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관료정치 1

3-1 대배경

중국인들은 보통 중국사의 시작을 당나라와 송나라로 인식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익숙한 시대는 춘추전국도, 진한과 위진도, 또 오호십육국도 아니고 당, 송, 원, 명, 청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 왕조는 혼연일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형성하여, 중국인들은 큰 고민 없이 즉석에서 그 왕조들에 관해 거론할 수 있다.1
그렇다면 그 정체성은 또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삼성육부三省六部와 과거제이다.

과거제와 삼성육부는 모두 수와 당이 창조한 제도이며 이 챕터의 주요 내용이다. 간단히 말하면 삼성육부는 중앙정부의 조직에 관한 제도이고 과거제는 제국 관리들의 선발 제도이다. 그중에서 과거제와 육부제는 청나라 말까지 이어져서 그 존속 기간이 중국 제국사의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당, 송, 원, 명, 청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 제도가 끝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확실히 여기에 비밀이 담겨 있다.

또한 그 비밀은 국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서 계啓가 선양禪讓을 폐지한 시점부터 중국 민족은 선사시대를 뒤로하고 국가시대로 들어섰다. 얼리터우二里頭 유적(하 왕조나 상 왕조 초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 무렵의 청동기 유적. 허난성 얼리터우에서 출토된 고대 도시 유적이 대표적이다.)을 고고학적 증거로 삼으면 이 시대는 지금까지 3천 7백 년간 이어져왔다. 그리고 이 3천 7백 년은 또 3단계로 나뉜다. 진나라의 천하통일 전의 방국시대, 진나라의 천하통일과 신해혁명 사이의 제국시대, 그 이후의 공화국 시대다.

시대가 다르면 정치와 제도도 달랐다.

방국시대에는 국가는 봉건제, 정치는 귀족제였다. 명분상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은 천자가 천하를 제후들에게 분배한 것이 국(國. 방국)이었고 제후들이 방국을 대부들에게 분배한 것이 가(家. 채읍采邑)였다. 제후들은 방국에 대해, 대부들은 채읍에 대해 독립적인 통치권을 향유했는데 이것이 바로 봉건이었다.2

천자는 천하의 공주共主였고 제후는 방국의 국군國君이었으며 대부는 채읍의 가군家君이었다. 그들의 작위와 권력은 전부 가문 내에서 세습되었고 계승권이 없는 자제는 사士가 되었다. 그들이 함께 하나의 계급을 이룬 것이 귀족이다.

귀족이 채읍을 관리하는 것을 제가齊家라 했고 방국을 다스리는 것은 치국治國이라 했으며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평천하平天下라 했다. 하지만 제가든, 치국이든, 평천하든 모두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지 고용된 일은 아니었다. 가와 국은 다 그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봉급과 보수가 없었고 타락할 수는 있었지만 부패할 수는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귀족정치였다.3

방국시대는 귀족의 시대였다.

귀족의 시대도 4단계로 나뉜다. 서주는 왕의 시대, 동주는 제후의 시대, 춘추는 대부의 시대, 전국은 사의 시대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점진적인 귀족계급의 추락과 방국제도의 해체를 의미한다. 어떤 제도와 정치도 영원할 수는 없어서 새로운 국가제도가 필연적으로 탄생했다.

그것은 바로 제국이었다.

제국제도의 특징은 중앙집권이었다. 천하의 소유권과 통치권이 모두 한 사람과 한 가문, 즉 황제와 황족에게 속했다. 황제 밑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전부 똑같이 호적에 편입시킨 것을 ‘편호제민編戶齊民’이라고 했다. 공신과 귀족과 황제의 친척이 왕후로 책봉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더 이상 영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통치권이 없었다.4

그래서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귀족은 이론적으로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실제로도 점차 사라져갔다. 혹은, 제국시대에는 집권 계층은 있어도 귀족계급은 없었으니 당연히 귀족정치도 이어지기 어려웠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무엇일 수 있었고, 또 무엇이어야 했을까?

이치대로라면 황권정치가 맞았다. 진시황과 한 무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 제국은 너무 광활하고 인구가 많아서 전적으로 “황제 혼자 천하를 다스리는” 인치를 실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가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치官治였다.

