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서왕모는 요지에서 잔치를 열고
천랑성은 달나라 궁전에서 청혼하다
西王母瑤池開宴, 天狼星月殿求姻
여선(女仙)은 당새아(唐賽兒)인데, 달나라 선녀였다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이라고 한다. 연왕(燕王)의 군대가 남경으로 내려올 때 당새아는 의병을 일으켜 황제를 보좌하며 20년 남짓 건문제(建文帝)를 받들었다.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서술하려 하는데 정식 역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여선외사(女仙外史)》라고 했다. 그런데 당새아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선녀라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는가? 첫머리의 이 말은 너무 허황된 듯하여 독자들이 믿지 않을 듯하니, 이제 지극히 믿을 만한 고증을 서론으로 삼아 얘기해 보겠다.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후사(後嗣)를 잇기가 곤란해지자 소령궁(昭靈宮)을 지어서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자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여러 신선들에게 물었다.
“누가 송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는 천자를 위해 인간 세상에 내려가겠소?”
문무(文武) 양쪽 반열에서 아무도 응답하는 이가 없는데 오직 적각대선(赤脚大仙)만이 미소를 지었다. 이에 옥황상제가 물었다.
“웃는 것은 결국 감정이 있다는 것을 테지요?”
그러면서 적각대선에게 인간 세상에 내려가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어의(御醫)는 고칠 방도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궁궐 대문에 늙은 도사 하나가 나타나서 자기가 태자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진종 황제가 그를 불러들여 살펴보게 하자 도사가 태자의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울지 마시오, 울지 마시오! 차라리 그때 웃지 마시지 그러셨소? 문(文)에는 문곡성(文曲星)이 있고 무(武)에는 무곡성(武曲星)이 있소. 그만 우시오, 그만!”
그러자 태자가 즉시 울음을 멈췄으니, 이 분이 바로 인종(仁宗) 황제이고 이 도사는 바로 장경성(長庚星) 즉 태백금성(太白金星)이다. 그가 말한 ‘문곡’은 문언박(文彦博)을, ‘무곡’은 적청(狄靑)을 가리키는데, 모두 인종 황제를 보좌하여 훌륭한 다스림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한 장수와 재상이다.
신선이나 부처가 된 이들은 모두 무정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적각대선이 한 번 웃는 바람에 바로 감정의 인연이 생겨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란 것도 여러 가지가 있다. 기뻐서 또는 분노해서 생기기도 하고 은혜나 사랑, 원수나 원망 대문에 생기기도 한다. 각기 그 원인을 따르다 보니 수많은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가지 영웅호걸과 충신, 열사를 보자. 오원(伍員)은 오(吳)나라를 흥성시키고 초(楚)나라를 멸망시켰고, 장량(張良)은 한(韓)나라를 위해 복수했으며, 무신(武神) 관우(關羽)는 황건적(黃巾賊)과 조조(曹操)를 토벌했고, 장아양(張雅陽)은 의병을 일으켜 외적에 항거했으며, 곽자의(郭子儀)는 당 왕조를 다시 세워 놓았고, 악비(岳飛)는 금(金)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는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모셔오겠다고 맹서했으며, 승상(丞相) 문천상(文天祥)은 의병을 일으켜 황제를 보위했다. 그리고 죽은 후에 신령한 존재가 된 이들이 역사책에 기록된 것만 하더라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건문제가 나라를 물려준 뒤에도 여러 신하들이 순절했지만 첨도어사(僉都御史) 경청(景淸)은 거짓으로 굴복한 척하면서 옷 속에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다가 영락제를 찌르려 하기도 했다. 천문(天文)을 관장하는 흠천감(欽天監)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문곡성이 황제 자리를 범하려고 하는데 상황이 아주 시급하여 그 색깔이 적색이라고 했다. 그런데 경청이 마침 붉은 조복(朝服)을 입고 있었으니 흠천감의 상주가 얼마나 뚜렷한 효과를 보였는지 알 수 있다. 소식(蘇軾)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태어나는 것에도 유래가 있고
죽는 것도 까닭이 있기 때문에
주(周)나라의 대신(大臣)이 된 신백(申伯)과 여후(呂侯)가
사악(四嶽)으로부터 태어났고,
상(商)나라의 대신이었던 부열(傅說)은
기미성(箕尾星)이 되었던 것이다.
其生也有自來, 其死也有所爲, 故申呂自嶽降, 傅說爲箕尾.
