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서역의 정취
중국의 광활한 서북 지역에는 3개의 산맥이 있다. 남쪽에는 쿤룬崑崙 산맥이, 북쪽에는 알타이 산맥이 있고 두 산맥 사이에 길게 누운 톈산天山 산맥은 신장 위구르 자치주를 자연적으로 남강南疆, 북강北疆, 동강東疆으로 나눈다. 이 지역들은 고대에는 모두 서역이라 불렸다.14
서역은 본래 광범위한 개념이었다. 대략 양관(陽關. 지금의 간쑤甘肅 둔황敦煌)과 옥문관(玉門關. 지금의 간쑤 위먼玉門) 서쪽이 다 서역이었고 가장 멀리는 이란 고원, 가장 가까이는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이 그 끝이었다. 본서에서 말하는 서역은 주로 협의의 서역, 즉 총령 동쪽의 당나라 서북 영토를 가리킨다.15
그곳은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확실히 서역은 자연환경이 유난히 좋았다. 기후 변화가 있기 전에는 더욱 그랬다. 천산 북쪽에는 광활한 목장이 있었고 남쪽에는 비옥한 녹지가 있었으며 산은 온통 원시림에 뒤덮여 있었다. 또 중가르 분지에는 사막이 지나갔고 타림 분지는 빙하가 차가웠으며 투르판 분지는 경치가 빼어났다. 그곳은 각 민족 사람들이 번성하며 살아온 고향이었다.
서역에는 틀림없이 수많은 민족이 살았으며 그들이 쓰는 언어는 더욱 다채로웠다. 알타이어족인 돌궐어도 있었고 인도유럽어족인 이란어, 인도어, 스키타이어(Scythian), 소그드어(Sogdian), 토카라어(Tocharian)도 있었다. 당시 뾰족한 모자를 쓰고 이란어로 말하던 사카인(Saka)이 일리강변을 지날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또한 가장 먼저 중원의 양잠 기술을 얻은 우전인들이 남강의 녹지에 나라를 세웠을 때 어떤 광경이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서역은 숱한 운치를 지닌 땅이었다.
숱한 운치를 지닌 서역인들은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를 향한 드넓은 심경을 표현하였다. 그곳에서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갠지스강 유역에 있는 것처럼 숭배를 받았고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초상화법이 또 부활했으며 그리스와 인도의 영향을 받은 조소와 벽화에는 짙은 이국정서가 넘쳤다. 그리고 페르시아 혹은 로마 스타일의 공예품이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그 모든 것은 전부 호선무, 포도주, 유리잔과 함께 중국에 들어왔다. 물론 실크로드에서 끊이지 않고 맑게 울리던 낙타방울을 뒤따라 왔다.17
그렇다. 서역은 동서 문화의 합류점이었다.
미녀가 많은 곳에는 영웅이 앞 다퉈 모여들게 마련이다. 특히 투르판 분지에 위치해 서역의 문호로 변한 고창국高昌國은 두말할 여지없이 당나라와 서돌궐의 쟁탈 대상이 되었다. 그 땅을 통제하면 곧 실크로드를 통제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고 나면 당시 고창왕高昌王이 왜 스스로를 보물로 간주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실 그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고창국은 차사전국車師前國의 옛 땅에 세워졌고 국왕은 틀림없이 이민족에 동화된 한족이었으며 동시에 불교도였다. 서기 629년, 현장玄奘 법사는 서천으로 불경을 가지러 가다가 고창국을 지났고 국왕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다시 말해 당 태종이 천카간이 된 그해에 그 국왕은 당나라에 귀순했다.18
이 일을 서돌궐은 당연히 좌시하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고창왕에게 호의의 메시지를 보냈다. 고창왕은 서돌궐의 친근한 미소만 보고 어리석게도 자신이 대단한 줄 알았으며 서돌궐만 믿고 당나라에 대해 태도를 싹 바꿨다.
의심의 여지없이 두 강국 사이에 낀 소국으로서 고창국은 자신을 보전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가장 옳은 방법은 역시 당나라와 서돌궐과 모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만약 조금 더 똑똑했다면 실크로드에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중간상이나, 심지어 두 강국의 분쟁을 화해시키는 평화 사절이 됐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창왕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졌다. 서돌궐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길을 막고 노략질까지 했다. 장안으로 가던 서역 각국의 사절들은 그에게 억류당했고 당나라에 귀속된 이오(伊吾. 지금의 신장 하미哈密)도 그에게 위협을 당했다. 보아하니 그는 현장 법사에게 한 달이나 경건하게 불경 강의를 들었는데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듯하다.
당 태종은 당연히 용납하지 않았다. 정관 13년(639), 그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군을 파견해 고창국을 토벌하게 했다. 그 소식을 듣고서 고창왕은 코웃음을 쳤다. 장안에서 고창국까지는 단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온갖 험난한 고비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 2천 리의 사막 지역만 해도 당나라군이 뒷걸음질 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지칠 대로 지친 적을 맞이해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고창왕은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계산은 틀렸다. 이듬해, 한족 그리고 동돌궐과 철륵부의 부족으로 혼합 편성된 당나라군이 들이닥쳐, 미처 방비가 안 돼 있던 고창왕은 혼비백산해 목숨을 잃었다. 고창국과 존망을 함께하리라 맹세했던 서돌궐의 지원군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간담이 서늘해져 야반도주를 했다. 그때의 상황은 당시 어느 민요의 내용과 같았다. “고창의 병마는 눈서리와 같았고, 한나라의 병마는 해와 달과 같았네. 해와 달이 눈서리를 비추자, 금세 스스로 사라져버렸네.”
