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장 지역에서 평범한 여행객이 수월하게 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자연풍광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꼽는다. 설산과 빙하와 초원, 호수와 습지가 다채롭게 등장해서 제각각 엄청난 풍광을 보여준다. 차창이나 길가에서 보는 풍광이 그렇다는 것이다.
카라코람(파미르 고원에서 동남으로 뻗은 산맥, 喀喇昆侖) 하이웨이는 카스(喀什 카슈가르)에서 파키스탄 타코트까지 1032킬로미터(아보타바드까지는 1200킬로미터)의 도로이다. 중국 구간은 카스에서 훙치라푸(紅其拉甫, 쿤제랍 패스) 국경 검문소까지 416킬로미터, 파키스탄 구간이 616킬로미터이다. 쿤제랍 패스는 해발 4733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경 검문소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 개통할 때에는 고지대 하이웨이였는지 모르지만, 최근 도로를 새로 정비해서 그야말로 고속도로 하이웨이가 되어 있다. 7, 8세기 당나라 시대에는 현장과 혜초가 오간 길이다. 고선지의 소발률국(小勃律國) 원정길도 카라코람 하이웨이와 겹친다. 지금은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의 핵심 구간 가운데 하나이다.
출발지 카스 시내를 벗어나 사막을 달리다가 쿤룬산맥이 가까워질 때쯤 아단지모(雅丹地貌)를 만난다. 흙이 어쩌면 저리 붉을까. 붉은 흙 사이로 드러난 연두색 지층은 경이롭다. 검은 돌과 밝은 회색의 지층이 멋진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곧이어 파미르 고원으로 향하는 산길이 시작된다. 계곡은 깊어지고 산허리가 가파르고 능선은 까마득하다. 그 위로 쿤룬산맥 서부 최고봉인 궁거얼봉(公格爾峰, 7649미터)이 솟아있다. 이 지역은 일대일로의 신규 철도 공사가 한창이다. 고가도로와 터널이 험준한 계곡을 뚫고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다.
고원에 올라섰다 싶을 때 환상적인 옥빛 호수 건너편에 베이지 색의 기이한 백사산(白沙山)이 나타난다. 백사산은 사막은 아니다. 바람에 날린 모래가 지표면에 달라붙어 생긴 특이한 지형이다. 이곳이 과연 인간이 사는 세상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고원지대를 계속 가다보면 멀리 연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무스타거봉(慕士塔格峰 7509미터)이다. 무스타거봉의 둥근 능선은 고산반응에 숨이 가빠진 외지인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설산 바로 아래 카라쿠러호(喀拉库勒湖 해발 3600미터)의 짙푸른 물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호숫가 초원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검은 야크 떼는 또 어떠한가. 타하만(塔哈曼) 습지가 그 다음 순서다. 무스타거봉의 빙하가 녹은 물이 만들어낸 습지이다.
중국 구간의 끝인 훙치라푸는 외국인 비개방 구역이라 중국 여행으로는 타스쿠얼간현(塔什庫爾干縣)이 끝이다. 아침 해를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진차오탄(金草灘) 습지에 다다른다. 습지의 물웅덩이에 반사하는 햇빛이 영롱하다. 습지를 훤히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허물어진 고성, 해발 3112미터의 석두성(石頭城)이 있다. 입구의 표지에는, 한대에는 포리국(蒲犁國)이 있었고 당대에는 총령수착(蔥嶺守捉)을 설치했다는 설명이 있다. 한국인의 눈에는 총령수착을 거쳐 파미르 고원 한복판으로 진군했던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영화처럼 등장하게 된다.
고선지는 망국 고구려 전쟁포로의 2세이다.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당나라로 끌려와 하서군(河西軍, 간쑤성 우웨이(武威))에 종군했다. 아버지가 하서군을 떠나 안서도호부(지금의 쿠처)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고선지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20세에 유격장군에 등용되었다. 741년 톈산산맥 북쪽의 달해부(達奚部, 돌궐의 한 갈래)가 반기를 들자, 고선지는 기병 2천을 이끌고 토벌했다. 첫 번째 출정에서 큰 공을 세워 안서도호부의 부도호가 되었다.