이것은 변함없는 도리인지라 이상하게 여길 만한 게 아니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소(柴紹)의 아내는 낭자군(娘子軍)을 이끌고 기의(起義)했고, 주서(朱序)의 모친은 부인성(夫人城)을 쌓아 적에게 대항했으며, 이의(李毅)의 딸은 몸소 녕주(寧州)의 인장을 수령하고 오령이(五苓夷)를 크게 격파했다. 고량군(高凉郡)의 승부인(冼夫人)이 무성(婺星)이 되고, 요(遼)나라의 소태후(蕭太后)는 무수(婺宿)가 되었으며, 당나라 측천황제(則天皇帝)는 대라천(大羅天)의 신녀(神女)가 되었으니 이것들도 모두 기록으로 전해 오는 것인지라 어찌 황당무계하고 망령된 소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본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도교 경전에 따르면 천상에 왕모(王母)라고 불리는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금선(金仙)이 요지(瑤池)에 살고 있다고 했다. 요지는 동쪽 하늘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지(西池)라고도 부르며, 왕모도 서모(西母)라고 불리기도 한다. 천상에도 각기 경계가 있어서 동쪽 하늘은 도교의 조사(祖師) 삼청(三淸)과 여러 신선들이 거처하고, 서쪽 하늘은 석가여래와 여러 보살, 아라한(阿羅漢)들이 거처하며, 북쪽 하늘은 현무대제(玄武大帝)와 여러 신장(神將)들이 다스리고,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궁궐은 중앙에 있지만 남쪽 하늘을 통할(統轄)한다. 남쪽 하늘에는 비록 남극노인(南極老人)과 남두성관(南斗星官)이 있지만 모두 현천상제의 통할 범주에 포함된다. 상제는 생명을 아끼기 때문에 중천에 거처하면서 남쪽 하늘을 다스리는 것은 만물을 보살펴 기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현천상제는 우레와 벼락을 부리는 신장을 통솔하여 숙살(肅殺)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북쪽 하늘에 거처한다. 부처는 생기가 없이 적멸한 상태이기 때문에 사방을 극락으로 삼는다. 도가에서는 ‘이기(一炁)’ 즉 우주의 기운과 동화된 상태가 되어 불로장생하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동방을 차지하니, 기운을 취함으로서 생명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서왕모가 거처하는 온갖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누각과 궁궐은 요지 물가에 있다. 이 연못에 들어 있는 것은 인간 세계의 물이 아니라 옥(玉)의 정수를 녹여 만든 것으로서 마치 술이나 음료수처럼 찰랑거린다. 어허, 그게 무슨 말이오? 고운 옥을 불에 넣으면 더욱 단단해지고 결국은 돌이 재가 되듯이 변해 버릴 텐데 어떻게 녹아서 물처럼 된다는 것이오? 쯧쯧! 근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시구려. 고운 옥은 원래 돌의 정수가 응결된 것인지라 돌 속에 다듬지 않은 옥[璞]이 들어 있지 않소? 그 정수는 응결되어 옥이 될 수 있다면 옥은 정수로 변할 수 없는 것이오? 조개에서 얻는 진주가 달빛을 받으면 진액(津液)으로 변하듯이 모든 사물은 서로 감응하는 곳이 있어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추측할 수 없는 것이오. 예를 들어서 신선 세계의 술을 경장(瓊漿)이니 옥액(玉液)이니 하고 부르는데 틀림없이 모두가 경옥(瓊玉)에서 변화한 정수가 아니겠소? 설마 산속의 신선들이 세속의 누룩과 곡식을 발효하여 술을 담그겠소?
그 요지의 북쪽에 세 개의 대전(大殿)이 있으니 중앙에 있는 것은 벽도전(碧桃殿), 동쪽에 있는 것은 청가(靑駕), 서쪽에 있는 것은 석린(石磷)이라고 부르는데 셋 모두 사물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요지의 남쪽에 있는 벽도수(碧桃樹)는 높이가 여든 심(尋) 남짓인데, 세속에서 반도(蟠桃)가 일만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다고 하지요? 아무튼 그 나무는 중앙에 있는 대전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데 구불구불한 가지에 영롱한 잎이 울창하게 우겨져 있어서 그 기세가 마치 꿈틀거리는 규룡(虯龍)과 같으니 인간 세상에는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보리수나 달나라에 있는 계수나무인 단계(丹桂), 동해 삼신산(三神山)에 있는 주림경수(珠林瓊樹) 즉 아름다운 숲의 옥 같은 나무와도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그것이 요지의 물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그 잎과 꽃이 모두 옥의 정화를 지니고 있어서 신선 세계 나무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열리는 반도는 하나만 먹어도 수명이 하늘과 나란해지고, 만약 세 개를 먹으면 만 겁(劫)의 세월을 넘겨 살 수 있다. 서왕모는 복숭아가 익는 날 잔치를 여는데 부처와 보살, 도교의 시조, 천존(天尊)과 상제, 그리고 지위가 높은 신선들만 초청하며 그 외의 모든 신선 세계 관리들이나 바다의 섬과 동부(洞府)에 있는 산선(散仙)들, 두우궁(斗牛宮)과 이십팔수(二十八宿)를 포함한 별신들은 모두 참여할 수 없다. 그래서 세성(歲星) 동방삭(東方朔)이 매번 훔쳐 먹으러 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밤은 벽도가 종전보다 두 배나 무성해서 산선들과 별신들도 많이 초청을 받아서 만 겁 이래 가장 번성한 모임이 되었다.
