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도시 생활의 전개 3

카이펑 소묘

카이펑의 풍속을 서술하기에 앞서 간단한 점묘를 해두고자 한다.

카이펑은 수도 이상으로 정치적인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것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궁성이다. 그 안에 많은 관청들이 궁전과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물론 [그 안에] 수용할 수 없었던 관청도 많다. 이것들은 궁성 근처를 필두로 성내 여러 곳에 점점이 산재했다. 그 가운데는 셋집의 형태로 개설된 곳도 있었다. 이 점으로도 당과 송의 다른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카이펑의 생생한 도시 공간은 거의 내성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카이펑의 마을을 구성하는 여러 것이 대체로 내성 또는 내성의 성벽 바깥 근처까지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궁성에 수용되지 않은 관청이나, 다샹궈쓰(大相國寺), 타이핑싱궈쓰(太平興國寺) 같은 명찰이나 계신(界身)이라 불렸던 은행가, 그밖에도 직물점, 귀금속점, 약품점, 향약점(香藥店)과 같은 상점가와 주택가, 그 가운데서도 번화가나 고급주택가는 내성 안이나 그 주변에 모여 있었다.

특히 궁성의 정면에서 동쪽에 걸쳐서 많은 관청이나 사원, 저자(市), 극장 등이 집중되어 있었다. 도쿄의 니혼바시(日本橋)에서 긴자(銀座) 일대와 같은 곳이었던 것일까?

그런 곳에는 가로 침범의 금지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의 의욕만 앞서 떠들썩하고 활기에 넘친 분위기와 경관을 드러내 보였을 것이다.

당시 다리 위에 점포를 내는 것은 금지되었다. 다리는 공중에 걸쳐 있었기 때문에 손상되기 쉬웠다. 또 다리 위에 점포가 있으면, 그 무게로 인해 다리가 내려앉아 아래를 통과하는 배가 지나다니기 어려웠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사물은 거대화된다. 또 설계 당시의 구상은 대체로 엉성하다.

이것은 카이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강남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막대한 양에 이르렀다. 그 양은 대체로 연간 600만 석이었다. 게다가 배는 《청명상하도》에서 보듯이 상당히 컸다. 여기서 무지개다리(虹橋)와 같은 광경이 출현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찍이 구경한 바 있다. 뱃사람이 필사적으로 배를 밀어내고 이것을 위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광경을. 옆에서는 그런 광경 등에 아랑곳 않고 장사하느라 바빴다. 그들도 기회만 있으면, 다리에 진을 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 광경은 카이펑의 메인 스트리트인 위졔(御街)에 걸쳐 있는 톈한저우챠오(天漢州橋) 위에서도 보였다. 금지령 등을 무시하고 많은 노점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잡했다. 그런 경관이 성 안 곳곳에서 보였는데, 특히 내성 안에서 많이 보였을 것이다.

번화가가 동부에 많았던 것도 카이펑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강남의 물자를 실은 배가 동쪽에서 왔던 것과 관계가 있다. 배가 닿는 쪽에 창고가 만들어져 저자가 섰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송대에 실크로드는 이미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북방에 탕구트인의 서하(西夏)와 거란인의 요와 같은 나라가 발호하고 있던 송대에 의미가 컸던 것은 남해 무역이었다. 배가 들어오는 해안선은 중국 동남부였다. 항구는 닝보(寧波)와 취안저우(泉州)였다. 그리고 운하로 운반했다. 그러니 카이펑에서 번영한 것이 동부였다는 사실은 자명해진다.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사람들이 밀집하면 번화가가 생긴다. 이것 역시 정석과도 같은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번화가야말로 도시적인 것이다. 환락가야말로 도시의 꽃인 것이다. 도쿄의 얼굴이 예전의 아사쿠사(淺草)에서 지금의 신주쿠(新宿)로 변한 것과 같은 것이다. 카이펑이 진정 카이펑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도 환락가였다. 이것은 와자(瓦子)라고 불렸다. 그밖에도 와(瓦), 와시(瓦市), 와사(瓦舍) 등으로 불렸다. 사람이 모일 때는 기와 같이 혼잡을 이루며 왁자지껄하다가 흩어질 때는 기와 같이 부서진다는 것이 어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약간 억지스러운 감이 있기는 하다. 마스이 츠네오(增井經夫, 1907~1995년)는 외국어에서 온 것은 아닐까라고 했다. 카이펑에는 많은 와자가 있어 송 이후 현저했던 서민 문화는 이곳을 무대로 성장했다.