바꿔 말해 관리가 나라를 다스리거나, 혹은 관리가 대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관리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황제는 높은 곳에서 원수가 되어 국가의 통일과 주권을 대표하는 역할만 하고 정무는 모두 관료집단에 넘겨 처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가의 이상이었다. 관리가 대리한다는 것은 황제가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고 관리는 대리인과 집행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법가의 주장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관리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관리가 대리하는 것은 대립물의 통일이었다. 왜냐하면 관료집단이 제국을 다스리더라도 황권정치의 틀 안에서 다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황제가 일인 독재를 하더라도 중앙의 정무도 관리가 처리해야 했고 지방의 행정도 관리가 대리를 해야 했다. 황제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국의 정치는 관료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황권정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귀족정치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모순과 부패가 시류에 따라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족의 치국과 제가는 사실 자신이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었고 다툼이 생겨도 그것은 청부받을 권한을 둘러싼 쟁탈전이었다. 나중에 제후들이 겸병 전쟁을 일으킨 것도, 대부들이 국유재산을 집어삼킨 것도 본질적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황권정치와 관료정치는 줄곧 책임과 권리와 이익이 불분명했다. 예를 들어 천하와 국가는 도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애매모호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의 천하다”(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人之天下也)라고 했다. 이렇게 모순이 되니 어떻게 소유권이 불분명하지 않았겠는가?5

소유권의 귀속이 불분명하면 책임이 명확치 않아 동요가 생기게 마련이다. 결국, 황제가 강세일 때는 황권정치였고 황제가 약세일 때는 관료정치였다.

마찬가지로 중앙의 통치력이 멀리 못 미치고 황제가 구체적인 일들에 다 관여하지 못하면, 관리의 권력과 이익 추구에 너무 많은 여지를 남겨주었다. 게다가 관리는 제국이라는 회사에서 지분도 배당도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황권 대리의 기회를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도모했고 끝내 부패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국의 근본적인 위험 요소였다.

관료제도가 여러 차례 개혁된 것도 여기에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유생儒生이 기본 성원이었던 관료집단은 항상 더 많은 권력을 나눠 받길 원했다. 그것은 이익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상이 더 큰 동기로 작용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상적인 정치는 당연히 군주와 신하가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문관 정부를 수립해 왕도와 어진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정관의 치가 숭배를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타깝게도 역사에는 당 태종과 송 태조 같은 개명황제도 있지만 진시황, 한 무제, 주원장처럼 패도를 일삼은 황제도 있다. 왕도는 줄곧 패도를 이기지 못했으며 황권과 관치의 투쟁도 계속되어 연이은 정치체제 개혁을 야기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역시 누가 통치계급이 됐느냐는 것이다.
방국시대의 통치계급은 영주였고 제국시대의 통치계급은 지주였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역사적 차이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지주계급이 중앙집권의 제국제도에 가장 적합한지 확실해지기까지는 기나긴 실험과 탐색이 필요했다.

먼저 무대에 오른 것은 귀족지주계급이었고 시기는 진한 시대였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진한은 제1제국으로서 막 방국시대에서 넘어오기까지 귀족지주가 중개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서한 초기에는 황족과 공신 집단이 함께 조정을 관장했고 귀족 출신의 제후가 재상을 맡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것은 당연히 제국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방과 여후呂后의 토사구팽과, 한 무제의 여러 번에 걸친 권력 탈취가 있었다. 실제로 제후가 재상을 맡는 관례를 한 무제가 깨고 평민 출신의 공손홍公孫弘을 승상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이미 귀족지주가 통치계급이 될 수 없음을 의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공신만 막고 외척은 피하지 못해서 역시 귀족지주가 계속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한 무제는 어쨌든 오직 유교만 숭상했고 공부를 해서 관리가 되는 것도 점차 사회적 기풍이 되었다. 이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사회집단이 바로 사족士族 혹은 사족지주계급이었다. 이렇게 해서 황족과 천하를 공평하게 나눠 갖는 집단은 공신 집단과 외척 집단에서 명문 망족望族으로 변했고 마침내 문벌정치가 형성되었다.

문벌은 일종의 반半관료, 반귀족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관료는 마땅히 오늘날의 전문 경영인과 유사해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관료집단이 황권과 맞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출신이 고귀하면 곤란했다. 그래서 한문寒門 서족庶族, 즉 서족지주계급이 가장 적합했고 문벌제도는 단지 연결고리에 불과했다.

제도 변혁의 배후에는 역사의 추세가 존재했다.

이제 귀족지주와 사족지주는 모두 역사적 사명을 완성했다. 당, 송, 원, 명, 청은 서족지주의 시대가 될 예정이었으며 수와 당은 중요한 전환기였다.

그때 두 가지 제도가 창조되었다. 하나는 제국 관리의 선발제도, 즉 과거제였고 그 목적은 서족지주가 사족지주를 대신해 통치계급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중앙정부의 조직 관련 제도인 삼성육부제였고 그 목적은 황권정치와 관료정치의 조화와 균형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삼성육부는 무엇이었을까?

또한 그 제도는 어떻게 황권과 관료 간의 균형을 맞췄을까?

출처 太史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