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당 태종 3

2-3 천 카간

이연은 장안에서 성공했고 수 양제는 강도에서 패망했다.20
그렇다. 이연은 장안을 점거하고 수나라 황실을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는 유리한 지위를 얻었다. 반대로 수 양제는 관중 위주의 정책을 폐기하는 바람에 필연적으로 관롱집단에게 버림을 받았다. 수 양제가 죽을 때까지 몰랐던 문제의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양광은 낙양을 건설해야만 했고 남북을 잇는 대운하도 개통해야만 했다. 그의 유일한 잘못은 백성을 미천한 존재로 취급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공적이 되어 강도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문제가 있는데, 그는 왜 수도 장안을 13세의 아이에게 맡기고 태원은 또 이연에게 준 것일까?

아마도 돌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궐은 흉노와 선비의 뒤를 이어 중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북방 유목민족이다. 애석하게도 이 오래된 민족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매우 적다. 그들이 기원한 지역이 정가 분지 이북이고 늑대가 부락의 토템이라는 것, 일찍이 유연柔然을 섬겨서 그들을 위해 알타이산에서 쇠를 주조하다가 돌궐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는 것, 그리고 처음 중국사의 시야에 들어온 시점이 서위 문제 때 대통 8년(542)이라는 것 정도이다.

그런데 북주 시기에 와서 돌궐은 강대한 칸국汗國을 수립하여 영토가 동쪽으로는 요하遼河 상류,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에 이르렀다. 돌궐인의 국가를 칸국이라 부른 까닭은 국왕의 칭호가 카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칭호는 그들이 유연에게서 모방한 것으로서 흉노의 선우單于에 해당했다.

서위 말에서 수나라 초까지 돌궐은 사실상 유라시아 초원에서 최강의 국가로서 동서양의 교통과 무역을 통제했다. 서양에서는 비잔틴 제국과 비밀리에 손잡고 이란의 사산 왕조를 함께 멸하기로 약조를 맺었고, 동양에서는 당연히 장성을 넘나들었는데 대부분 좋은 뜻으로 그랬을 리도, 빈손으로 돌아가려 했을 리도 없었다.21

돌궐은 흉노 이후 중국 북쪽 변경의 우환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돌궐은 개황 3년(583), 정식으로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어 수나라에게 이간질과 와해 공작의 기회를 주었다. 그 결과, 동돌궐의 계민啓民 카간은 스스로 신하라 칭했고 서돌궐의 니궐처라泥撅處羅 카간은 투항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대대손손 서돌궐과 원수지간인 페르시아 제국도 와서 우호를 표시했으니 수 양제의 외교는 크게 성공한 셈이었다.

하지만 정치투쟁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법이다. 동돌궐의 계민 카간이 죽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시필 카간은 수 양제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는 심지어 대업 11년(615) 8월에 수십만의 기병으로, 3번째 북쪽 순방에 나선 수 양제를 안문(雁門.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이현代縣)에서 포위하여 거의 그의 목숨을 빼앗을 뻔했다.

수 양제는 그 후로 재기하지 못했다.22

하지만 시필 카간은 앉아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법을 배웠다. 수 양제는 그와 서돌궐 사이에서 왔다갔다했고 그는 수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이익을 취했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에게 붙으면 천자로 봉해주었고 반정부 무장세력들은 그 칭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 양제가 돌궐에게 쓰던 수법을 거꾸로 돌려준 것이다.23

그래서 수 양제가 이연을 태원에 배치한 것이다. 돌궐은 꼭 막아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돌궐은 물론 북방의 늑대였지만 이연은 집 지키는 개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야심이 컸고 또 교활했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라면 시필 카간에게 허리를 숙이고 신하가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의 주모자는 바로 이세민이었다.24
그 일은 역사에 전과로 남아 당나라의 군신君臣에게 근심을 안겼다. 더구나 건국 이후, 시필 카간은 자신과 이연의 특수한 관계를 빌미로 당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계승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힐리頡利 카간은 툭하면 쳐들어와 소란을 피웠다. 아직 입지가 약했던 이연은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양보하며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25

돌궐의 Baldakur(巴尔达库尔) 암벽화, 출처 天水俱乐部特评

돌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장차 나라가 평안하지 못할 게 뻔했다.

사실 현무문의 변도 아마 돌궐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돌궐의 철갑기병이 오성(烏城. 지금의 내몽골 우선치烏審旗나 산시성陝西省 딩볜현定邊縣)을 포위해서 이원길이 통병원수統兵元帥가 되어 구원하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세민은 밀정에게서 첩보를 받았다고 한다. 태자가 이원길의 송별연에서 그를 모살하려 하고, 또 그의 심복 울지경덕 등을 이원길의 부대에 배치해 전장에서 몰래 처단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세민은 자신을 지키려고 부득이 반격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첩보도 백 퍼센트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런 첩보가 과연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현무문의 변 이후에 돌궐이 출병하여 쳐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울지경덕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힐리 카간이 위수 북쪽까지 이르러, 조정과 백성들이 다 놀라고 장안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당시는 진왕 이세민이 막 황위에 오른 때였다.