카이펑에서 또 한 가지 현저했던 것은 기관(妓館)이다. 당시 도시에 많은 창부가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저 마르코 폴로도 원의 수도인 다두(大都)에 2만 5천 명의 창부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송대에는 관기(官妓)와 사기(私妓)의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남송의 예이긴 하지만, 《몽량록(夢梁錄)》에는 명기의 조건과 관기 11명, 사기 23명이 올려져있다. 그들은 ‘사(詞)’를 노래하고, 때로는 부잣집 잔치에 출장을 나갔다. 그들은 또 조직화되어 있었던 듯하다. 총지배인 한 명 이외에 백 명마다, 천 명마다 각각 한 사람의 감시자가 있었다고 한다.

당송의 기녀와 창부, 그리고 그 사회에 관해서는 기시베 시게오(岸邊成男, 1912~2005년)의 연구가 있을 뿐인데, 전체적인 것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다만 카이펑에 있는 몇 곳의 기관 장소를 알 수 있다. 카이펑은 유혹으로 충만해 있었다.

카이펑과 명절

도시를 장식하는 것이 잔치이다. 그 어느 것보다 국가 그 자체가 의식을 주관하는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식 없이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도시는 그 마당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이 하계에 군림한 것이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의식을 행했다. 특히 중요한 것이 하늘과 땅(天地)을 제사지내는 것이다. 물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제사와 의식이 있다. 그런 것은 선조의 제사와 국가에서 필요한 의식이다. 외국의 사절을 환대하는 일 등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송 왕조는 그 의식을 카이펑에서 거행했다. 카이펑은 잔치를 위한 극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펑이라는 도시가 갖는 의식성에 관해서는 우메하라 가오루의 논고에 상세하다. 우메하라 가오루는 카이펑의 의식성을 왕조가 집행하는 의식의 면에서 논했다. 이것에 의하면 카이펑의 메인 스트리트에서는 당당하고 화려한 행렬이 행진했다. 궁성에서 쭉 뻗은 위졔(御街)는 왕조의 잔치 마당으로, 가부키(歌舞伎)의 하나미치(花道)와 같은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다만 왕조가 행한 의식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 양면이다. 아무리 공적인 성격을 가진 황제와 그 일족이라 해도 매일 매일의 사적인 생활 역시 있었다. 먼 옛날 아비인 태종의 후궁이었던 여성을 맞아들이려 했던 고종에게 군신들이 모두 반대했다. 자문을 받은 리지(李勣)는 “폐하의 가정사입니다”라고 간사하게 대답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등장에 얽힌 이야기다. 곧 국가가 행하는 의식에도 공사의 양면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본래는 민간의 잔치였음에도 왕조가 관여함으로써 공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변질되어 가일층 번영한 것도 있다. 사적인 잔치가 공적인 것이 되어 지배자의 의향이 본래는 일반적이었던 것을 좀 더 성대하면서도 중요한 것으로 승화시킨 예는 역사상 많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영웅 관위(關羽) 등이 그 전형이다. 그의 충의와 덕을 왕조가 좋아했기 때문에 마침내 관제(關帝)라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과 한 가지 더. 중국인의 마음에 스며든 풍습이 있는데, 이를테면, 정월이나 칠석 같은 매일의 명절과 연중행사가 그것이다. 일반 가정에서 행하는 명절과 습관도 많다. 그런 것에 관해 일본인들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베이징의 연중행사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연중행사가 송대에도 성행했다는 것은 《동경몽화록》 등이 전하고 있다. 이것들을 읽으면, 서민의 연중행사인 명절에 황실도 참가했다. 서민이 즐기는 명절을 중국인의 중심이었던 황제 일족도 즐겼던 것이다. 황실의 참가는 서민들의 명절을 매우 크고 매우 성대하게 만들어 거대한 잔치로 격상되어 갔다. 도시는 또 그 마당으로서 아주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명절의 소개를 통해서 카이펑의 시민 생활도 한층 선명해진다.

