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세계 제국 5

5-5 운명과 선택

처음부터 당나라는 세계를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도호부를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정관 14년(640)에 교하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고 총장 원년(668)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며 이듬해에는 한해瀚海도호부를 안북安北도호부로 바꿨다. 그리고 조로調露 원년(679)에는 송평(宋平. 지금의 베트남 하노이)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했다. 동서남북에 다 도호부가 있었다.

관할 국경은 일찌감치 중국의 판도를 넘어섰다. 남쪽으로는 베트남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남북한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몽골과 러시아에 이르렀다. 또한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동부와 동남부, 키르기스스탄 전역, 타지키스탄 동부,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이란의 동북부,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우즈베키스탄의 대부분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는 다른 나라에 속한 그곳들을 당나라는 무작정 자신들의 세력 범위로, 심지어 영토로 간주했다.

이 정도면 당연히 세계 제국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모든 성과는 무후武后의 칭제 전에 완성되었다. 안서도호부의 설치부터 안남도호부의 설치까지 겨우 39년이 걸렸다. 이것은 대외 확장이 태종부터 무후까지 집권자 3대에 걸친 국책이었음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한 농업민족의 왕조가 뜻밖에도 그런 팽창의 야심을 품고, 또 그토록 빨리 그것을 실현한 것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다. 여기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간단히 말해 3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수당은 농업제국이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농업민족이 세운 나라는 아니었다. 새 왕조를 세운 것은 혼혈 민족이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족과 중신들의 몸속에는 유목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상 때부터 그들에게는 본분에 만족하는 습관이 없었다. 거꾸로 공격과 침략과 개척이 그들의 천성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옛 ‘초원’을 더 넓힌 것일 뿐이었다.

다음으로, 농업제국이라고 꼭 확장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리아와 양한은 강한 확장성을 갖고 있었다. 양한의 차이는 단지 서한은 주로 북쪽을 지향했고 동한은 주로 남쪽을 지향한 데에 있었다. 사실상 농업민족의 논리는 이랬다. 정착의 필요로 국가를 세웠으며 수리시설을 세우고 천재지변과 외적에 대응하기 위해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변한 뒤, 결국 중앙집권적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제국이 건립된 후, 영토가 문제가 되었다. 인구가 증가한 후에는 토지도 문제가 되었다. 나라를 지키려 해도, 생산을 늘리려 해도 꼭 주변 국가들과 마찰이 생기고 전쟁이 뒤따랐다. 그래서 농업제국은 또 필연적으로 농업 군사제국으로 발전했고 변경 개척이 생존 유지의 유일한 방법으로 떠올랐다.

확장은 피할 수 없는 추세였다.

이 점은 농업제국과 유목제국이 다 동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목민족의 전쟁은 재물을 추구했지만 농업민족의 전쟁은 토지를 추구했다. 한쪽은 동산을, 한쪽은 부동산을 원했으니 영토의 관리 방식도 판이했다. 유목 군사제국은 점령만 하고 다스리지는 않았고 또 주둔만 하고 개간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쪽 땅을 얻으면 저쪽 땅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여전히 풀을 먹이는 것만 알고 풀을 심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농업 군사제국의 정책은 개간과 국경 방어였다. 군대가 점령하는 곳마다 농민이 따라갔다. 그들은 확장이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고 또 그렇게 봐야만 했다. 농업이 뒤따르지 않는 확장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앞쪽이 거주하기에 부적합한 곳인 것 같으면 바로 병거兵車를 멈춰 세웠다.

唐 周昉 《戏婴图》

이런 까닭에 농업제국의 확장은 이성적이고 한도가 있었다. 그들의 국경선은 안전선 안에 있었으며 토지의 수요가 충족되면 점령을 멈췄다. 그러나 유목제국의 확장은 비이성적이고 한도가 없었다. 그들의 국경선은 곧 자기 능력의 최대치였다. 달리 말해 그들은 완전히 지칠 때까지 점령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는 회오리바람이나 태풍과도 같아서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그라져 한바탕 어지러운 흔적만 남겼다.

