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얼시劉二囍-서점의 온도書店的溫度 13

13 주얼九二, 서점의 가오슝인书店高雄人

10월 1일 밤, 나는 주얼(九二)과 서점 앞 계단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 맥주가 아니라 타이완 맥주였다.

우리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2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이런 곳에서 다시 나란히 앉아 있게 될 줄은. 2년 전의 그 밤, 우리가 마주하고 있었던 것은 밤에도 인파가 끊이지 않는 대도시의 네거리가 아니라, 끝없이 아득하고 검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였다. 별들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눈부셨고 바닷바람이 파도소리를 몰고 와 축축한 피부 위에 부딪쳤다. 작은 떠돌이 검정개 한 마리가 우리의 발치에 엎드려 뜨거우면서도 침착한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밤, 우리는 가오메이(高美) 습지 가장자리에 있었다.

2013년 10월 1일, 나는 10킬로그램의 배낭을 짊어지고 출발해 모험을 시작했다. 그날은 도보로 타이완을 일주하는 첫 번째 날이었는데 내 체력을 과신해 출발 전 적절한 훈련도 안 했던 탓에 그만 한나절 만에 발 근육을 다쳤다. 어쩔 수 없이 등산 스틱에 의지해 절뚝절뚝 걷다가 겨우 25킬로미터 떨어진 가오메이 습지에 닿았다. 그날 밤, 나는 해변 제방 위의 정자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그래서 막 슬리핑백을 펴고 쉬려는데 주얼이 나타났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야근을 마친 뒤 일부러 차를 몰아 나를 만나러 왔다. 비록 그곳은 시내에서 겨우 30분밖에 안 걸리는 곳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타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는 정신적인 위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선물도 가져왔다. 차 안에서 먹을 것을 한 보따리 안고 왔는데 그중에는 타이완에서 가장 좋은 제과점에서 산 빵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다리를 다친 것을 알고서 제방 뒤 사당으로 나를 데려가 평안을 빌어주는 한편, 그 참에 타이완의 제사 의식에 관한 기본 상식을 알려주었다. 당시 그는 타이중의 어떤 사무소 직원이었고 주로 가구 디자인을 했다. 그리고 나는 둥하이(東海)대학교 건축대학원에 유학을 온 중국 학생이었다.

주얼은 키가 192센티미터이고 공교롭게도 타이중에서 타이베이까지의 거리도 192킬로미터이다. 키가 크고 건장한 그는 내가 만나본 중에 가장 명실상부한 가오슝(高雄) 사람이다. 그가 둥하이대 건축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대학원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그는 내 대학원 친구의 학부 동창으로서 처음에 우리 둘은 그냥 술친구일 뿐이었다. 공통의 친구를 통해 서로를 알았으며 실제로 만난 것도 딱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라이브카페인 어맨킹에서 술잔을 부딪쳤고 다른 한 번은 산 위의 꼬치구이 주점에서 타이중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담소를 나눴다. 하지만 가오메이 습지에서 만난 후로 그에 대한 나의 시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냥 같이 먹고 노는 친구가 아니라, 내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정말로 그는 달라진 나의 인식에 부응했다. 5일 뒤, 먀오리(苗栗)에서 내가 도둑을 맞아 짐을 다 잃고 꼼짝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또 차를 몰고 와 나를 타이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후에 또 이어진 일주 여행에서도 그는 계속 나를 도와주었다. 가오슝을 지나갈 때 내가 자기 고향 집에 묵는 것을 완곡히 거절하자, 굳이 또 자기 아버지와 함께 내가 꼭 지나가야 하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게 식사를 대접해 기운을 북돋워주었다. 2년간의 타이완 유학 시절, 나를 도와준 타이완인은 무척 많았지만 주얼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중 가장 머릿속에 남은 한 사람이었다.

타이완 일주여행이 끝난 뒤, 금세 연말이 가까워졌다. 건축과 건물에서 열린 동문 송년회에서 우리는 또 만났다. 비록 나는 재학 중이고 그는 졸업한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거기 있으니 그가 나보다 더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그에게 알은 체를 하는데 내게는 그런 사람이 통 없었다. 우리가 건물 앞 정원에서 난간에 기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지나가던 친구들을 끌고 와 내게 소개를 하고 일일이 나와 잔을 마주치게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무대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 자정의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모두가 잔에 남은 술을 다 비웠다. 나는 그 건물과, 그 학교와, 그 섬나라에 아름다운 기억이 많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그곳과 그곳의 사람들은 다 내게 과거가 될 게 뻔했다. 중국과 타이완이 서로 먼 것은 단지 거리만이 아니었다.

중국에 돌아온 뒤로 평소에 나는 인터넷 우회접속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페이스북의 좋은 친구들과 대부분 연락이 끊겼다. 주얼과는 2014년 내가 타이중에 다녀오며 그를 위챗 친구로 추가하면서부터 비로소 다시 서로의 동태를 알게 되었다. 그는 말하길, 자기 여자친구가 상하이에 일을 하러 가서 지금 웨이신은 두 사람의 주된 의사소통 도구라고 했다. 그리고 이듬해 연초, 업무 환경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장거리 연애에 지쳤기 때문인지 그는 중국에 넘어와 발전을 도모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상하이로 갈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상하이는 타이완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도시일뿐더러 무엇보다 지금 그의 여자친구가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광저우에 왔다.