정월 대보름(元宵)의 보름날(宵)

카이펑에는 여러 가지 연중행사가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도시의 명절로서 서울내기들을 흥분시켰다. 이것들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이를테면, 《수호전》에서의 우두머리 쑹쟝(宋江)은 정월 대보름 원소절(元宵節) 명절을 보고 싶어한다. 붉은 등을 켠 등롱(燈籠)이 잇달아 나와 더할 나위 없이 활기로 넘쳤다. 이것을 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 명절은 특히 떠들썩한 것으로 유명했다. 화려한 명절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이 들떠 떠들어댔다. 사랑도 생겨났다. 송대의 소설의 성향이 농후하게 남아 있는 《웅용봉사종소설(雄龍峰四種小說)》의 등롱제(燈籠祭)날 밤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생채란등전(張生彩鸞燈傳)」은 장생이 등롱 구경을 하는 도중에 향낭을 묶었던 붉은 얇은 비단을 줍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만큼 흥청거리는 가운데 우리도 쑹쟝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카이펑의 잔치를 보기로 하자.

《수호전》은 시내에서 시끄러운 큰 북소리가 울리고, 등이 붉게 켜진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광경은 《동경몽화록》에 상세하다. 이에 의하면, 한 해전 동지 때부터 가설무대가 만들어져 벌써부터 구경꾼들이 몰려나왔다.

특히 위졔(御街)가 붐볐는데, 여기에서는 공연이 많았다. 연극을 하는 이, 기이한 술법을 연기하는 이, 아크로바틱을 연기하는 이 등, 예인들이 총출연해 기예를 겨뤘다. 재주부리는 원숭이가 있는가 하면, 흉내내는 이도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곡예를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충예(蟲藝)를 보여주는 이, 기타 자잘한 기예를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연예의 종류도 많았다. 잡극(雜劇), 소패(小唄), 인형 놀이, 경업(輕業). 그림자 극과 강석(講釋)도 있었다. 《동경몽화록》에는 그런 예인의 이름이 실려 있다. 어느 것이건 수도에서 유명한 예인들이었을 것이다.