고창국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나라군이 성 아래 도착했을 때, 막 왕위를 이은 새 고창왕은 본래 더 겨뤄볼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 젊은 왕은 직접 당나라 군영에 찾아가, 당나라의 미움을 산 것은 선왕의 일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불손한 태도로 살 길을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당나라군의 한 장수가 탁자를 치고 일어섰다.
“이 조무래기와 잡담은 그만하고 성이나 함락합시다!”
젊은 국왕은 놀라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 ‘조무래기’는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끌려가서 당 태종의 발치에 바쳐졌다. 보석이 박힌 그의 칼은 원정에 참가한 동돌궐 장수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에게 하사되었다. 승전한 뒤, 추호도 범죄를 안 저지른 것에 대한 상이었다.
그 후, 위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 태종은 멸망한 고창국을 당나라의 한 주로 바꾸었다. 그 이름은 서주西州였다. 서돌궐의 수중에서 빼앗은 부도성(浮圖城. 지금의 신장 지무사얼현吉木薩爾縣)도 똑같이 정주庭州로 바꿨다. 서역을 관할하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는 차사전국의 옛 교하성交河城에 세웠다.19
첫 전투에서 승리한 당나라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정관 18년(644), 고창 서쪽의 언기焉耆가 멸망했다. 언기는 보스턴 호수 서북쪽 기슭에 있었고 도읍은 지금의 신장 옌치焉耆 회족回族 자치현이었다. 그들은 본래 고창과 숙적이었지만 고창국이 망한 뒤, 서돌궐 쪽으로 기울었다. 당시 서돌궐의 외교력이 뛰어났고 당나라의 군사력에 그들이 겁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기의 배신은 당나라에 토벌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향후 사태의 변화는 완전히 당 태종의 계획 안에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 태종은 심지어 언기가 멸망할 날짜까지 정확히 예측했다고 한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시종에게 자신의 그 예측을 밝혔을 때, 전방의 첩보가 딱 맞춰 도착했다고 한다.20
다음 목표는 구자龜玆였다.
구자는 도읍이 지금의 신장 쿠처현庫車縣에 있었고 실크로드에서 가장 매력적인 녹지였다. 우리는 3가지 예만 접해도 이 오래된 문명국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구자의 악무(樂舞. 음악 반주가 있는 춤)는 돈황 막고굴莫高窟의 불교 석굴에 비견될 만큼 천하를 풍미했고 현장만큼 유명했던 불경 번역가 구마라습鳩摩羅什은 본래 구자에서 활동했다. 이밖에 구자는 또 고대 인도유럽어가 아시아에서 가장 멀리까지 분포한 지점을 알려주는 지명이기도 하다.
북아시아 전체를 통제하기로 결심한 당 태종이 구자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인물은 바로 동돌궐의 왕자 아사나사이였고 조력자는 철륵부의 장수 계필하력契苾何力, 안서도호 곽효각郭孝恪 등이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구자국의 왕은 대경실색했다. 이치대로라면 그들은 동남쪽에서 왔어야 했는데 천만뜻밖에도 서북쪽에서 천산을 넘어왔기 때문이었다.21
그 후의 이야기는 그리 놀랄 만한 게 없다. 용감하고 전투에 능한 구자의 병사들은 패주하는 척하는 당나라군에 의해 사막으로 유인되어 일거에 섬멸되었고 왕성王城과, 국왕이 도망쳐 사수한 발환성(撥換城. 지금의 신장 아커쑤阿克蘇)도 차례로 격파되어 구자왕은 포로가 되었다. 그 장관이 나중에 쿠처커쯔얼庫車克孜爾 석굴 벽화에 생생히 묘사되었다고 한다.22
오래된 문명국가 하나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구자의 멸망은 서역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결과, 태종은 병졸 하나 잃지 않고 구자 만한 면적의 두 왕국인 우전과 소륵(疏勒. 지금의 신장 카스喀什)을 얻었다. 그들이 거의 자청해 귀순해온 것이다. 승리의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제국은 구자, 소륵, 우전, 쇄엽(碎葉.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톡모크), 4개 군구軍區를 설치했고 합쳐서 ‘안서사진安西四鎭’이라 불렀다.
서기 657년, 당 고종 현경顯慶 2년에 대장 소정방蘇定方이 원정군을 이끌고 서돌궐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그 강력한 공세 앞에 서돌궐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의 카간은 석국(石國. 도읍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었다)으로 도망쳤지만 석국인들에게 붙잡혀 당나라군에 인도되었다. 그 후로 서돌궐은 구심점을 잃고 뿔뿔히 흩어져 당 현종 천보天寶 원년(743)에 완전히 멸망했다.
바로 그해에 당나라는 번영의 정점에 이르렀다.
현장 법사는 언기가 망한 이듬해에 귀국했다. 고창왕과 다시 만나자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그는 빠른 바닷길을 포기하고 왔던 길을 택했지만 도중에 고창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비심을 마음에 품고서 법사는 눈물을 닦고 멀리 하늘을 향해 절을 한 뒤, 곧장 우전에서 장안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