747년 산악제국 티베트가 파미르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당나라에 복속하던 소발률국 등이 티베트로 돌아섰다. 고선지는 원정사령관이 되어 보병과 기병 1만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이때 지옥의 원정길이 시작된 곳이 석두성인 셈이다. 고선지는 쿤제랍 패스를 넘은 다음 먼 길을 돌아 호밀국(타지키스탄 호루그)을 먼저 정복해 식량과 병력을 보충했다. 이곳에서 다시 세 길로 나눠 티베트군 주둔지 연운보(아프가니스탄 사르하드)를 공격했다. 고선지의 군대는 세 갈래로 험준한 길을 돌고 돌아 접근했다. 검은 새벽을 틈타 세 방향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난공불락이었던 절벽 위의 사륵성과 연운보를 함락시켰다.
연운보에서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최악의 고갯길, 해발 4703미터의 탄구령(다콧 패스)을 넘을 때에는 계략을 써서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산악제국 티베트는 고산지대에 적응하기 어려운 당의 군대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탄구령을 넘어올 것으로 예상치 못했다. 소발률국은 티베트 지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고선지에게 선점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전쟁사에서 나폴레옹이나 칸니발의 원정보다 더 위대한 승전으로 평가하는 전투이다.
고선지는 751년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아바스 왕조(수도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군대에 맞섰지만 탈라스에서 패퇴했다. 고선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하서절도사로 전임되었다. 장안으로 돌아가서는 우우림군 대장군(右羽林軍 大將軍)에 임명됐다.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핵심 요직이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자 토벌군 부원수로 임명되었으나 임의로 군대를 이동해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라고나 할까.
고선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고구려의 기상’은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고선지와 같은 전쟁포로 2세에게도 기회를 부여한 대당제국의 개방적 체제이다. 아버지는 노예와 다를 바 없이 당나라 생활을 시작했으나 기회가 있었다. 군인으로 나갔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아버지 덕분에 고선지는 젊어서 군문에 들어갔다. 그는 전공을 쌓았고, 출신이 아니라 업적으로 평가받아 출세했다. 물론 고선지는 ‘고구려 노예’라고 욕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소발률국을 정복하고 나서 상관인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詧)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직접 전승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이라 차별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당나라는 다양한 혈통과 종교와 문화를 허용하는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인 최치원은 외국인이면서도 당의 관리직을 수행하다가 자발적으로 귀국했다. 일본의 유학승 옌닌은 당나라에서 많은 것을 배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신라인 출신 혜초 역시 불공삼장(7세기 당나라 고승, 밀교의 6대조)의 여섯 제자에 당당하게 끼어 있었다. 어느 사회든 위아래로 계층이 나뉜다. 계층과 계층 사이에는 출세와 쇠락의 사다리가 있는 법이다. 서로 다른 높이의 사다리가 많이 놓여 있어야 건강한 사회이다. 그것이 당나라였고 그 속에서 출세한 고구려인의 하나가 고선지였다.
그러면 고선지 시대에서 130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군과 법조와 같은 권력 엘리트들은 육군사관학교와 사법시험이라는 사다리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이 쌓인 결과의 부정적인 측면은 새삼 논할 것도 없다. 권력 엘리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국에 크고 작은 공공 도서관이 1042개(2017년)나 있다. 도서관장 가운데 애초 전문직으로 채용한 사서가 관장에 오른 경우는 얼마나 될까. 국립중앙도서관에 사서 출신 관장이 한 번도 없었다. 소위 일반직 고위 공무원들이 독식하는 자리 아닌가.
외국인은 더 심하다. 입국 문턱의 각종 규제에서 주위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벽에 걸려 사회 하층에서만 맴돌고 있다. 그것은 2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 와서 살아보려는 외국인들이나 우리가 필요해서 데려온 외국인들이나 예외가 없다. 우리는 새파란 하늘 아래 고원에서 펼쳐졌던, 전쟁포로이자 망국유민의 2세 출신인 고선지 스토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윤태옥(중국여행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