실제로 장안의 계엄령과 태종의 등극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이것은 상황이 너무 급박해 이연 부자가 천천히 의식을 거행할 여유가 부족했고, 또한 돌궐 격퇴의 희망이 용감하고 전투에 능한 이세민에게 온통 걸려 있었음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맹장 울지경덕의 방어선이 이미 무너졌고 장안성 내에는 병력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당 태종은 도대체 무엇에 의지해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을까?27

용기와 지혜였다.

8월 28일, 힐리 카간은 장안에 사신을 보내 내부 사정을 탐지하고 위세를 떨치고 오게 했다. 그 사신은 카간이 지휘하는 백만 대군이 벌써 준비를 다 갖췄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에 당 태종은 서슴지 않고 그를 꾸짖었다.

“나는 일찍이 너희의 카간과 만나 맹약을 맺었는데 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냐? 너희는 비록 오랑캐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느냐? 만약 강하다고 또 우쭐댄다면 당장 너를 죽여 버리겠다!“

말을 마치고서 당 태종은 그자를 문하성門下省에 가둔 뒤, 5명의 대신과 함께 현무문을 나섰다. 그들 6명은 곧 위수 강변에 도착해 강을 사이에 두고 힐리 카간과 마주보았다. 이때 돌궐의 각 추장들은 당나라의 천자가 늠름한 자세로 말을 탄 채 마치 정원을 산책하듯 여유롭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그 29세의 젊은 황제를 향해 돌궐의 대례를 올림으로써 자신들의 카간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당나라의 군대도 위수에 이르렀다. 그들의 깃발이 가을바람 속에 드높이 펄럭였고 그들의 투구와 갑옷이 햇빛 아래 번쩍였으며 그들 자신도 정연한 대열과 걸음으로 제국의 위엄을 과시했다.

돌궐의 추장들은 또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태종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군대를 뒤로 물린 뒤, 직접 말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 힐리 카간과 일대일 담판을 벌였다. 정사에는 그 담판의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런데 2년 전, 힐리 카간이 침입해왔을 때, 진왕 이세민은 그에게 일대일로 결투를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황제 이세민은 분명 근엄한 어조로 상대가 신의를 어겼다고 꾸짖지 않았을까?
이틀 뒤, 쌍방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장안이 포위에서 풀려 당나라는 구원을 받았다. 각 민족의 백성들도 전쟁의 재난을 면했다. 그것은 당 태종이 생명의 위험과 맞바꾼 결과였다. 사실 당시에 대신들이 말을 가로막고 만류했지만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돌궐이 대담하게 쳐들어온 것은 우리가 내란을 겪고 짐이 막 즉위해 저항할 힘이 없을 것이라고 얕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기만 하면 오랑캐는 틀림없이 싸우지 않고 물러갈 것이다.“

그러면 돌궐이 퇴각할 때 그들을 추적해야 했을까?

당 태종은 추적하지 말자고 했다.

“나는 벌써 돌궐의 퇴로에 군대를 매복시켜 놓았으므로 그들을 멸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쌍방에 모두 사상자가 생길 것이다. 문제도 해결 못하고 원한만 맺힐 터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백성들도 아직 부유하지 못하니 조용히 지나가는 것이 낫다. 돌궐의 칸국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그들이 사분오열되었을 때 일망타진해도 늦지 않다.”28

알고 보니 당 태종은 정치전에 심리전까지 벌인 것이었다.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 정치를 알아야 반드시 이기고 안이 어지러우면 반드시 패한다. 실제로 사태는 태종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돌궐의 칸국은 무력의 위협과 재물의 약탈에 의지해 세워진 느슨한 연합체였으므로 금세 흐트러져버렸고 당나라는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에서 반격을 노렸다.

정관貞觀 3년(629) 11월, 전쟁이 전면 개시되었다. 그리고 반년도 되지 않아 당나라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서쪽의 음산陰山에서 북쪽의 대사막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 전부 당 제국의 판도에 들어왔고 힐리 카간이 포로가 됨으로써 동돌궐은 멸망했다.

이 소식을 듣고 태상황 이연은 몹시 기뻐했다.

“옛날, 한 고조가 흉노에게 포위됐었는데 지금 내 아들이 돌궐을 멸했구나. 내가 후계자를 잘 골랐다!“

그래서 그는 왕공과 귀족을 불러 능연각凌煙閣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자, 태상황은 직접 비파를 탔고 당 태종은 경쾌하게 춤을 추었으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태종을 더 만족시킨 것은 본래 돌궐의 통치를 받던 북방 각 민족의 추장들에 의해 ‘천天 카간’으로 추대됨으로써 그 민족들 공통의 황제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겸허하게 말했다.

“나는 대당의 천자인데 카간의 일까지 또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응답은 “만세! 만세! 만만세!”였다.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