당시에 부처와 신선들이 차례로 찾아왔고, 오직 상제만이 가장 나중에 도착했다. 상제가 탄 수레가 멀찍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초록빛 경옥(瓊玉)으로 만든 손수레로서 위쪽에는 자운개(紫雲蓋)를 펼친 모습이었다. 별신들이 깃발을 든 채 앞길을 인도하고 화려한 깃털 부채가 뒤쪽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러 신선들이 엎드려 맞이했다. 상제는 먼저 석가여래와 삼청신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원(元)나라의 운세가 다했는데 백성들이 세 차례의 전란을 두려워하는지라 이미 오행(五行)의 금(金)에 해당하는 누수(婁宿)를 아래 세상으로 내려 보내 전란을 평정할 수 있게 했는데, 오늘 또 천랑성(天狼星)에게 내려가라고 분부하면서 백성들 가운데 살육을 당할 이들이 5백만 명 남짓이 되게 하라고 했소이다. 짐이 책과 문서기록을 검토하여 인간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선한 일을 하거나 선한 생각을 한 이는 모두 특별히 고려해 주도록 했소이다.”
석가여래가 합장하며 말했다.
“선재(善哉)! 훌륭하오! 상제께서 생명을 아끼는 덕성을 지니셨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서왕모가 안으로 모셔서 자리를 권했다. 남쪽 칸의 정중앙은 석가여래가 앉고 그 왼편에는 여러 과거불(過去佛)들이, 오른편에는 여러 미래불(未來佛)들이, 앞쪽에는 도교의 삼청신들이, 그리고 동서 방향에는 모두 지위 높은 보살들이 앉았다. 동쪽 칸에는 상제가 남쪽을 향해 앉고 그 왼편 즉 소위(昭位)에는 현무대제를 필두로 그 이하의 여러 천존들이 앉았으며, 오른편 목위(穆位)에는 청화제군(靑華帝君)을 필두로 그 이하의 여러 지위 높은 신선들이 앉았다. 서쪽 칸에서 남쪽을 향해 홀로 앉은 이는 남해대사(南海大士, 이하 ‘관음보살’로 번역함)이고, 북쪽을 향한 두 자리의 왼쪽에 두모천진(斗姥天眞)이, 오른쪽에는 구천현녀(九天玄女)가 않았다. 동쪽 방향의 첫째 자리에는 귀모천존(鬼母天尊)이, 서쪽 방향의 첫째 자리에는 천손직녀(天孫織女)가 앉았고 나머지는 태미좌부인(太微左夫人)과 구화안비(九華安妃), 소령부인(昭靈夫人), 관향부인(觀香夫人), 원전항아(月殿嫦娥), 위원군(魏元君), 허비경(許飛瓊), 단안향(段安香), 하선고(何仙姑), 마고(麻姑), 번부인(樊夫人), 왕태진(王太眞), 완영화(阮靈華), 주경영(周瓊英), 포도고(鮑道姑), 오채란(吳彩鸞), 운영(雲英) 등의 여선(女仙)들이었다. 서왕모도 자리에 함께 했다. 반도는 한 명에 하나씩 나눠주었지만 옥황상제와 삼청신에게는 각기 두 개씩 주었고, 유일하게 석가여래에게만 세 개를 주었다. 여기에 교리(交梨)와 화조(火棗), 설우(雪藕), 빙도(氷桃) 등 신선 세계의 과일을 덤으로 내놓았고 술은 경장(瓊漿)과 옥액(玉液)이 나왔으며, 단약으로는 강설단(絳雪丹)과 현상단(玄霜丹)이 나왔다. 석가여래가 반도를 손에 들고 게송(偈頌)을 읊었다.
복숭아는 만 년 만에 열매를 맺지만
사람은 백 년의 젊음을 누리지 못하지.
가련하게도 보배로운 배를 헛되어 여기나니
뉘라서 미망의 나루터를 건널 수 있으랴?
桃有萬年子, 人無百歲春.
可憐虛寶筏, 若個渡迷津.
그런 다음 복숭아를 쪼개 먹었다. 제자인 가섭(迦葉)은 옆에서 침을 흘리자 아난(阿難)이 흘겨보며 비웃었다. 석가여래는 즉시 복숭아 가운데 하나는 가섭에게, 다른 하나는 아난에게 주었다. 삼청신도 복숭아 하나를 금동(金童)과 은동(銀童)에게 주어 나눠 먹도록 했다.
