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1
1. 《홍루몽》의 작자에 관한 청대의 기록 및 견강부회
1921년 후스가 〈《홍루몽》 고증〉(개정판)을 발표한 이래, 근대의 많은 학자들은 대부분 《홍루몽》(《석두기》)의 앞부분 80회의 작자가 조설근이라고 믿었다. 사실 후스 이전에도 조설근과 동시대 사람들이 이미 그를 《홍루몽》의 작자로 인정한 적이 있다.
일반 학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증거는 《홍루몽》 필사본에 들어 있는 비평이다. 《지연재중평석두기(脂硯齋重評石頭記)》(갑술본) 제1회의 미비(眉批)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설근이 읽고 문장을 더하거나 삭제했다면, 책을 펼쳐서 여기에 이르렀을 때 보이는 이 설자(楔子)는 또 누가 쓴 것인가? 이로 보건대 작자의 문장이 대단히 교활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뒤쪽에서도 이런 문장이 적지 않다. 이야말로 작자가 안개와 구름으로 풍경을 흐릿하게 가리는 화가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니, 보는 사람이 절대 작자에게 속지 않아야 비로소 눈이 밝은 사람인 것이다.
또 같은 회에서 가우촌(賈雨村)이 중추절에 지은 시에 대해 붙인 방비(旁批)에서는, “내가 보기에 조설근이 이 책을 지은 데에는 시를 전하려는 뜻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외에도 애신각라 영충(愛新覺羅‧永忠: 1735~1793)의 《연분실집(延芬室集)》에는 〈묵향(墨香) 덕분에 소설 《홍루몽》을 보고 조설근을 추모함〉이라는 3수의 절구(絶句)가 들어 있는데, 제목 아래 “성이 조이다[姓曹]”라고 밝혀져 있다. 우언위(吳恩裕: 1909~1979)의 고증에 따르면 그 3수의 절구는 건륭 33년(1768), 조설근이 죽은 뒤 겨우 4, 5년 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를 보면 영충은 조설근을 《홍루몽》의 작자로 여긴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홍루몽》을 읽고 왜 조설근을 추모했겠는가?
이 외에도 부찰명의(富察明義: 1740?~ )의 《녹연쇄창집(綠煙瑣窗集)》에는 〈《홍루몽》에 대하여[題紅樓夢]〉이라는 12수의 시가 들어 있는데, 시 앞의 ‘소인(小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조설근이 지은 《홍루몽》은 풍류와 화려한 나날의 극치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아마 그 조상이 강녕직부(江寧織府)를 지냈으니, 그가 말한 대관원(大觀園)이라는 것은 바로 지금의 수원(隨園)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드문데, 나는 필사본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홍루몽》에 대하여〉라는 시는 1770년에서 1775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상 세 사람의 기록은 모두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는 주장을 유도하고 있다.
부찰명의의 ‘소인’에서는 수원(隨園)을 언급하고 있는데, 원매(袁枚: 1716~1797) 역시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그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曹寅: 1658~1712)의 아들이 《홍루몽》을 지었는데, 풍류와 화려한 나날의 극치를 모두 기록하고 있어서 아재(我齋, 즉 富察明義)가 읽고 칭송했다. 당시 《홍루몽》에 등장하는 어느 글재주 좋은 여인이 특히 아름다워서 아재는 이런 시를 지었다.
원매는 당시의 저명한 문인이고 또 그의 《수원시화》도 대단히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에, 청대의 많은 논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서 조설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모두들 원매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서 원매는 조연정(曹楝亭, 楝亭은 曹寅의 字)을 조연정(曹練亭)으로 잘못 썼고 또 조설근을 조연정의 아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몽치학인(夢癡學人)도 조설근을 “강녕직조(江寧織造) 조연정(曹練亭)의 아들[公子]”이라고 했고, 진기원(陳其元)은 “이 책(《홍루몽》)은 바로 강희 연간 강녕직조 조연정의 아들 조설근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섭덕휘(葉德輝) 또한 “이 책은 조인의 아들인 조설근이라는 효렴(孝廉)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청나라 때에 《홍루몽》을 논하면서 《수원시화》를 인용한 이들로는 또 전정방(錢靜方)과 이자명(李慈銘), 유월(兪樾: 1821~1907), 이보가(李寶嘉: 1867~1906) 등등이 있다. 이렇게 보건대 청나라 때에 원매의 설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주 많은 이들이 《홍루몽》의 작자가 조설근으로 알고 있었다.
비록 청나라 때에 적지 않은 이들이 《홍루몽》을 조설근이 지은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조설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적어서, 그들의 기록은 모두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진 헛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거명한 몽치학인이나 진기원, 섭덕휘 등이 바로 좋은 예이다. 조설근의 사적은 알려진 바가 적은데, ‘조설근’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써 먹을 만한 것으로 변했다. 논자들은 종종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배합하거나 견강부회했다. 예를 들어서 모경진(毛慶臻)은 《홍루몽》의 “교화에 해를 끼치기” 때문에 작자인 조설근(그리고 그의 후대 자손들)이 응보를 받았다고 했다.