당시 카이펑에 이름이 알려졌던 많은 예인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종(神宗) 시대에 저 왕안스(王安石)을 겨냥하고 인기를 끌었던 딩셴셴(丁仙現)이라는 예인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시대에도 이름이 통했던 예인이 있어 명절 분위기를 띄웠던 것이다. 여자 예인 딩두사이(丁都賽)와 같이 초상화(姿繪)를 남긴 이도 있었다. 이들의 기예가 얼마나 인기를 끌었던 것일까? 아침을 알리는 시각에 맞춰 부랴부랴 와도 입장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수도의 명절 때가 되면,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이 모두 나와 기예를 겨뤘다. 이것 또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기예 가운데 특히 인기가 있었던 것은 강석(講釋)과 같은 설화(說話)이야기로 그 종류도 많았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 세속적인 이야기나 불교 설화를 이야기하는 이. 남송의 린안(臨安)의 이야기가 유명했지만, 여기 카이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거리 한 모퉁이에서도 강석사(講釋師)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극장에서 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거리 모퉁이의 강석사는 쉽게 친근감을 느껴 인기를 모았을 것이다. 《청명상하도》에도 그런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주루 옆 만두집 앞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북송 무렵이라면 《수호전》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동시대의 사건이다. 세속적인 이야기든, 역사물이든. 세속적인 이야기라면 《서유기》의 선구인 《대당삼장취경기(大唐三藏取經記)》였을까? [이것은] 재미를 목적으로 한 이야기다. 역사물이라면 《오대사(五代史)》였을까? 북송 건국 이전의 오대의 이야기는 그 무렵 성행했던 이야기다. 남송 무렵에는 황제 앞에서 이야기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송대에 싹이 튼 이런 종류의 연예는 원을 거쳐 명에 전해졌다. 그 뿐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에 전해져 에도시기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대로다. 저 이는 그렇게 거리 한 모퉁이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은 충예(蟲藝)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종류의 구경거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암거미를 싸움시키고, 벌레 울음소리를 겨루는 것은 있지만, 곡예를 부리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런 것을 행했다. 명대가 되면, 개미를 두 패로 나누어 전쟁을 시키는 게 있었던 듯한데, 송대에도 똑같은 것이 있었던 것일까? 잘 알 수 없다.

또 개구리나 거북에게 곡예를 시킨 것도 있다. 남송의 저우미(周密)의 기록에 의하면, ‘수희(水嬉)’라 불렸다. 큰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작은 징을 때리며 그 안에 있는 거북이나 자라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이 떠올라 소도구를 머리에 쓰고 춤을 춘 것이다. 춤이 끝나면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별게 아니라고 말하면 그 뿐이겠지만, 잘 훈련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원대의 타오쭝이(陶宗儀)도 《철경록(輟耕錄)》이라는 책 속에서 역시 잘 훈련시켰다고 여기고 있다.

그가 보았던 곡예 가운데에는 좀 더 자잘한 것도 있다. 7단계의 크기로 분류된 거북이 큰북의 신호에 맞춰 가장 큰 것을 아래로 해 [그 위에 다른 거북들이] 겹쳐서 탑을 쌓는다. 바로 어미 거북 위에 새끼 거북을 쌓는 곡예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꼬리를 꼿꼿이 뻗쳐서 ‘오구첩탑(烏龜疊塔)’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큰개구리가 대 위에 앉고 다른 작은 여덟 마리가 네 마리씩 나뉘어 늘어서 있는데, 큰 것이 울면 그것에 맞춰 다른 여덟 마리가 울었다고 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차례로 큰개구리 앞에 나가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개구리 가두 설법(街頭說法)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것은 유머러스했다.

그런 명절을 비추는 것이 등롱(燈籠) 불빛이었다. 궁성 문에는 몇 만 개의 등롱이 흔들리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만등회(萬燈會) 같았다. 도시 속에서 일시에 그만큼의 불빛이 켜졌다면, 당연히 백업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송대가 되어 두드러지게 발달한 상업 경제는 전국적으로 특산물을 탄생시켰다. 게다가 그것들은 전국에 퍼져 있는 교통망을 통해 수도로 모였다. 당시 카이펑으로 화물을 내보낸 산지(産地)는 수천 개 소였다 하고 상인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상세무(商稅務)는 조금 앞선 시기인 신종 희녕(熙寧, 1068~1077년) 연간에 1,793개 소를 헤아렸다. 정월 대보름날 밤의 불빛은 당시의 중국 경제력을 보여주는 불빛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도 이 무렵 몇 가지 연중행사가 확립되어 있었다. 지금 《동경몽화록》을 펼쳐 보아도, 갖가지 연중행사가 점철되어 있다. [지금까지] 대충 훑어본 정월의 행사로 시작해, 절기마다의 명절이 있다. 성묘하는 청명절이나 일본에서도 성행하고 있는 칠석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서울내기들은 그때마다 왁자지껄한 경사(慶事)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