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에서 눈을 만나>시에 대한 응제시苑中遇雪應制/당唐 송지문宋之問
紫禁仙輿詰旦來 궁중에서 황제의 수레 새벽에 나오니
青旂遙倚望春臺 푸른 기가 멀리 망춘대 옆에 서 있네
不知庭霰今朝落 뜰의 눈이 오늘 아침 내린 줄 모르고
疑是林花昨夜開 숲의 꽃이 어젯밤에 피었는가 하였네
응제(應制)는 황제나 왕이 시를 지어라는 명을 내리면 이에 응하여 지은 작품을 말한다. 여기서 ‘제(制)’는 본래 황제의 명령을 뜻하고 ‘응(應)’은 그 명을 받든다는 의미이다. 제목을 내려주는 경우도 있고 소재나 상황만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시와는 다르게 이 시를 주문한 사람과의 특수한 맥락을 고려하고 읽어야 한다. 이런 작품들은 대개 그날 시를 짓는 상황에 따라 주제는 이미 정해지게 마련이므로 작품의 승패는 주로 수사(修辭)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적절하고도 뜻이 좋은 고사를 쓰거나 조어(措語), 즉 엮어낸 말이 상서로운 것이어야 호평을 받는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경우 아부로 일관되어 있는 작품이 많다.
송지문(宋之問, 656~712)이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상고하지 못했으나 칙천무후나 중종 때 지어진 것은 분명하다. 송지문이 심전기(沈佺期)와 함께 당시 궁정 시인으로 활약했기 때문이다.이 시는 《문원영화(文苑英華)》에 <봉화유원우설응제(奉和游苑遇雪應制)>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원에 놀러 갔다가 눈을 만나다>라는 시를 받들어 화답한 응제시’라는 제목을 지금의 제목으로 축약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같이 지은 이교(李嶠)와 유헌(劉憲) 두 시인의 시가 남아 있는데 내용을 보면 어주도 내려주고 한 모양이다. 송지문이 이런 문인들과 함께 새벽에 어가를 호종하여 망춘궁으로 가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송지문은 궁궐 밖으로도 어가 행렬을 수행하여 지은 시들이 그의 시집에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서 과거로 인재를 뽑으면 문벌이나 성적 등을 고려하여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에 배속하는데 이를 분관(分館)이라 한다. 이때 모든 부분이 가장 우수한 사람을 승문원에 분관하는데 이 승문원은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다루는 곳이다. 외교 문서를 다루는 곳에 가장 우수한 인재를 배치하는 것은 중국의 황제나 예부에 문서를 올릴 때 그 양식과 특수한 용어를 잘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문장을 잘 지어내는 문필 역량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은 문학 능력이 작가 등으로 출세하지 않으면 순수 문학을 하는 영역으로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외교와 어명에 따른 수응 등으로 출세의 첩경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귈 때는 시를 지어야 하고 국정에 의견이 있으면 상소나 차자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시작 능력이나 공거문(公車文), 즉 상소문체 등에 능하지 않으면 행세는 고사하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한글에 비해 한문을 존중한 풍토는 실은 이런 현실적 필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금(紫禁)은 황제가 사는 궁궐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紫)’ 자가 들어간 것은 황제의 별자리가 자미원(紫微垣)이기 때문이며 금(禁)은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하는 궁궐 특유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선여(仙輿)는 황제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힐단(詰旦)은 동이 터오는 새벽을 말한다. 망춘대(望春臺)는 당시 망춘궁(望春宮) 안에 있던 대(臺)를 의미한다. 망춘궁은 지대가 상당히 높아 앞으로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청기(青旂)는 청기(靑旗)와 같은 말로 황제의 어가 행렬에 의장으로 사용되는 깃발을 의미한다. 하필 색깔이 파란 것은 맹춘, 즉 이른 봄에는 청색의 깃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황제가 멀리 바라보고 싶어 어가를 타고 망춘대로 와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상서로운 눈이 내린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런 눈이 올 때 응제 작품이 많다. 시인은 짐짓 낯설어하는 표정으로 오늘 아침에 눈이 내린 줄 모르고 어젯밤에 꽃이 핀 줄 알았다고 말했으니 눈을 보고 기분이 좋았을 황제를 더욱 기쁘게 했을 것이다.
오늘은 일종의 궁정 문학을 감상해 보았는데 이런 형식의 시도 의외로 상당히 많다. 이 시처럼 즉흥적으로 지어 바친 작품도 있지만 특별한 날, 예를 들면 왕실의 경사나 적을 토벌한 일 등 중요한 날에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 우리나라도 그런 예가 무수히 많아서 어떤 경우는 한양에 대해 101운(韻)으로 시를 지어 바치게 하거나 평양의 명승에 대해 시를 지어 바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몇 달,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또 중국으로 사신을 가면 그 행로나 견문을 글로 적어 바치게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연행록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는 그 전체를 시로 작성한 것도 있다. 그러니 왕명에 의해 지어 바친 시도 그 성격과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