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소설의 진실 혹은 허위

양계초의 희망과는 달리 상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소설쓰기는 유희지향적이며 상업주의적 층위가 지배했습니다. 여흥을 위한 소설은 대단히 성행하게 되는데 그 한 가운데 우뚝 선 존재가 바로 포천소包天笑(1876~1973)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포천소는 교사․편집자 등의 직업을 거쳐 전문적인 소설가․소설번역가로 활동하게 되는데, 직업 작가의 초기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포천소의 대표 단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일루마一縷麻」(「삼베 천 한 가닥」)는 전근대적 혼인 풍습에 의해 희생되는 한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시보小說時報』 제2기(1910년 10월)에 발표된 이 이야기는 당시 큰 인기를 누렸는데, 이후 월극越劇(절강浙江 지방의 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매란방梅蘭芳에 의해 ‘시장신희時裝新戲’(경극京劇을 개량하여 동시대의 사건을 제재로 다룬 작품들)로 각색되어 북경․천진天津 등지에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포천소는 이 이야기의 출처가 민간에 있음을 밝히면서 “내 생각에 이 이야기는 다소간 전기傳奇의 색채를 띠고는 있었지만 습속을 이룬 맹혼盲婚(당사자들의 대면 없이 부모에 의해 정해지는 혼사)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에 족하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기에 한편의 단편소설로 엮어냈다”고 쓰고 있습니다. 과연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관철되었을까요. 우선 「삼베 천 한 가닥」의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색을 겸비하고 근대적 교육까지 받은 모 여사에게는 어렸을 때 정해진 배필이 있습니다. 여사의 어머니가 갑자기 죽자 약혼남이 문상을 옵니다. 그런데 부모끼리 정해놓은 이 약혼남이 바보천치임이 밝혀집니다. 여사에게는 마음에 둔 정인情人이 있으며 전근대적 혼사에 반발합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아버지는 혼사를 서둘러 강행합니다. 효성스런 여사는 이에 굴복합니다. 여사는 시집가자마자 병에 걸립니다. 바보 남편의 간병으로 여사는 회생하지만 남편은 병이 옮아 죽습니다. 여사는 바보 남편의 사람됨에 감복하여 혼전 정인의 손길을 거절하고 수절을 결심합니다.(【부록】 「삼베 천 한 가닥」)


경극 『일루마』의 여주인공(매란방 분)

저자가 밝힌 동기에 따른다면 이 이야기에서는 <자각한 여성>과 <전통적 가치관>이 갈등의 주요 대립항을 이루게 됩니다. 이야기에서 ‘전통적 가치관’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여인의 아버지이며 이들 사이의 대립은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침 상해에서 발간되는 『시보時報』에 「신부의 명이 박하기도 하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실렸다. 마리아라는 여인이 멋진 청년 찰스와 약혼을 했는데 뒤에 찰스가 부상을 입어 불구가 되었지만 마리아가 끝내 그를 버리지 않고 결국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읽고는 아주 기뻐하면서 이를 통해 딸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는 여사에게 유럽의 풍조가 수입된 이후 미풍양속이 사라져 정절을 지키는 것이 낡은 관념이라고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서양 여인 역시 고통을 감내하며 운명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여사는 그 소설을 읽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친이 “그 사람됨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여사가 대답했다:

“마리아는 정이 깊은 사람입니다. 결코 남자가 불구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으니까요. 정절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의 귀감이 될 법하지 않느냐? 요즘에는 신학문이 발흥하여 옛 도덕은 땅에 팽개쳐져 있다. 이혼을 부추기는 풍조가 일어 부부 관계를 무슨 여관집에서 만나 헤어지는 사이쯤으로 여기는데, 한 번 혼인하면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은 케케묵은 먼지와 같은 말이 되어버렸지. 배우자 사이에 어찌 어긋나는 부분이 없을 수 있겠느냐만, 다 형편에 맞추어 사는 것이지.”

여사가 말했다:

“아버지 가르침은 참으로 맞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마땅히 사안을 분별해서 살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우선 마리아와 찰스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중매쟁이의 한 마디에 따라 억지로 두 사람을 맺어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다음, 찰스는 비록 불구가 되기는 했지만 정신은 또렷했습니다. 바보는 아니었으니 서로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즐거움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러니 마리아가 찰스를 버리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혼인 습속은 야만스러워서 아무나 골라 짝을 지워줍니다. 결국 결혼이란 평생을 좌우하는 일인데, 어찌 죽을 때까지 고통을 지고 가겠습니까? 그러니 이혼이라는 것에 대해 저는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딸아이의 속마음을 알고는 거듭 탄식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다.

