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언적인 시대의 진상一個預言性的時代眞相 1
이 소설은 얼핏 보면 조금 이상하다. 1886년이면 아직 국호가 러시아였고 차르의 치하였으며 또 E. M. 포스터가 “전 세계에서 가장 소설을 잘 쓰는 이들은 거의 러시아인이다”라고 칭찬한 그 시대였는데, 당시 러시아의 대작가들이 전부 잘 못 살았단 말인가? 예컨대 푸시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게르첸 등이 말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조차 기본적으로는 가난뱅이가 아니었다. 자기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그런 비참한 생활을 그가 해봤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의 무절제한 생활과 자기 파괴에 가까운 성향 때문이었다.
체호프의 이 소설은 이런 사실의 진상을 우리가 깨닫게 해준다. 알고 보면 제정 러시아의 그 대작가들이 당시 사람들에 비해 한 차원 높은, 특수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물려받은 부와 권력 덕분이었다. 그들은 모종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부자와 귀족으로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 것이지, 시를 쓰고 소설을 써서 얻은 수입과 명예로 일약 부자와 귀족이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조소와 경멸의 의도가 있어서 이런 시대의 진상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본래 계속해서 부와 권력을 축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각자 개인의 부와 권력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박한 것들을 보고 나서 삶의 갈림길로 빠져나가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심지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망명과 죽음으로 향할 수도 있었고(게르첸이 그랬다), 사회 최하층으로 굴러 떨어져 빈털터리 삶을 살 수도 있었다(황족이었던 크로포트킨이 그랬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권력자 중에도 이런 예가 있는가? 톨스토이의 부활은 네플류도프라는 젊은 귀족의 ‘참회’를 다룬 작품이다. 그는 단지 불공정한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배 판결을 받은 매춘부 카추샤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곧장 그 춥고, 곤궁하고, 절망적인 세계로 쫓아간다. 이런 이야기는 오늘날 다시 써지기 힘들다. 전혀 성립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너무 가식적이고, 너무 주관적이고, 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 극적이어서 막장 드라마에도 그런 사람, 그런 일은 안 나온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같은 부자이고 권력자여도 오래된 귀족과 자본주의의 신흥 부호들은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게 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한 것처럼 많은 좋은 것들이 그 역사의 교체 과정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레비스트로스 역시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뚜렷한 현상 중 하나는 바로 ‘미덕’(그는 정말로 이 오래되고 반듯한 단어를 사용했다)의 지속적인 상실이며 승리자인 자본주의는 다른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계속 투자하고, 확장하고, 돈을 버는 것만을 유일한 가르침으로 내세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