그때 남극노인이 학을 타고 왔는데, 학이 날개를 펴고 빙빙 돌며 춤을 추면서 목을 내밀고 느리게 우니 마치 음절(音節)에 맞추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슴도 펄쩍 뛰며 ‘우우!’울다가 고개를 숙이고 땅에 엎드리니, 마치 불쌍히 여겨 달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남극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허! 이놈의 짐승들도 이렇게 좋은 것을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손톱으로 한 조각씩 떼어서 먹여 주었다. 관음보살도 옆에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에게 하나를 주니, 선재동자가 말했다.
“보살님, 연로하셔서 건망증이 생기셨나 보군요? 제가 서천으로 오는 길목에서 대왕 노릇을 하면서 당나라 삼장법사를 잡아먹으려 할 때 보살님께서 테[箍兒]를 던져 제 두 손을 묶어 버려서 도저히 풀 수 없게 되었는데, 복숭아를 어떻게 받습니까?”
관음보살이 여러 여선들을 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쇠처럼 둔하긴 해도 제법 총명하지요, 하지만 열심히 배우려는 마음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서 지금까지 두 손을 묶어 두고 있어요.”
여선들이 다들 “잘하셨어요!” 하고 칭송했다. 이에 관음보살이 손가락을 하나 펴고 가리키자 선재동자의 두 손이 풀려서 복숭아를 받았다. 하지만 다 먹고 나자 다시 두 손이 묶여 버렸다.
항아의 좌우에는 가장 아끼는 두 선녀가 있었는데 각기 이름이 소영(素英)과 한황(寒簧)이라고 했다. 항아가 반도를 세 조각으로 쪼개서 두 선녀에게 조금 작은 조각을 하나씩 주고 큰 조각은 자기가 먹었다. 서왕모가 그걸 보더니 시녀 동쌍성(董雙成)과 사장주(謝長珠)에게 물었다.
“남은 반도가 얼마나 되더냐?”
동쌍성은 항아에게 주려 한다는 것을 즉시 눈치 챘다.
“작년에는 열매가 적게 맺혔는데도 스무 개 남짓 남았지만, 올해는 많이 열렸는데도 열한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계집애는 너무 인색해! 그래도 하나만 가져오너라. 나머지 열 개는 남겨 두었다가 나중에 너희들이 나눠 먹으렴.”
동쌍성이 복숭아 하나를 골라서 가져오자 서왕모가 항아에게 주며 말했다.
“항아는 이제 멀리 작별해야 할 테니 특별히 하나를 더 선사하겠네.”
항아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잔치가 끝나면 작별인사를 할 거라는 뜻인 줄로만 알고 허리를 숙여 감사했다.
“부처님과 도교의 삼청신들께서도 두 개밖에 얻지 못하셨는데, 제 주제에 어찌 감히……”
그러면서 한사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러자 투전승불(鬪戰勝佛)이 큰소리로 말했다.
“신선들은 무정하다고 누가 그랬지? 내가 보기엔 속세의 평범한 인간들보다 더 낫구먼. 서왕모를 보시구려. 남은 반도를 항아에게만 주시는데, 정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면 어째서 나한테는 하나 더 주시지 않는 게지요?”
그러자 석가여래가 말했다.
“왕모께서 항아에게 반도를 주신 것은 예의상 그런 것이지 정감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지. 인간 세계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준 것과 마찬가지야. 오공, 너는 이미 부처가 되었는데도 어째서 아직도 옛날처럼 거칠고 경솔한 게냐?”
태상노군도 거들었다.
“저번 반도회에선 저 녀석 혼자 실컷 훔쳐 먹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밖에 먹지 못했으니 기분이 좋지 않겠지요. 싸우려 드는 게 이상할 것도 없소이다.”
투전승불이 피식 웃었다.
“내가 부처가 된 것은 도적이 벼슬아치가 된 것과 마찬가지인데, 오늘 아주 제대로 맞수를 만났군!”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서왕모와 여러 신선들도 미소를 지었다. 다만 석가여래의 송별연이라는 말이 서왕모가 멀리 작별한다고 했던 말과 맞물리는지라 마음속에 의혹이 가득 차 있던 항아만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때 관음보살이 말했다.
“이 반도는 왕모께서 꼭 주셔야 하고 항아도 꼭 받아야 하는 거니까, 사양하면 안 되지.”
어쩔 수 없이 반도를 받고 나자 항아가 관음보살에게 고개를 숙여 절하며 말했다.
“저는 늘 여래님께 귀의하고 싶었지만 아끼는 머리카락을 갑자기 자르고 싶지 않아서 정말 부끄럽사옵니다. 이제 보살님께 귀의하고자 하오니 미래의 일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미래를 알고 싶으면 먼저 과거를 분명히 알아야 하니, 네 스스로 생각해 보렴.”