여인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반면, 아버지는 “유럽의 풍조가 수입된 이후 미풍양속이 사라져 정절을 지키는 것이 낡은 관념이라고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우려를 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딸의 운명에 대해 안타까워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약혼자가 ‘바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자각한 여성>과 <전통적 가치관(혼인 제도)> 사이의 대립은 서사적 힘을 가지고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통적 혼인 제도에 의해 여인에게 강제된 배필이 ‘바보’라는 점이 부각됨으로써 <근대적 여성 ↔ 전통적 가치관(혼인 제도)>의 대립 구도는 모호해 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과연 정해진 배필이 바보가 아니었다면 여인이 이 혼사에 대해 그토록 반발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설정이지요. 모호한 대립 구도에 의해 이끌어져 간 서사가 여인이 바보 신랑의 깊은 인간적인 정에 감복해 수절을 결심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인은 ‘효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전통적 혼인 제도>와 타협하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마치 ‘참된 사랑’을 찾은 것처럼 묘사되지만, 결국 <자각한 여성>은 자신이 자각했던 스스로의 욕망을 포기하고 <수절>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전통적 혼인 제도>와 화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자각한 여성>이 선택할 수 있었던 대상, <근대적 연애와 혼인>을 체현하고 있다고 할 혼전 연인은 마치 여사의 비운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비정하고 파렴치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풍기게 됩니다.

이 짤막한 이야기는 일종의 서사의 균열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기만 한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전통적인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 사이의 갈등이 양자 모두 무화되는 쪽으로 타협 혹은 거짓 화해가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 화해의 와중에 있는 것이 바로 <대중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균열은 “습속을 이룬 맹혼盲婚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에 족하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기에”라는 서사 의도에 이미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 관념에 대한 ‘비판’은 대중의 취미와 세계관에 호응하면서 비극성의 극대화를 통해 ‘감동’(즉 재미)을 주려하는 서사 전략에 묻혀 결국 서사의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서사의 균열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지요.

위에서 인용한 대목을 통해 보건대 여인은 사랑과 혼인 그리고 이혼에 대한 입장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주체로서 서고자 하는 의지를 단호히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표명된 구호에 불과합니다. 서사 곳곳에 침투해 있는 것은 전통적인 문언문 연애담의 전제들이며 이는 그람시의 말을 빌면 ‘과거의 모든 역사 단계로부터 전수된 편견들’의 집합으로서의 <상식적 차원>의 여성관입니다. 두드러지는 점들만 나열해 봐도 다음과 같습니다: <여인은 아름답고 총명하다>; <여인은 부모 중 한 쪽을 잃어 딱한 처지에 처해있다>; <여인은 결혼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여인은 효심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다>; <여인은 정에 약하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여인은 총명하며 근대적인 교육을 받아 여성으로서의 욕망에 대해 자각적>이라는 성향은 여인의 비극적 운명을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 이상의 적극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여인이 총명하다는 점과 학문이 깊다는 점을 비극을 가중시킨 요인으로 배치시킴으로써 <무능이야말로 여성 최고의 덕목>이라는 해묵은 관념을 저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는군요. 이때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여인이 시집에 들어가자마자 ‘병’에 걸리고 그 결과로 간병하던 신랑이 그 병에 옮아 죽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자각한 여성>이 결국 <전통적 가치관(혼인 제도)>의 또 다른 구현인 ‘바보 신랑’을 병들어 죽게 한다는 발상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이 이야기를 엮게 된 동기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상식적인 여성관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맹혼盲婚’의 비극성을 드러내겠다는 의도는 기실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 관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상해에서 유통되던 소설들이 양계초의 희망처럼 ‘신민新民’을 만들어내는 담론 공간이 아닌 다른 어떤 담론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담론의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서사 내/외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기에 결국 이 시대 상해의 소설은 오사 세대가 극복하고자 한 대표적인 ‘구시대’의 문학이 되어버리고 만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런 담론 공간 속에서 우리는 근대 중국이 배태되던 당시의 다단한 가능태들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글쓰기 문화를 그 ‘한계’를 통해 운위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요. 어떻게 읽느냐, 무엇을 읽느냐에 따라 더 많은 것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합니다.


1910년대 상해의 가장 ‘잘 팔리는’ 소설 잡지였던 『토요일(禮拜六)』. 우아한 문체로 쓰여진 20세기 판 ‘재자가인才子佳人’ 소설이 위주였다.

포천소가 편집책임자로 있던 『소설대관小說大觀』 창간호(1915)의 삽도. 이런 부류의 소설잡지의 성격을 가늠케 해준다. 모델들은 모두 당시의 유명한 기녀.

“근대 중국의 글쓰기 문화 지형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