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관료정치 5

3-5 과거

과거는 중국 제국 역사상 3번째 관리 선발제도였다. 앞의 2가지는 양한의 찰거察擧와 위진남북조의 천거薦擧였다. 천거는 보통 대신이 황제에게 인재를 추천하고 연대 책임을 지는 제도를 가리켰는데 한나라 때 생겼으며 본서에서는 그 대표적인 예로 위진남북조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지목한 바 있다. 찰거, 천거, 과거는 고대 중국에서는 다 선거라고 불렸다. 선은 선택이고 거는 발탁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 정치의 선거는 표거票擧나 표선票選으로 이름을 바꿔야 옳을 듯하다. 단지 선거의 일종일 뿐인 것이다.

그러면 과거는 어떤 독특한 점이 있었을까?

먼저 찰거와 천거에 관해 살펴야 한다. 학자들은 늘 이 두 가지 선거 방식을 혼동하곤 하는데 사실 차이가 매우 뚜렷하다. 우선 찰거의 집행인은 제국의 각급 관리로서 재상부터 군수까지 모두 인재를 고찰하고 추천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천거의 집행인은 대부분 명문세가에서 담당했고 ‘중정관中正官’이라는 이름의 전문 관리였다. 그래서 “상품上品에는 한문寒門이 없고 하품下品에는 세족勢族이 없다”라는 문벌정치가 형성되었다.

또한 찰거는 과를 나누고 급은 나누지 않았는데 천거는 급을 나누고 과는 나누지 않았다. 찰거는 인재를 장점에 따라 분류했다. 예를 들어 재능이 탁월하면 수재秀才로, 품행이 단정하면 효렴孝廉으로 분류했다. 이것이 바로 과목科目이었다. 천거는 인재를 등급으로 나누었다.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 모두 9등급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찰거든 천거든 모두 시험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인재에 대해 ‘고찰’만 하고 ‘고시’는 치르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고찰이 형식이 되고 말았다. 수재인데 글을 몰랐고 효렴인데 아버지와 따로 살았다. 이른바 인재 중 대다수가 가짜였다. 한 영제靈帝는 아예 가격을 매겨 관직을 팔았고 제국은 곧 망했다.

남조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다. 불로소득이 습관이 돼서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갈수록 부패하고 무능해졌다. 그들은 큰일은 못하고 작은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녹봉만 챙기며 직무를 유기하다가 결국 왕조와 함께 끝장이 나고 말았다.

겉만 보고 출신만 따지다 가짜와 기생충을 양산했으니 당연히 개혁이 필요했다.

그러면 개혁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시험이었다.

과거는 반드시 시험을 봐야 했다. 국가가 통일적으로 조직한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한 것은 중국인의 커다란 발명이었고 현대 공무원 제도의 효시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상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탐색의 과정이 필요했다. 사실 당나라의 과거는 전적으로 답안지만 보지는 않았다. 고관과 귀인, 사회 명사의 추천도 합격과 등수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추천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져 오히려 부정을 저지르기가 쉽지 않았다.17

서응徐凝과 장호張祜의 예를 살펴보자.

서응과 장호는 모두 인재였고 시인이었다. 그들은 지역 시험에서 일등을 다투었는데, 마침 항주자사 백거이의 연회에 초대받아 자신들의 시구를 낭송하게 되었다. 장호가 먼저 “해와 달의 빛이 먼저 닿으니, 산하의 기세가 전부 왔네.”(日月光先到, 山河勢盡來.)라고 읊자, 서응이 “오래도록 폭포가 흰 비단처럼 날아, 파란 산색에 길게 새겨졌네.”(千古長如白練飛, 一條界破靑山色.)라고 응수했다. 이에 장호는 놀라 답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회 여론은 서응이 일등이 돼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18

그러나 당나라 중엽 이후에는 사회 기풍이 날로 기울어 시험관과 추천자가 사욕을 위해 부정을 저질렀고 심지어 권세를 믿고 남을 업신여기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배사겸裴思謙이라는 자는 우두머리 환관인 구사량仇士良의 추천서를 들고 공원(貢院. 시험 기관 겸 시험장)에 난입해 예부시랑 고개高鍇에게 장원 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구사량은 극악무도해서 황제조차 두려워하는 자였기 때문에 고해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다른 등수는 안 되겠소?”
“위에서 장원은 배 수재(秀才. 과거 응시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그래도 내가 당사자는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아니오?”

배사겸이 답했다.

“내가 바로 그 배 수재, 배사겸입니다.”19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송나라 이후에는 시험만 인정했고 명청 양대에는 시험장이 전쟁터 같아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시험 문제 유출, 대리 시험, 뇌물 수수 같은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얼마나 큰 풍파가 일어나고 또 얼마나 많은 이의 목이 떨어질지 알 수 없었다.

확실히, 시험을 견지하고 또 시험을 근거로 삼은 것은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똑같이 관리를 선발하더라도 과거와 다른 방식은 4가지 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과목의 수립, 통일적인 시험, 공정한 경쟁, 성적 우수자의 채용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는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국의 주요 인재 선발 제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과거는 한 가지 보조 정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수험생 자격의 인증이었다. 첫 번째는 생도生徒였는데, 그들은 교육기관인 국학國學, 주학州學 그리고 현학縣學의 학생이었다. 각 기관에는 정원定員이 있었기 때문에 생도는 생원生員이라고도 불렸다. 관료가 정원이 있어 관원官員이라 불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는 향공鄕貢이라 불렸는데 생도가 아닌 기타 지식인을 가리켰다. 일정한 정치적, 신체적 조건에만 부합하면 주현州縣에 지원하고 주현의 추천을 받아 상서성의 시험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로써 많은 이들이 과거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정책이 제국 정부가 최대한도로 문호를 개방해 가문과 신분이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었음을 의미함으로써 서족지주 지식인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은 것이었다. 동시에 이 정책은 지식인에게 자기 추천의 가능성이 생겼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과거를 ‘자거自擧’라고 부른 학자도 있다.20
자거는 역시 놀라운 발전이었다.