이렇게 보면 당나라가 세계 정복의 야심을 품은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야심을 안 가졌다면 오히려 비정상이었을 것이다. 그 작은 고구려도 군사 왕국으로 변신해서 중원의 내란을 틈타 남하해 확장을 했는데 하물며 한나라, 당나라처럼 강하고 통일된 나라는 어떠했겠는가? 서한의 명장 진탕陳湯이 “강대한 한나라를 침범한 자는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犯强漢者, 雖遠必誅)고 한 것은 구실이면서 또 사실이었다. 그런데 한나라와 당나라는 이런 어투로 말할 수 있었고 말한 것은 꼭 실행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는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문화의 우열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화에도 우열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성격과 성질 면에서 보면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인류의 생존과 발전의 방식으로서 어떤 문화도 존재할 권리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화는 우등하고 어떤 문화는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성질에는 우열이 없어도 형세에는 우열이 있다. 바꿔 말해 세계에는 우등한 문화나 열등한 문화는 없지만 우세인 문화, 열세인 문화는 있다. 우세면 확실히 우등하고 또 확실히 강세이다. 열세면 꼭 열등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약세이다.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여러 나라 중 하필 수당이 세계성을 띤 문명이 된 근본 원인이다.40

하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문제는 우세가 영원하지 않고, 또 우월성을 가졌다고 해서 꼭 세계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강줄기는 동쪽으로 30년 흐르다가 서쪽으로 30년 흐르곤 한다. 중국 문화는 어떻게 해야 장기적으로 우세를 유지할 수 있고 약세에 처한 다른 문화는 또 어떻게 처신해야 했을까?

동아시아 각국, 각 민족은 모두 선택을 해야 했다.

돌궐, 회흘, 토번은 굳게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들은 중국어를 알고 한자도 읽을 줄 알았지만 공용어는 자기 것을 썼다. 돌궐문은 소그드에서 유래했고 회흘문은 돌궐에서 유래했으며 토번문은 인도 문자를 모체로 삼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기 것은 자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은, 불교와 도교가 끝까지 돌궐 사회에 침투하지 못했고 회흘은 아예 마니교를 택했으며 토번은 인도와 중국의 불교를 동시에 도입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독자적인 종교 체계를 세운 것이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확실히 당나라의 강세 앞에서, 토대가 빈약했던 그들은 충분히 경각심을 갖고 진지를 굳게 지켜야 했다. 그래야만 고도로 발달한데다 강한 전파력까지 갖춘 한족 문명에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똑같이 약세였던 일본과 신라는 적극적인 한화漢化의 문화 전략을 택했다. 일본 문자와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는 널리 한자를 사용하면서 중국 문명과 같은 문화적 표지를 갖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또 앞 다퉈 중국 불교를 도입해 돌궐, 회흘, 토번과 대조를 이뤘다.

선택은 운명을 결정했다. 어떻게든 수당과 거리를 유지하려 했던 돌궐과 회흘은 역사의 무대에서 역할을 마치고 퇴장했으며 중국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토번은 고유의 특색을 지닌 채 훗날 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전면적 한화를 택한 일본과 신라는 결국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41

당나라도 마찬가지로 선택을 해야 했다.

확실히 서기 7세기의 당나라는 남에게 부러움을 살 만한 문화적 우세를 갖고 있었다. 2천 년 전 시작된 오래된 문명이 4백 년의 고난을 겪은 뒤, 오호와 선비족에게 신선한 피를 주입받아 농업민족의 신중함과 유목민족의 혈기를 겸비했다. 이는 과거의 양한보다 훨씬 우월했다. 이때 그들은 문을 닫아 걸고 혼자 만족할 수도 있었고 국경 밖으로 뛰쳐나가 엄청난 무력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개방과 포용을 택했다.

개방은 대외적인 것이었다. 누구든 들어와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갖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포용은 대내적인 것이었다. 어떤 외래문화든 자신을 위해 받아들였고 국민은 필요한 대로 취할 수 있었다. 제한도 없고, 차별도 없고, 틀도 없고, 계율도 없었다. 오직 넓고 큰 도량만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역사학자들은 한 왕조와 국가가 정권이 불안하고 통치가 흔들릴수록 한층 더 대내적으로 압제를 가하고 대외적으로 배척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반대로 자신의 정권이 탄탄하고 자신의 문화가 풍부하다고 믿으면 모든 문을 활짝 열고 외래문화를 차별 없이 전부 받아들인다.42

당나라인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우세했고 우월했지만 우월감은 없었다. 오히려 외래문화에 호기심을 표현했으며 평상심을 갖고 다른 민족을 대하면서 함부로 자신을 낮추지도 상대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문화도 자신들의 전통을 뒤집지 못하며 단지 자신들의 양분이 될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문명은 사유재산이 아니고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실로 대국의 풍모였다.

이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농업제국은 본래 확장성이 있었으며 수당은 또 혼혈 왕조인데다 중국 문화의 우세까지 겸하여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세계성을 띤 문명을 창조해낸 3대 원인이었다. 비잔틴, 아랍과 함께 3대 제국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3대 제국은 또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