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 은거지에 찾아온 가을 저녁山居秋暝/당唐 왕유王維
空山新雨後 조용한 산 내리던 비 그친 뒤에
天氣晚來秋 저녁이 되자 날씨가 가을 기운
明月松間照 밝은 달빛 소나무 계곡 비추고
清泉石上流 맑은 샘물 바위 위를 흘러가네
竹喧歸浣女 빨래하던 여인 가는지 대숲 서걱대고
蓮動下漁舟 고깃배라도 내려가나 연잎 흔들리네
隨意春芳歇 봄꽃이 제 홀로 피었다지더라도
王孫自可留 은자는 이곳에서 살기 괜찮다네
이 시는 왕유(王維, 701~761)가 종남산 망천장(輞川莊)에 있을 때 지은 시로 극히 뛰어난 산수시의 명작이라 할 만하다. 맑은 산수의 아취와 한가한 산간의 풍정이 시각과 청각을 조화시킨 대구의 구법 속에 잘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시인 자신의 은거에 대한 철학과 의지가 마지막 부분에 강하게 드러나 있다.
여름도 막바지에 비가 내리다가 좀 전에 그쳤는데 저녁이 되자 가을 분위기가 나는 것으로 이 시는 시작 된다. 제목을 풀어낸 것이다.
그 다음 4구는 비가 그친 뒤 저녁에서 밤이 되는 시간의 산간의 청신한 풍경과 산간 주민들의 고즈넉한 생활 풍정을 그리고 있다. 비에 씻긴 소나무가 늘어선 계곡에 밝은 달빛이 쏟아지고 있고 금방 비가 그쳐 물이 불은 맑은 계곡물이 너럭바위 위를 흘러가고 있다. 고요한 산에 대나무가 흔들거리며 잎과 줄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아마도 비가 그쳐 빨래를 나온 여인들이 빨래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양이고, 긴 연잎이 흔든 흔들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고기잡이배가 어딜 나가는 모양이다.
여기서 ‘죽훤(竹喧)’을 아녀자들이 빨래를 마치고 가면서 웃고 떠드는 소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시를 모르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오히려 대나무 서걱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사방이 극히 조용한 것을 표현한 말이므로 여인들이 귀가하는 길에 대나무를 잡거나 건드려 소리가 나는 것이지 쾌활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대구에서 연이 움직인 것을 보면 절로 알 수 있다.
마지막 2구는 고사가 있다. 시에서 가을을 다루다가 왜 갑자기 봄꽃이 시든다는 말이 나온 것일까?
《초사(楚辭)》 <초은사(招隱士)>를 보면, “왕손은 떠돌아다니며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은 돋아나 무성하구나. 날은 저물어 마음 기댈 곳 없건만 매미들만 처연하게 울어대네. (중략) 왕손이여 돌아오소서. 산속에서는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 歲暮兮不自聊, 蟪蛄鳴兮啾啾. (중략 )王孫兮歸來, 山中兮不可以久留.]”라는 내용이 있다.
‘초은사(招隱士)’는 초나라 수도인 영(郢)을 떠나 산간을 떠도는 굴원(屈原)보고 빨리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호랑이와 표범이 싸우고 바위와 수목이 들어찬 그 험하고 위험한 산에 있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굴원이고 봄풀은 초나라 영의 귀족들의 거처에 난 아름다운 봄꽃을 의미하며, 머물러서는 안 될 곳은 바로 굴원이 떠도는 산야가 된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온 왕손(王孫)은 굴원 고사를 배경으로 생긴 말이지만 문맥으로는 망천에 은거하고 있는 왕유 자신이다.
‘수의춘방헐(隨意春芳歇)’은 제 뜻대로 봄꽃이 시들어간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아름다운 봄꽃을 그 봄꽃의 주인이 보아주지 못하는 가운데 봄꽃 홀로 제 뜻대로 아름답게 피었다가 시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굳이 사족을 보태자면, 여기서 말하는 봄꽃은 왕유가 지금 살고 있는 종남산의 망천이 아니라 장안 빈집에서 시들고 있는 것이다. 즉 장안의 봄꽃이 시들어가건 말건 은거 생활은 하는 왕유 자신은 오늘 같은 경치를 즐기며 이곳 종남산에 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구절을 망천의 봄꽃은 어느덧 다 시들어 가도 이제 가을이 왔으니 또 살만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원의에 맞지 않는다.
이 시는 은거하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취(禪趣)가 어린 대구가 있어 고금에 애송되고 있고, 화의까지 충만하여 소동파가 말한 시중유화(詩中有畫)의 좋은 예시로 꼽을 수 있다. 《당시배항방》에 33위에 올라 있다.
365일 한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