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세계 제국 1

5-1 고구려

서기 607년,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라는 일본의 사신이 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에 와서 중국 황제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그 국서는 아마도 집권 중이던 쇼토쿠聖德 태자가 기초했을 터인데 그들의 외교적 바람, 즉 스이코推古 여황과 일본국이 중국과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는 것을 명확히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 첫머리의 인삿말은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내노니 별고 없는가.”(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였다.

중국의 황제는 읽고서 대단히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쁜 게 당연했다. 중국 황제가 보기에 세계에는 중심이 하나뿐이고 그것은 바로 대중화大中華였으며 또 천하에는 천자도 한 명뿐이고 그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해가 두 개일 리 없듯이 백성에게도 군주가 두 명일 리 없는데 어디서 또 한 명이 불쑥 나타나 자기는 동녘에서 솟아오르고 그는 서산으로 진다고 하는 것인가? 그나마 다행히도 중국 황제는 당시 일본 천황이 여황이라는 것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대로해 혼절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국서는 역시 하나의 사건이었다.1

물론 그 중국 황제는 자기의 채찍이 세상 끝의 그 손바닥만한 섬나라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이미 읽은 국서를 돌려주기도 여의치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홍려사鴻臚寺의 관리에게 분부했다.

“앞으로 저렇게 사리에 어둡고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가 또 찾아오면 짐에게 알리지 마라.”

그 중국 황제는 바로 양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18일, 황제는 너그럽게도 다시 오노노 이모코 일행을 접견했다. 다만 이번에는 동남아의 적토赤土 같은 다른 나라 사절들과 함께였다. 4월, 수 양제는 또 13명의 사절단을 파견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중국 황제의 친절한 안부 인사를 전하게 했다.2

오노노 이모코는 예상 밖의 성과에 매우 기뻐했다.

당시 수 양제가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그는 일본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일본과 한반도의 백제, 신라 등을 포섭해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책략으로 고구려를 상대하려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3

고구려는 수 제국의 눈엣가시였다. 그로부터 10년 전인 개황 18년(598) 6월, 수 문제는 다섯째 황자인 한왕漢王 양경楊琼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수륙 두 갈래로 30만 대군을 통솔해 요동 원정에 나서게 함으로써 수당 양대에 여러 차례 시도된 고구려 토벌의 서막을 열었다. 그때 수나라군은 원정의 피로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서 살아 돌아온 인원이 열 명 중 한두 명에 불과했다.

양광만 이 화로 인해 이득을 보았다. 고구려 정벌 실패의 책임은 수나라군의 재상 고경에게 돌아갔다. 고경은 본래 그 정벌을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본서의 제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경의 실각은 제국의 국정 방침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고 황태자도 자연스럽게 양용에서 양광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태에서 양광은 즉위 후, 당연히 관중 위주의 정책을 대외 확장의 새 노선으로 조정하는 한편, 부황의 유지를 이어 고구려 토벌에 나섰다. 심지어 이 일에 온 나라의 힘을 쏟아 붓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연이어 참패를 당했으며 반수反隋의 투쟁이 반전의 노래 속에서 폭발하고 말았다.4

수 양제는 사실상 고구려 때문에 실패했다.

희한하게도, 당 태종은 즉위 후 걸핏하면 수나라를 반면교사로 삼았는데도 불구하고 고구려 문제에서만큼은 수 양제와 완전히 일치했다. 똑같이 친정에 나섰고 똑같이 만류를 뿌리쳤으며 똑같이 연전연패했다. 유일한 차이는 당 태종이 언젠가 후회를 토로했다는 것이다. 그는, “위징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틀림없이 짐을 말려주었을 텐데.”라고 말했다.5

그러면 그 후에는 또 어떻게 됐을까? 고종 이치李治가 제위를 계승한 뒤에도 동쪽 정벌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총장總章 원년(668) 평양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완전히 멸한 뒤에야 일이 마무리되었다. 다시 말해 두 왕조의 네 황제가 모두 고구려를 숨은 화근으로 보고 어떻게든 멸하려고 애를 쓴 것이다. 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답을 찾으려면 먼저 고구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수당 시기의 고구려는 오대五代 시기인 918년에 왕건이 세운 고려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다. 비록 전자가 역사와 정사에서 고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습관적인 약칭이다. 당나라가 멸망한 뒤 비로소 세워진 고려 왕조가 진짜 고려이다.6
고구려인은 맨 처음에는 중국 동북 지역에 살았다. 서한 말엽 나라를 세울 때 오늘날의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도읍을 정했고 당시 그곳의 행정구역은 현도군玄菟郡이었으며 그들의 민족 분류는 예맥濊貊 계통이었다. 위진남북조 시기, 고구려인은 계속 발전해 강성해졌고 북위 탁발도와 남조 유의륭의 시대에는 평양으로 천도해 한반도에 정립한 삼국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두 나라는 백제와 신라였다.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한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한민족은 최초에 일명 삼한으로 불리는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었다. 나중에 마한은 백제를, 진한은 신라를, 변한은 가야를 세웠다. 이것이 한반도 남부 최초의 삼국이었다. 고구려의 남하 이후, 신라가 가야를 합병해 한반도의 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바뀌었다.8