선례를 연 조설근은 한군(漢軍) 귀족 출신의 거인(擧人)이다. ……저승에 다녀온 이들이 모두들 전하기를 조설근이 지옥에서 심한 벌을 받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성명(性命)을 꾀어 망가뜨린 죄업이 무척 커서 ……가경(嘉慶) 계유(癸酉, 1813)년에 임청(林淸)의 역모 사건에 도사(都司) 조 아무개가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일족이 몰살당했는데, 바로 한군 귀족 조설근의 집안이었다.
또 양공신(梁恭辰)은 “《홍루몽》은 음란함을 가르치는 게 심하기” 때문에 조설근은 “공생(貢生)으로 늙어 창 아래에서 죽으면서 부질없이 자손이 끊기는 데에 대한 탄식만 했고 죽은 뒤에도 쓸쓸했지만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분명히 음란한 책을 만들어 낸 응보를 받은 게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했다. 근대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조설근은 ‘한군 귀족 거인’이나 ‘공생’이 아니라 내무부 소속의 벼슬 없는 평민 신분이었다고 하니, 모경진과 양공신은 그저 조설근의 ‘저지’를 억지로 끌어들여 《홍루몽》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인증했을 뿐이다.
이렇게 작자를 자신의 해석에 배합하는 방법은 또한 청나라 때 색은파 독자들이 관행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청대 사람들은 《홍루몽》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本事]에 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하여 부긍(傅恆)의 집안일이랄지, 화신(和珅)의 집안일, 장후(張侯)의 집안일, 명주(明珠)의 집안일 등등 다양한 ‘집안일과 관련된 설’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자세한 것은 장후의 집안일이라는 설과 명주의 집안일이라는 설인데, 후자가 더욱 유행했다. 《고전문학연구자료휘편(古典文學硏究資料彙編)》 《홍루몽권(紅樓夢卷)》에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명주의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을 제기한 사람이 20명이 넘는다.
장후 가사설과 명주 가사설은 모두 조설근을 끌어들여 자신의 견해를 인증한다. 예를 들어서 《임무필기(賃廡筆記)》에서는 명주 가사설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조설근은 처음에 다른 저작이 없어서 참고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부친 연정(楝亭) 선생의 문집을 읽고 나서야 누란씨(納蘭氏)와 아주 친밀하게 왕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들의 생애와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조설근이 모든 집안사람들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던 것이 당연하다.
이런 설명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모두 작자를 내세워 자신의 견해에 무게를 싣는 것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다른 색은파에 비해 조금 치밀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기타 색은파는 그저 《홍루몽》이 어느 집안의 일을 배경으로 한다고 제시하기만 할 뿐, 작자가 남의 집안일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후 가사설의 경우, 주춘(周春)은 《열홍루몽수필(閱紅樓夢隨筆)》에서 자신이 《수원시화》를 참고하여 증명했다고 인정했다. 그도 아마 원매의 영향을 받아 조설근이 《홍루몽》의 작자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의 장후 가사설도 “거기서 임여해(林如海)라고 한 것은 바로 조설근의 부친 연정 선생”이라고 하여 조설근의 집안과 억지로 관계를 끌어다 붙인다. 그는 ‘조(曹)’의 은어(隱語)가 ‘임(林)’이니, ‘조’자의 이체자(異體字)가 ‘임’자와 마찬가지로 나무 목(木)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두 성씨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또 어찌 작자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색은파는 ‘성명의 상관관계’에서 ‘비밀을 드러내기’ 좋아하는데, 이 또한 그런 예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의 논자들은 모두 조설근이 《홍루몽》의 저자라고 믿었지만, 다른 몇몇 독자들은 작자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난고거사(蘭皐居士)는 〈《기홍루몽》설자(綺紅樓夢楔子)〉에서 “《홍루몽》은 누가 지은 것인지 모른다.”고 했고, 눌산인(訥山人)은 〈증보《홍루몽》서(增補紅樓夢序)〉에서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는데, 조설근이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잠시 깊이 따지지 않겠다.”고 했다. 진용(陳鏞)은 《저산헌총담(樗散軒叢談)》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홍루몽》은 사실 이야기 책[才子書]이다. 처음에는 작자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누군가 강희 연간에 경사의 어느 고관의 저택에 빈객으로 있던 상주(常州) 출신의 어느 거인(擧人)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사실 정위원(程偉元: 1745?~1818?)은 췌문서옥(萃文書屋)의 《수상홍루몽(繡像紅樓夢)》(이것은 표지 제목이고, 흔히 ‘정갑본[程甲本]’이라고 칭함)의 〈서문[序]〉에서 이렇게 밝혔다.
소설 《홍루몽》의 본래 제목은 《석두기》인데, 작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결국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책 속에서 조설근 선생이 여러 차례 다듬고 고쳤다는 기록이 들어 있다.
1927년 아동중배본(亞東重排本, 표지 제목은 《紅樓夢》, 上海亞東圖書館 鉛印)이 나오기 전에는 거의 모든 인쇄본이 정갑본을 바탕으로 다시 찍은 것이었기 때문에 정위원의 서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독자들이 만약 정위원의 말을 믿었다면 더 이상 작자가 누구인지 따지지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정갑본 《홍루몽》만 읽어서는 그 소설의 작자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저명한 학자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호는 靜庵)조차도 조설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후스가 조설근이 작자라는 것을 고증해 낸 뒤에 차이위앤페이(蔡元培)는 그로 인해 왕궈웨이의 여한이 풀렸을 거라고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