흔이 일개 아전의 편지를 받고 곤란을 해소해 주었다. 그러니 그 외에 지위가 높고 권세가 큰 이들의 행위를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법이 엄밀할수록 관리들의 권한도 커지고, 사형이 빈번할수록 뇌물을 먹이는 일이 더욱 성행한다. 그럴듯하게 꾸며 죄를 면하게 해 주니, 천자의 권한이 오히려 보잘것없는 아전에게 쥐어진 셈이다. 남양(南陽)의 유씨(劉氏)들이 누차 살인을 저질러도 왕망(王莽)이 문책하지 못한 것은 여기에 사형을 법으로 정해 놓더라도 그쪽에서 형벌을 쇠털보다 가볍게 시행하니 이리저리 빠져나갈 수 있었다.
관리가 범법 행위를 알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으면 처벌하면서 마음대로 연좌(連坐)하니 위아래가 서로 의지해 간악한 행위를 숨기게 된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자리를 계승하지 않은 군주는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잠조차 편히 자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빙자하여 천하에 족쇄를 채우면서 또 당연히 천하에 의해 족쇄가 채워지게 된다. 천명을 받아 만방(萬邦)을 올바로 다스리면서 덕성이 위엄을 보이기에 충분하고, 잘못을 저질러 괴롭고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다면 그런 것을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 관대해야 오히려 엄격해지고, 간략해야 오히려 안정되는 것이다. 큰 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을 빠져나갔는데 다시 잡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법이 한 명의 왕에게 정해져 있지만 감옥을 관리하는 벼슬아치들이 그것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