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수 양제 4

1-4 그 캄캄했던 밤

수 양제는 쉴 새 없이 큰일을 벌이다 죽음을 자초했다.

죽기 전 강도에 머무른 1년 반을 빼고는 수 양제는 재위 15년간 거의 매년 큰일을 벌였고 단 한 시도 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이 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운하를 판 것은 그 혜택이 대대손손 이어졌고 고구려 원정은 수 문제부터 당 태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황제의 숙원이었으며 당 고종에 가서야 겨우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사실에 입각해 시비를 따진다면 수 양제는 질책을 받아서는 안 된다.

단지 안타깝게도 양제가 큰일을 벌일 때마다 백성들은 고난을 겪었다. 왜냐하면 이 초인적인 정력의 황제는 큰일로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당장 눈앞의 성공에 급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프로젝트마다 크게 벌여 단숨에 해치우는 방식을 선호했고 명령을 집행하는 관리들은 할 수 없이 굼뜬 인부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민중의 인내심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붕괴되는 것은 그들의 마음만이 아니다.

제왕이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면, 대업은 쉽게 무너져 버린다.帝王苦竭生靈力, 大業沙崩固不難.33

수나라가 망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확실히 문제는 수 양제가 무슨 일을 한 데 있지 않고, 그가 일을 너무 빨리, 너무 몰아서 하는 바람에 백성들을 학대한 데 있다. 예를 들어 낙양을 건설할 때는 매달 2백만 명을 동원해 10달 동안 연인원이 2천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공사 기간을 10년으로 연장했으면 어땠을까? 혹은 운하 공사와 함대 건조와 행궁行宮 건축을 동시에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백성의 부담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숨 돌릴 틈은 있었을 것이다.34

그러면 수 양제는 왜 그렇게 마음이 급했던 것일까?

잘 알려진 견해는 그가 제때 향락을 즐기려고 그랬다는 것인데, 소시민의 속된 취미와 엿보기 심리나 만족시키는 그런 논조는 취할 것이 못 된다. 시험 삼아 생각해보자. 그가 운하를 개통한 것이 그저 강남에 가서 산수를 즐기고 화류계나 드나들기 위해서였다면 돌궐을 순방하고 고구려를 원정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해서? 아니면 신기한 것을 찾기 위해서?

진지한 사학자들은 당연히 속된 문인들과는 견해가 다르다. 그들은 이런 쪽으로 더 생각이 기울었다. 수 양제는 부정한 방법으로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서둘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일찍 성과를 내기를 바랐고 또 단숨에 대업을 완성해 삼황오제를 뛰어넘으려 했다는 것이다.35

그러면 역시 부정한 방법으로 제위에 오른 당 태종은 왜 조급해하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수 양제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서 당 태종은 정치적 업적보다 민심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고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깊이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천하를 평정하고 대권을 손에 쥔 이후, 그 역시 갖가지 욕망이 끓어오르기는 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직언을 고하는 위징을 죽일 뻔하기도 하고 독단적으로 고구려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당 태종과 수 양제는 동전의 앞뒤 양면에 불과했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로 부정한 방법으로 제위에 올랐을까?
당 태종은 확실히 그랬다. 그는 현무문玄武門의 정변을 일으켜 형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제위를 탈취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당나라인의 역사 왜곡으로 인해 모호해져 버렸지만, 어쨌든 당 태종이 골육상잔으로 부정하게 제위에 오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다음 장을 참고).

수 양제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당 태종처럼 수 양제도 황자들 중 서열이 두 번째였다. 태종에게는 형 이건성이 있었고 양제에게는 형 양용楊勇이 있었다. 양용과 양광은 다 적자嫡子였다. 독고獨孤 황후가 아예 수 문제가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갖는 것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자 중에서 장자를 세우는 종법제도에 따라 황태자는 양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제위를 이은 사람은 양광이었다.

그리고 제위에 오른 당일, 양광은 양용을 죽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수 양제가 부정한 방법으로 제위에 올랐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틀림없이 그가 음모를 써서 수 문제로 하여금 양용을 폐하고 자신을 태자로 삼게 했다고 여긴다. 심지어 수 문제의 죽음도 일반적으로 양광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어진다. 그 흉수로 그의 측근으로 간주되는 양소와 장형張衡이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불확실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그 살해를 양광이 지시했는지, 묵인했는지, 아니면 방임했는지에 관한 여부뿐이다.36

애석하게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정사와 야사 모두 신뢰가 안 간다. 왜냐하면 수 양제가 폭군으로 성격이 정해진 후로 사료의 선택에 선입견이 개재되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관에서 편찬하는 정사는 금기가 있게 마련이고 민간의 야사는 또 과장을 즐겨서 결국 사건의 진상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돼버렸다.