항아는 더욱 그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다시 고개를 숙이며 간청했다. 이에 관음보살이 슬쩍 단서를 비쳐주었다.
“항아야, 달로 도망치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니? 당시 왕모께서 유궁국(有窮國)의 군주인 후예(后羿)에게 단약을 하사하셨는데, 너는 왕비의 신분인데도 그 단약을 훔쳐 먹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몸이 되어 달나라로 들어갔지. 다만 후예와 애정의 인연이 다하지 않아서 나중에 정해진 운수가 닥칠 터인지라,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안 돼.”
항아는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인연은 정감에서 시작되고 정감도 인연에서 시작된다고 했사옵니다. 오롯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애정의 인연도 양쪽 모두 없어지겠지요. 저는 달나라 궁전에서 수천 년을 청정하게 수행하여 애정의 인연도 이미 없앴는데 어디서 다시 시작될지 모르겠사옵니다.”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좋은 인연을 ‘정(情)’이라 하고 나쁜 인연을 ‘얼(孽)’이라고 하지. 정연(情緣)은 쇠와 자석의 관계와 같아서 만나면 반드시 합쳐지게 되는지라 사람이 억지로 합치지 못하게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늘도 그렇게 할 수 없단다. 얼연(孽緣) 쇠와 부싯돌의 관계와 같아서 만나면 반드시 부딪혀 합치게 되니, 그것을 일컬어 죄악[孽]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거기에 빠지지만 신선은 그 바깥에 초월해 있는 게야. 너도 이 말을 꼭 기억해 두렴. 나중에 당연히 증명될 테니까 말이야.”
석가여래가 말했다.
“선재! 훌륭하도다! 보살께서 혼인의 인연에 대해 설명해 주었구나.”
그런 다음 석가여래가 서왕모에게 합장하여 잔치를 열어 준 데에 감사하자 여러 보살들과 신선들도 따라서 감사 인사를 했다. 인사가 모두 끝나자 먼저 석가여래와 삼청신, 상제가 떠나고 나서 모두들 차례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오직 항아만은 서왕모 곁은 떠나기 아쉬워하면서 대삼 머리를 조아리며 미래의 일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서왕모가 이렇게 예시해 주었다.
“미래는 모름지기 현재와 같나니 부디 오늘 모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항아는 절을 하며 공손히 말씀을 받들고 나서 두 마리 하얀 난새[素鸞]가 끄는 오색구름을 탄 채 두 선녀를 거느리고 천천히 달나라 광한궁(廣寒宮)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달려들어 항아를 안아 납치하려 했다. 하얀 난새는 신령한 새였기 때문에 누군가 못된 짓을 하려는 것을 알아채고 날개를 측면으로 퍼덕이며 날아서 물러났다. 그 바람에 그 사람은 두 선녀를 덥석 안는 꼴이 되고 말았는데, 그는 정말 대단한 사나이였다.
머리에 쓴 도사의 모자
요대의 밝은 달처럼 찬란하고
몸에 걸친 학창의
하늘하늘 신선 궁궐의 향기 풍긴다.
칼 같은 두 눈썹 먹물보다 진하고
살쩍에는 비스듬히 나는 장식
송골매 눈 같은 한 쌍의 눈동자 번개보다 밝아
곧장 다른 이에게 쏘아진다.
널찍한 어깨와 가는 허리
온 몸은 십만 근도 들어 올릴 듯한 근력이 있는데
이랬다저랬다
행동할 때마다 서너 번씩 되돌아본다.
알고 보니 두우궁의 이름 높은 천랑성이
주제넘게 위대한 명나라의 의젓한 새 제왕이 되었는데
단지 여색을 좋아해서 항아를 사랑한 바람에
이렇게 몰래 달나라를 찾아온 게로구나!
頭戴星冠, 燦爛晃瑤臺明月.
身披鶴髦, 飄飄動繹闕香風.
兩道劍眉濃似墨, 斜飛插鬢.
一雙鶻眼明於電, 直射侵人.
膀闊腰細, 渾身有千百斤膂力.
疐尾跋胡, 行動有三四回顧盼.
原來是斗牛宮赫赫天狼星, 不分做大明國岩岩新帝王.
只因好色愛嫦娥, 故此潛身來月殿.