백제는 서남부에, 신라는 동남부에, 고구려는 북부에 위치했다.
삼국 중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영향이 가장 컸고 문명 수준이 가장 높았으며 종합적인 국력도 가장 강했다. 동시에 처한 상황도 가장 미묘했다. 동쪽의 남조와 북조, 남쪽의 신라와 백제, 서쪽의 일본, 북쪽의 말갈靺鞨과 실위室韋와 거란契丹과 돌궐은 모두 사이좋은 이웃이 아니었다. 물론 고구려 자신은 크게 개의치 않고 이미 오랫동안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을 때, 한반도도 똑같이 혼란에 휩싸였다. 대체적으로 보면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는 일본과 손잡은 상태에서 한반도는 마치 춘추전국 시기의 중국처럼 패권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군사전인 동시에 외교전이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그리고 일본은 서로 앞다퉈 중국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었는데 심지어 남조와 북조를 향해 동시에 호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중국의 남조와 북조도 모두 누가 오든 거절하지 않았으며 가능한 한 상대방과 중국의 다른 쪽이 왕래하는 것은 저지하였다. 고구려, 신라, 백제, 일본도 마찬가지로 그런 배타적 연맹 관계를 맺기를 희망했다. 남북조와 삼국과 일본은 그렇게 동아시아의 변화무쌍한 국면을 형성하였다.

엄격히 말해서 거기에는 무슨 도덕이나 정의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조든 북조든 삼국이든 모두 이익에만 이끌렸고 공격하는 쪽은 하나같이 상대가 오랫동안 분열되어 자기가 집어삼킬 수 있기를 바랐다.

수 문제가 남조를 멸한 것이 균형을 깨뜨렸다.

먼저 불안을 느낀 나라는 고구려였다. 어렵사리 독립을 이룬 발전도상국으로서 그들은 강대한 통일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 것이 결코 축하할 일이 아님을 명확히 인식했다. 만약 상대가 남쪽의 신라나 백제와 손을 잡는다면 자신은 치명적인 재난을 맞이할 게 뻔했다.

중국의 혼란과 분열을 이용해 한몫 보는 시대는 지나갔다. 앞뒤로 적을 두게 된 고구려는 반드시 동맹군을 찾아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그들은 동돌궐이 떠올랐다.

대업 3년(607) 6월, 수 양제가 북쪽 변경을 순행할 때 고구려의 사신도 그곳에 도착했다. 계민 카간은 감히 숨기지 못하고 황제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수 양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구려가 만약 동돌궐과 손을 잡고 거란, 말갈의 무리까지 협박해 끌어들인다면 틀림없이 제국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한폭탄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 점을 알고 나면 수 양제가 왜 돌연 그 “예의도 모르는” 일본 사절단에게 태도를 바꾸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바로 그해에 오노노 이모코가 와서 국서를 전달했으며 그 이듬해 4월에 수 양제는 사신을 보내 일본을 답방하게 했다. 또한 고구려의 동향을 파악한 뒤, 수 양제는 고경을 죽였다.10

고구려는 아무 것도 제때 성사시키지 못한 채 꼼짝없이 중국 제국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서기 668년, 신라가 당나라의 도움으로 백제를 겸병한 지 8년 만에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그때 당 고종은 이미 병환으로 정사에서 손을 뗐고 대신 황후 무측천이 조정을 관장하고 있었다.

무측천이 소홀하게 일처리를 할 리는 없었다. 언제 그녀가 우유부단한 적이 있었던가?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던 날, 그들의 역사적 공적을 되새긴 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불교는 먼저 전진前秦을 통해 고구려에 전해졌고 다시 고구려를 통해 신라에 전해졌다. 백제는 중일 문화교류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인이 한자를 익히고 훗날 그것을 빌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창조한 것은 백제의 박사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가져갔기 때문이었다.11

의심의 여지없이 두 나라의 공헌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백제와 고구려가 없었다면 한자를 매개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로만 영웅을 논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잊어서도 안 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