그래도 󰡔수서隋書󰡕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때는 캄캄한 밤이었는데, 당시 병이 위중했던 수 문제는 갑자기 잘못 보내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는 양소가 양광에게 쓴 것이었고 내용은 양광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 질문은 황제가 곧 붕어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수 문제는 편지를 읽고 이미 성이 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총비 진陳 부인이 또 와서 양광이 자신에게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고 성토를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문제는 태자 양용을 폐한 것을 되돌려 다시 후계자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양소전」의 견해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수서󰡕 안에서도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양소전󰡕을 보면 양광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양소와 대책을 상의했다. 그리고 양소는 바로 거짓 조서로 궁전을 봉쇄한 뒤, 장형을 보내 문제를 시중 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문제가 붕어하는 바람에 궁전 안팎으로 의론이 분분하고 곳곳에 유언비어가 퍼졌다.

하지만 「선화부인전宣華夫人傳」에서는 말이 다르다. 문제는 진 부인의 하소연을 듣고 노발대발하여, “짐승 같은 놈! 이런 놈에게 어떻게 큰일을 맡기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고서 마침 옆에 있던 양용의 패거리인 류술柳述과 원암元岩에게 “내 아들을 불러와라!”라고 했다.

류술과 원암이 물었다.

“태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다. 양용이다.”

그래서 류술과 원암은 바깥으로 나가 조서를 기초한 뒤, 마침 당직을 서던 양소에게 가져가 보여주었다. 이에 놀란 양소는 즉시 양광에게 몰래 소식을 알렸고 양광은 당장 진 부인과 문제 곁의 다른 여자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한편, 장형을 보내 내실에 들어가 문제를 시중 들게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문제가 붕어했다.

이것이 바로 “가장 믿을 만하다”는 정사의 견해이다.

하지만 위의 견해는 의문투성이이다. 예를 들어 사건이 터졌을 때 양소가 몰래 소식을 전한 것일까, 아니면 양광이 그를 찾아가 대책을 상의한 것일까? 장형을 보내 내실에 들어가게 한 사람은 대체 양소일까, 양광일까? 그리고 장형은 내실에 들어간 뒤, 우연히 문제의 죽음을 본 것일까, 아니면 직접 문제를 죽인 것일까? 직접 죽였다면 그것은 양소나 양광이 지시하거나 암시한 것일까, 아니면 그가 혼자 생각으로 그런 것일까?

기본적인 사실조차 불확실한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는가?

더구나 논리도 안 맞는다. 󰡔수서·고조기󰡕의 기록에 따르면 수 문제는 대보전大寶殿에서 붕어했으며 그 전에 양소, 류술, 원암은 모두 같은 대보전 내 전각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리고 「양소전」을 보면 양광도 당시 대보전에 있었다. 다시 말해 양소와 양광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굳이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설마 나중에 둘이 대책을 상의할 때도 역시 편지를 이용했단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중요한 편지를 어떻게 잘못 보낼 수 있었을까? 하물며 양소는 당시 문제 곁에 있었는데, 그가 양광에게 쓴 편지가 어떻게 밖으로 나갔다가 한 바퀴 빙 돌아와서 문제의 수중에 들어간 걸까? 그리고 문제는 그 편지를 읽고 양소가 양광과 한패거리인 것을 알았을 텐데 어째서 양소를 처리하지 않은 것일까?

그 진 부인의 일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떻게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딱 그 편지가 도착한 시점에 양광을 고자질했을까? 우연이 다소 지나치지 않은가. 더욱이 󰡔수서·선화부인전󰡕에 따르면 그녀는 본래 양광이 큰 돈을 주고 매수해 문제 곁에 심어놓은 첩자였다. 그날 밤 문제가 세상을 떠난 뒤, 양광은 그녀에게 동심결(同心結. 남녀 간 사랑의 정표로, 풀리지 않도록 묶은 매듭)을 선물하고 동침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다. 그런 여자가 왜 양광을 무고해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려 한 걸까?

위징 등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이야기를 하나 날조, 혹은 채택해 집어넣었다. 진 부인이 양광에게 선물 상자를 받았는데 그 안에 독약이 들어있는 줄 알고 감히 열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학자는 진 부인이 사실 양용과 같은 편이었으며 문제의 두 공주와 동맹을 맺고 양광을 적대시했다고 생각한다.37

어쩌면 그녀는 이중간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공모자 중 한 명은 류술의 아내, 난릉공주蘭陵公主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건은 전혀 다른 음모였을 수도 있다. 이른바 양소가 양광에게 보냈다는 답장은 사실 류술과 원암이 위조한 것이며 진 부인은 적절한 시점에 불난 데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양광을 처치하고 양용을 복권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광과 양소가 한 발 앞서 국면을 제압해버렸으니, 그날 밤에 양광이 진 부인과 동침을 했다는 것은 황당무계한 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문제가 자연사했는지, 피살되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 견해를 위징 등은 절대 채택할 리 없다.

하지만 문제가 붕어한 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은 확실하다. 그 일은 양용과 양광 간 후계 투쟁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그 투쟁의 진상은 이미 위징과 사마광에 의해 은폐, 왜곡되었으며 또 후대의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저속하고 과장된 설명이 양산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제2제국의 결정적인 비밀인데도 말이다.
그러면 그 사건을 파헤쳐 진상을 밝히는 관건은 또 어디에 있을까?

대운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