항아는 멀찌감치 바라보고 천랑성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가 불량한 마음을 품었음을 눈치 챘고 또 그가 경솔한 짓을 저지르면 힘으로 대적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예법을 내세워 굴복시키려고 생각했다. 그 때 깜짝 놀란 두 선녀는 이미 하얀 난새 곁으로 날아 와 있었다. 항아가 마음으로 뜻을 전하자 두 선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옷소매를 추스르고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태음궁(太陰宮)의 선주(仙主)께서 성관(星官)께 인사 올립니다. 마침 반도회에서 듣자 하니 성관께서 칙명을 받들어 위대한 명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끌 천자가 되셨다고 하던데 미처 축하 인사를 하지 못해 황송하옵니다. 지금 이렇게 왕림해 주셨는데 또 미처 마중하지 못했사오니 깊은 성덕(聖德)을 지니신 성관께서 양해해 주시어 책망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명하실 일이 있다면 내일 아침 대문 앞을 쓸고 왕림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사옵니다. 하늘의 명령이 삼엄해서 고요한 밤에 만나는 것은 마땅치 않사오니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이렇게 조리에 맞는 말을 듣자 천랑성도 강짜를 부리기 곤란해서 두 선녀에게 공손히 읍(揖)하며 말했다.
“상제의 칙명을 받들어 정오(正午)에 인간 세계로 내려갔어야 하는데 지금 이미 여덟 시간이나 늦어 버렸소이다. 그러니 어찌 내일까지 미룰 수 있겠소? 선녀들께서 항아에게 전해 주시구려. 나는 응당 34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끌 천자 노릇을 할 것인데 마음에 드는 황후가 없어서 오늘밤 항아와 결혼해서 함께 인간 세계에 내려가고 싶소. 두 선녀도 각기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맡아 주시면 즐겁지 않겠소? 무엇하러 굳이 저 차디찬 광한궁에서 과부로 살려고 하는 거요?”
항아가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꾸짖었다.
“못된 괴물 같으니! 상제께서 크나큰 은혜를 베푸시어 네놈에게 인간 세상에 내려가 천자 노릇을 하게 해 주셨거늘 감히 달나라 궁궐에 몰래 들어와 상위의 금선(金仙)을 희롱하다니! 하늘의 율법을 어겼으니 내 즉시 상제께 아뢰어 네 목을 쳐서 하늘 궁전 아래에 걸어 놓도록 하겠다.”
천랑성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항아, 당신이 유궁국에 있었을 때에는 제후의 비(妃)에 지나지 않았소. 그런데 나는 지금 대제국의 천자로서 당신에게 황후가 되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니 이게 무슨 모욕이라는 것이오? 그렇다면 함께 상제님에게 갑시다. 혼인이라는 큰일을 치르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항아는 더욱 화가 치밀어 매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천랑성은 점잖게 청해서는 안 먹히겠다고 생각하고 곧 두 선녀를 옆으로 밀치고 나는 듯이 달려들어 항아를 납치하려 했다. 다급해진 항아는 하얀 난새가 끄는 수레를 버리고 한 줄기 금빛으로 변해서 직녀궁(織女宮)으로 날아 들어갔다. 직녀는 천제(天帝)의 손녀이니 천랑성이 어찌 감히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는 항아가 하늘 궁궐에 아뢰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즉시 몸을 돌려 남천문(南天門)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칙령이 내려진 것을 알고 있던 수문장은 그가 인간 세계로 내려가서 홍무제(洪武帝)의 처소로 가서 황후의 태(胎)로 들어갈 수 있도록 보내 주었다.
한편 직녀는 물가의 전각에서 난간에 기대어 차분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은하수가 찰랑거리는가 싶더니 한 덩이 빛으로 아름답게 일렁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서천(西天)의 소금기(素金氣)였는데,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언뜻 보였다가 잠겼다가 하면서 북두성을 따라 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물건이 잠길 수는 있지만 뜰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서(漢書)》에서는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가다가 북두성의 자리를 침범했고, 또 바닷가 노인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에 오자 직녀가 베틀을 괴는 돌을 주고 돌려보냈다고 했는데, 그게 어찌 황당무계한 말이 아니겠소? 이런, 얘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군요! 아무튼 당시에 직녀가 막 궁궐로 돌아가려 하는데 정확히 동쪽에서 한 줄기 금빛이 곧장 물가 전각을 향해 날아왔다. 일어나 살펴보니 금빛이 덩어리로 거두어졌는데, 다름 아니라 항아였다. 그런데 옥 같은 그녀의 얼굴에 약간 화가 난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직녀는 무슨 사정이 있음을 눈치 채고 자리를 권하고 차분하게 연유를 물었다. 항아가 전후 사정을 모두 들려주자 직녀가 분개했다.
“이놈이 정말 무례하구나! 여기까지 쫓아왔더라면 내가 신장들을 시켜서 붙잡아 본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 뜰의 나무에 묶어 놓아 네 화풀이를 해 주었을 텐데.”
“그자가 어찌 감히 여기로 오겠어요? 아마 인간 세상으로 가 버렸을 거예요. 저는 이제 그자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려서 명나라 천자 노릇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어요!”