상서성 시험에 참가하는 생도와 향공은 당나라 때는 거인擧人 혹은 거자擧子라 불렸다. 정규적인 과거시험 같으면 그들은 그 전해 10월, 상서성에 지원해 본인임을 확인받고 이듬해 정월, 시험에 참가했으며(시험 장소는 전기에는 상서성 도당이었고 후기에는 예부의 공원이었다) 방이 붙는 것은 대략 2월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를 가리킬 뿐이다.

그러면 과거에서는 어떤 시험을 실시했을까?

당나라 때는 과목이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수재秀才였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책方略策을 물었고 성적은 글의 조리 있음을 따져 4등급으로 나눴다. 이것은 대단히 치기 힘든 과목이었다. 게다가 수재과를 친 거자가 전부 낙제하면 주의 장관은 처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이 과목은 점차 지원자가 줄어 폐지됐으며 수재라는 말도 명청 때가 되어서는 생원의 대명사가 되었다.

치기 쉬운 과목은 명경明經이었고 수재보다는 쉽고 명경보다는 어려운 과목은 진사進士였다. 진사는 수 양제가 개설했는데 그 목적은 사족이 경학經學을 독점하는 한계를 타파하고 서족지주에게 문호를 활짝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종종 수 양제의 진사과 개설을 과거제도의 시작으로 간주한다.21

이미 사실로 증명되었듯이 진사과의 설계는 옳았다. 명경과는 유가경전을, 진사과는 시무책時務策을 시험 문제로 냈다. 전자는 죽기 살기로 외우기만 하면 됐지만 후자는 진정한 재능과 견실한 학식이 다 요구되었다. 당시 “서른에 명경에 합격하면 늦은 것이고 오십에 진사에 합격하면 이른 것이다”(三十老明經, 五十少進士)라는 말이 있을 만도 했다.22

그러나 당나라인은 진사과만 떼 지어 응시했다. 진사과의 시무책이 수재과의 방략책보다 시험 보기가 쉬웠기 때문이지만(시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동시에 경전을 근거로 대책을 제기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합격률은 겨우 1, 2퍼센트밖에 안 됐다. 그래서 진사 급제는 꽤 체면이 서는 일이었으므로 인기가 식을 날이 없었다.

더욱이 진사는 전도유망한 고급 관리 후보자였다. 물론 당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예부의 시험에 통과해도 단지 급제일 뿐, 이부의 시험도 또 쳐야 했다. 이부의 시험에 합격해 ‘춘관春關’이라는 증명서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능력과 자격이 검증된” 정식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머지않아 출세의 길을 걷게 돼 있었다.

그래서 급제한 진사는 만인에게 주목을 받았고 그들 자신도 득의양양했다. 금가루로 장식한 편지로 가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시험관에게 감사하고 재상을 찾아가 만났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 그중 가장 즐거운 행사는 ‘행원탐화杏園探花’였다. 당나라인은 행화, 즉 살구꽃을 과거의 상서로운 상징으로 여겼다. 그래서 살구꽃 핀 정원에서 연회를 열고 급제한 진사들 중 가장 젊고 잘생긴 두 명을 탐화랑探花郎으로 삼아 말을 타고 거리를 돌며 아름다운 꽃을 구해오게 했다. 탐화는 명청 때가 되어, 과거시험의 1, 2등인 장원壯元, 방안榜眼 뒤의 3등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23

장안성의 유흥가도 당연히 그 새 귀인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돈도 두 배로 받았다). 그래서 꾀꼬리가 노래 부르고 제비가 춤출 때 기생을 옆에 두고 술잔이 돌아가는 와중에 새로운 관료집단과 사회계층이 은연중에 탄생했다.

훗날 당나라의 시인 맹교孟郊가 시 두 구절로 이 모든 것을 개괄했다. “봄바람에 뜻을 얻어 세차게 말을 달리니, 하루 만에 장안의 꽃을 다 보았네.”(春風得意馬蹄疾, 一日看盡長安花)24

낙제한 거자들은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았거나 재력이 부족한 이를 제외하고는 매년 계속 시험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들 개인에게는 당연히 불행한 일이었지만 제국에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자칫 제국의 불안 요소가 될 수도 있었던 그 지식인들이 시험장에서 허송세월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조하趙嘏라는 당나라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구로 천기누설을 했다. “태종 황제는 실로 장구한 계책을 세워, 영웅을 얻어서 다 백발이 되게 했네.”(太宗皇帝眞長策, 賺得英雄盡白頭.)25

사실 당 태종은 꼭 그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언젠가 방이 나붙었을 때, 급제한 진사들이 한 명씩 방 밑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고 한다.

“천하의 영웅들이 내 ‘구彀’ 안으로 들어왔도다!”

구는 함정이나 우리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당 태종은 당연히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천하의 영웅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민족들까지 거의 그의 구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역도 그랬고 토번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