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 동아시아 국가 간의 인적교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관료, 지식인들에게 사행(使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기회였고, 세계를 보는 창(窓) 이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 사신들이 중국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던 인문유대(人文紐帶)의 상징공간, ‘유리창’을 소개하겠습니다.
조선 선비, ‘자제군관’으로 해외 견문
17세기 중반~18세기 유럽에서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대여행)가 성행하게 됩니다. 영국, 독일 등 유럽국가 귀족의 자제들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으로 견문 목적의 여행을 떠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일종의 수학여행입니다.
사람들은 정주지(定住地)를 벗어나 여행이나 관광을 통해 타문화를 경험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입니다. 관광(觀光)이란 용어는 “관국지광이용빈우왕”(觀國之光利用賓于王)이라는 〈주역〉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나라의 훌륭한 문물(文物)을 관찰하거나 본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 문인들은 평소 문헌으로 접했던 동경의 세계, 즉 대국의 풍정을 유람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사행단에 참여하는 것을 ‘일생의 기회’로 생각하였습니다.
유럽에 그랜드 투어가 있었다면, 그 무렵 조선은 어땠을까요? 바로 사행단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행단의 인적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는데요, 바로 자제군관(子弟軍官)입니다. 자벽군관(自辟軍官)이라고도 하는데요, 이들은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삼사(三使 : 정사, 부사, 서장관)의 자제(子弟)나 친지, 문사 중에서 견문을 목적으로 참여시켜 삼사를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행단의 정관(正官)이 아니었기에 사행단의 일정과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명승을 유람하기도 했습니다.
자제군관 자격으로 사행에 참여했던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과 같은 이들은 연행에 참여하는 심경과 기대감을 “장유(壯遊: 장한 뜻을 품고 먼 곳을 여행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홍대용은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각기 쓸 곳을 점지하는데, 자신 같은 선비에게는 중국 여행이나 시키는 모양이다”라고 하면서 연행에 참여하는 것이 이미 하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을 펼쳐 보입니다. 연행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친 것입니다. 박지원 역시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유리창을 둘러보다가 ‘나를 알 아줄 천하의 지기를 만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연경유람 1번지, 유리창
조선 사행단이 경험한 연경(북경)의 명소는 명・청대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18세기 조선 사행단의 연경유람 1번지는 단연코 정양문 밖의 유리창(琉璃廠)이었습니다.
유리창은 본래 원대(元代)부터 궁전과 사찰 건축물에 사용되는 유리기와를 굽는 곳이었습니다. 유리창은 융복사(隆福寺)와 더불어 장시(場市)가 발달하였는데, 청대 들어서 서적, 골동품, 문방사우, 서화를 파는 점포가 늘어나면서 문화상업 지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강희제 때 시작된 대규모 국책출판사업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편찬과 건륭제의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으로 이어지면서 유리창은 학술·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서책이 몰리니 학자와 문인이 드나들게 마련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올라온 거인들이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머물기도 했던 곳인데, 이곳을 찾는 조선의 사신들과 지식인들과의 조우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서로를 알아주는 관계, 유리창은 조선과 중국의 문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교유했던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중국의 서책을 구입하는 일은 조선 사행단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박제가, 유득공 등 규장각 검서관은 정조의 명으로 유리창에서 대량으로 서적을 구매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리창 서점 주인들의 인맥과 도움으로 구하기 어려운 서적들을 구입하기도 하는 등 유리창은 서적의 구매 활동과 문인들의 인적교류를 통해 당대의 문화정보를 공유하고 습득하는 중요한 문화교류의 창구 역할도 하였습니다.
1770년 무렵 조선인들이 드나들었던 선월루(先月樓) 자리에 지금은 현대식 중국서점이 들어서 있습니다. 2층 서고에는 과거의 서책이 옛 모습대로 꾸며져 있습니다. 옛 공간에서 옛사람들의 행적을 추체험하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사신들의 행적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면 유리창 서쪽의 장춘사(長春寺)로 가 보시길 권합니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등 조선 사신이 들렀던 곳이기도 하지만, 옛 유리창 서책 방의 현판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꾸며 놓아 참고가 됩니다.
유리창에 ‘한·중인문유대기념비’ 세워야
유리창과 일대의 많은 후통(골목)은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서호수, 유득공 등 조선의 북학파 지식인들이 청 문인들과 필담 시문을 나누고 사유를 펼치는 장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이들은 상호 관심사인 학술, 문화, 예술, 철학에 이르는 다방면의 담론들을 자유롭게 교환하고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양매사가(현재 양매죽사가)의 육일루에서 황포 유세기 등과 교유했는데요, 유리창 서점의 번화한 실상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박제가 역시 당대 최고의 문사이자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자인 기효람(紀曉嵐)과 교류하였고, 관음사에 기거하는 양주팔괴 나빙(羅聘)과 교류하였는데, 그 현장이 모두 남아 있습니다.
유리창에서의 조·청 문인 교류사에서 담헌 홍대용의 교유는 두드러집니다. 홍대용은 유리창 인근의 건정호동(乾淨胡同, 현 甘井胡同)에서 중국의 지식인인 엄성, 육비, 반정균과 필담 교류하고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을 남겨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삼대(三代)에 걸쳐 이어진 홍대용과 엄성家의 교류는 문인교류의 상징이 되었고, 우정론(友情論)의 모범 격이 되어 후대의 문인교류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숨을 거두던 날 저녁이었다. 나를 불러 침상 옆에 앉게 하고는 이불 속에서 홍대용의 서신을 꺼내 읽어달라고 하였다.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또 `조선의 먹’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는 그윽한 `묵향’을 맡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 <일하제금합집>(주문조) 序文에 기록된 엄성의 임종 장면.-
홍대용이 엄성 일행과 교류를 위해 7차례나 드나들었던 건정동 골목은 그대로이나 천승점(天勝店) 여관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골목 어귀에 작은 표석이나 기념물이라도 세워 ‘한·중 인문유대의 상징공간’으로 되살렸으면 싶습니다.
18~19세기 초,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국제정세가 급변하지만, 한·중 인문유대는 여전히 지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건륭 시기의 <사고전서> 편찬이 마무리되자 유리창의 기능도 점차 쇠퇴하게 되면서 인근의 보국사, 법원사, 연성공저, 송균암, 회관(會館) 등으로 교유 공간이 확대됩니다. 옹방강, 완원과 같은 석학들과 교류했던 추사 김정희는 법원사 뒷골목의 사공사(謝公祠) 일대에서 중국의 문인들이 준비한 전별연을 받았습니다. 오는 정이 있으니, 가는 정도 있게 마련입니다. <丙寅燕行歌>를 남긴 홍순학(洪淳學)의 경우, 송균암(松筠庵)에서 조선 측에서 조선 음식을 만들어 중국 문인들에게 답례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한·중 인문유대의 한 풍경입니다.
* 연재되고 있는 본 기행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단행본 <연행노정기>(실학박물관, 2019)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책은 실학박물관 뮤지엄숍(031-579-6025)을 통해서만 구입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