“일이 이렇게 됐는데 탄핵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네가 잘못하는 셈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하지만 보아하니 네 정수리의 삼화(三華)가 진노에 동요되어 이미 연기와 불꽃이 뒤섞여 버렸으니, 너도 인간 세상에 한 번 다녀오는 수밖에 없겠구나.”
“이건 제가 잘못한 게 아닌데 왜 하계로 추방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추방이 아니라 아마 그래야 할 무슨 운수가 들어 있는 것 같구나.”
“어휴! 인간 세계로 내려가면 어떻게 다시 달나라로 돌아올 수 있겠어요? 천손(天孫)께서 좀 도와주셔요!”
“나는 그럴 능력이 없어. 어쩌면 네가 인간 세상에 내려간 뒤에 내가 어느 여선(女仙)께 부탁해서 네가 미혹의 길에서 해매지 않고 요대(瑤臺)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어도 괜찮을 거야.”
항아는 슬피 흐느꼈다.
“요지에서 부처님과 관음보살, 왕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게 금방 효험이 나타날 줄이야!”
그렇게 말하는 동안 하얀 난새와 두 선녀가 도착했고, 항아는 곧 직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달나라 궁전에 돌아오자 시녀들에게 물었다.
“천랑성이 왔었는데, 내 궁궐 안에 들어가진 않았더냐?”
그러자 여러 소녀(素女)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들어오다 뿐이겠어요? 심지어 저희들을 희롱하기까지 했다고요! 그래서 옥토끼더러 절구를 휘둘러 내쫓아 버리게 했는데…… 어쩌면 아직 궁궐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도 몰라요.”
“저런 못된 놈! 절대 용서할 수 없구나!”
항아는 곧 소영에게 상소문을 쓰게 했다. 잠시 후 소영이 상소문을 다 쓰자 항아가 살펴보고 나서 즉시 자허궐(紫虛闕) 아래로 달려가 아침 조회가 열릴 때까지 공손히 기다렸다. 이윽고 상제가 통명전(通明殿)에 나오니, 항아는 상소문을 들고 서열에 맞춰 서 있다가 붉은 섬돌로 나아갔다. 이미 그 까닭을 알고 있던 상제는 갈선옹(葛仙翁)에 상소문을 받아 낭독하게 했다.
태음광한부(太陰廣寒府)의 삼화금선(三華金仙)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저 당항(唐姮)이 삼가 고개 조아려 옥황대천존현궁고상제(玉皇大天尊玄穹高上帝) 폐하께 상세히 아뢰옵나이다.
제가 알기로 하늘의 율법은 삼엄하고 탐욕과 음란함을 가장 경계하며, 신선 세계는 청정하고 허무한지라 더욱 올곧고 차분해야 한다고 했사옵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폐하를 따라 요지의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뜻밖에 천랑성이 광한궁에서 날아 나오더니 저를 납치하려 했사온데, 다행이 하얀 난새가 얼른 물러나는 바람에 독한 수작에서 벗어날 수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한황(寒簧)이 앞을 막아서며 찾아온 이유를 묻자 천랑성은 인간 세상의 천자가 되라는 칙명을 받았다고 허풍을 치면서 달나라의 항아를 아내로 삼겠다고 했사옵니다. 그가 흉험한 위세를 부리며 양대(陽臺)로 가자고 핍박하는데, 사나운 기세를 마구 내뿜으며 저를 납치해 인간 세상으로 가려 했사옵니다. 게다가 제가 돌아가기도 전에 먼저 달나라 궁전에 들어가 규중(閨中)의 여인들을 유린했고, 궁정에서 횡포를 부려 시녀들이 수난을 당했사옵니다.
이렇게 못되고 고약한 별신[星官]이 황제 노릇을 하는 복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사옵니다. 틀림없이 충성스럽고 현량(賢良)한 신하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괴롭힐 것이옵니다. 또한 그는 이미 하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감히 폐하께서 정하신 기한을 어겨서 하늘의 법을 경시하고 신선의 규율을 어린아이 장난으로 취급했으니, 덕을 해치고 규율을 무시한 그 행태는 유구한 세월 동안 참으로 들어 보기도 드문 것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장을 파견하여 그들 붙잡아 와서 법률에 따라 다스림으로써 신선 관청의 위엄을 엄숙히 보이시고 인간 세상이 재난에 빠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되면 저만이 불후의 성은을 입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의 백성들도 한없는 복을 받게 될 것이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상제는 항아에게 앞으로 나오라 하고 이렇게 분부했다.
“천랑성을 잡아들이라는 그대의 청은 평범한 인간의 견해이지 신선이 할 말이 아니로다. 천랑성이 황제 노릇을 하는 복을 누리는 것은 그 스스로 쌓은 것이지 짐이 준 것이 아니다. 아래 세상의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것 또한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지 짐이 벌을 내린 것이 아니다. 짐은 운수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는 것이지 상벌을 통해 운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천랑성이 즉위한 뒤에는 또 하나의 큰 재난이 있을 것이니, 그대가 일을 주관하여 전생에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라. 천랑성이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당연히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나 지금은 아직 이르다.”
그리고 송생선녀(送生仙女)에게 어명을 내려서 이튿날 항아를 인간 세계로 내려 보내게 했다. 항아가 깜짝 놀라 눈물을 머금고 아뢰었다.
“상제의 어명을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일단 속세에서 애정의 인연에 얽히면 죄의 빚에 매여서 마음과 정신이 미혹에 빠져 어지러워질 것이니, 어찌 다시 청정하고 참된 상태로 되돌릴 수 있겠사옵니까? 간절히 바라옵건대 인간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도록 해 주신다면 설령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야 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나이다.”
항아가 엎드린 채 일어나려 하지 않자 상제가 말했다.
“관음보살이 한 말을 잊었더냐? 운수가 그렇다면 짐은 그걸 비틀 수 없느니라. 하지만 그대의 이런 고충을 보니 청정히 수련한 도력(道力)을 충분히 알 수 있도다. 앞날이 궁금하더냐? 그래도 그대의 영근(靈根)이 흐려지지 않아서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니라.”
그때 이십사제천(二十四諸天中) 가운데 귀모천존(鬼母天尊)이 나서서 아뢰었다.
“보아하니 항아가 이번에 인간 세계에 내려가면 천랑성에게 해를 당할 것 같으니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하옵니다. 제가 따라 가서 항아를 지켜 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대에게 그런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그대 역시 그 운수에 포함된 존재라는 뜻일 터. 허나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경솔한 말은 삼가도록 하라.”
이런 상황이 되자 항아는 이미 단념하고 무릎을 꿇으며 아뢰었다.
“제가 아래 세상으로 내쫓기는 것이 이미 운수에 정해진 일임을 알겠사옵니다. 다만 백성들의 재난을 관장하자면 살생의 죄악을 짓기 쉬워질 텐데, 부디 하해와 같은 자비와 명철함을 베푸시어 저로 하여금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폐하의 뜻을 받들어 행함으로써 타락하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에 상제가 칙령을 내렸다.
“그대는 인간 세상에서 응당 행해야 할 지극히 공명정대한 몇 가지 일들을 만날 것이다. 만약 천륜(天倫)이 무너지려 하면 그대가 바로 서도록 돕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그러지려 하면 그대가 바로잡아야 할 것이로다. 충의와 절조를 지닌 이들을 칭송하여 드러내고, 반역을 꾀하거나 아첨하는 무리들을 처단하되 표창하고 미워하는 일에 모두 마땅함을 잃지 않아야 과오 없는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로다. 짐의 말을 명심하라!”
항아는 고개를 조아려 성은에 감사하고 물러나서 강하궐(絳河闕)로 가서 직녀를 알현하고 상제의 어명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직녀가 말했다.
“상제께서 아주 훌륭한 생각을 하셨구나. 하지만 장래에 공을 세우는 것은 모두 네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게야. 요지의 모임에 참석했던 여선들 가운데 몇 분이 찾아가 가르침을 주실 게다.”
그러자 항아가 귀모천존이 함께 가고 싶다고 아뢰었던 일을 들려주니, 직녀가 말했다.
“아니야. 그분은 그저 잠시 신통력을 써서 도와줄 뿐이지. 갈선경(葛仙卿)의 부인인 포도고(鮑道姑)라는 분이 있는데, 원대하고 깊은 서원(誓願)을 하여 세상을 제도(濟度)하고자 하시지. 그분은 요지에 속해 있으니 내가 왕모님께 말씀드려서 그분이 인간 세계로 내려가 너를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고 길러서 대도(大道)를 이룰 수 있게 해 줄게. 그러니 요대로 돌아오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어.”
항아는 직녀에게 재배하며 감사하고 달나라 궁전으로 돌아가서 소녀들과 작별했다. 한황과 소영이 모두 따라 가려고 했지만 송생선녀가 말렸다.
“사적으로 갈 수는 없어! 폐하의 칙명이 있어야 해.”
그 말에 두 선녀는 항아의 옷자락을 붙들고 한없이 통곡했다. 항아도 차마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편지를 한 통 써 주면서 직녀에게 가서 간청해 보라고 했다. 또 요지의 서왕모와 남해 관음보살에게도 각기 하나씩 서신을 썼는데, 그 내용은 가르침을 내려 준 데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면서 아울러 자신을 구제해 달라고 간구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송생선녀를 따라 인간 세계로 내려가 어머니의 태로 들어갔으니, 이야말로 이런 격이었다.
천상의 선선이 내려오면
틀림없이 인간 세상의 장수나 재상 집안에서 태어나게 되지.
天上神仙降, 定在人間將相家.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회를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