점원들은 내가 그를 그의 여자친구에게서 빼앗아 광저우로 데려왔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끌어들인 인력의 일부일 뿐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를 발휘한 것은 틀림없이 서점이었다. 나는 친구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늘 서점 관련 소식을 올렸고 그는 그때마다 흥미를 보였다. 서점 운영이 무척 재미있는 일이라고 느꼈던 것 가다. 그래서 톈허북로점을 준비하기 전에 자기도 참여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나는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당연히 환영했다. 다만 그가 서점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서점이 줄 수 있는 월급은 한계가 있었다. 그가 전에 받던 것보다 훨씬 적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우선 시험 삼아 해보라고만 했다.

그가 광저우에 온 두 번째 날, 서점의 인테리어 공사 현장이 그의 일터가 되었고 그의 공사 파트너는 나였다. 아마도 똑같은 건축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도 나처럼 공사 현장의 모든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귀를 찢는 전기톱 소리를 듣고, 코를 찌르는 니스 칠 냄새를 맡고, 엄청난 양의 먼지를 들이마시면서도 우리는 즐거웠다. 이번에는 그 전에 4개 지점의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나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지금은 함께하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공사 현장을 오락장으로 삼고 마치 장인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를 쥐어짜 재미나는 아이디어를 실현시켰다. 한번은 저녁을 먹은 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와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긴 전시대를 만드는 방법을 시험했는데, 벽돌 간의 이음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밤중까지 뜯어 고쳤다. 그리고 또 한번은 낡은 나무상자를 쌓아 보기 좋은 공간감을 표현하려고 어릴 적 나무토막을 조립하던 때로 돌아가 성에 찰 때까지 다양한 시험을 했다. 그는 낡은 물건만 보면 나처럼 매료되어 두 눈이 반짝거렸다. 언젠가 거리에서 버려진 판자를 가져왔을 때, 나는 그가 벌써 쓰레기 더미에서 낡은 서랍을 주워온 것을 보았다. 이윽고 우리는 힘을 합쳐 그 폐품을 개조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주얼과 나란히 두 달 넘게 고생한 끝에 톈허북로점이 마침내 문을 열었다. 그때 주얼은 길도 잘 모르는 외지인에서, 광둥어를 쓰고 큰길에 스쿠터가 없다는 것을 빼고는 광저우가 타이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로 변모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어쨌든 인테리어 디자인은 우리의 전문 분야이므로 그가 흥미와 능력을 보인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서 서점이 정식으로 운영될 때도 그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계속 이곳에 애정을 기울여줄까?

뜻밖에도 그 후로 주얼은 인테리어 기술자에서 또 다시 눈부신 변신을 보여주었다.

“서점에서 녹색식물을 팔아보면 어떨까?”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말했다.

“내가 옛날에 대학지원서를 쓸 때 원예과가 2지망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좋은 제품을 찾아 함께 화훼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내가 가고 싶지 않거나 가지 못하는 회의에 그를 대신 참석시키기도 했는데, 그는 사교 방면에서 나는 꿈도 못 꾸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독자들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 그의 키가 너무 커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는 항상 친절하게 허리를 굽히거나 웅크리는 자세를 취해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녹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서점으로 CNN에 보도된 것이 널리 알려진 뒤에 외국 손님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났지만 역시 그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당시 그는 우리 서점에서 설명회 때 외국인 통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원이었다.

도서 분야에서도 내가 극구 꽁무니를 빼는 상태에서 우리는 적합한 리더를 못 구하고 있었는데, 내게 떠밀려 앞에 나섰을 때 그는 역시 전임자들을 능가하는 열정을 발휘했다. 한편 중신후가점(中信後街店)에서 심야식당을 연 뒤로 그는 홀 매니저까지 맡아, 1200북숍의 이름이 찍힌 앞치마를 입고 식당 안에서 손님들을 상대했다. 짧은 시간에 그는 광저우를 뛰어다니며 만두 공급상을 찾았고 말끝마다 식당 이야기를 했다.

“이 식당의 포인트는 저렴한 가격, 괜찮은 맛, 빠른 속도 그리고 무료 배달이야. 저 식당은 쇠고기 요리에서 대초원의 분위기가 느껴진단 말이야……”

곧바로 그는 또 타이완에서 문구, 서적 등 각종 제품을 마련해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가지 큰 주문을 마치고 보니 거래처 상대가 다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점에서 ‘귀부인 킬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옆에서 이 모든 일을 보면서 나는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나는 유능한 사람을 만난 것이 기뻤고, 그 유능한 사람이 내 친구라는 것이 기뻤고, 그 유능한 친구가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기뻤다.

이 세 가지 기쁨의 순위를 매겨보라고 한다면 역시 뒤에서부터 앞으로 매겨야할 것이다.

주얼도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 기상천외한 친구가 그토록 많은 변신을 하며 많은 일을 이룬 뒤, 차차 가족들의 인정을 받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서점에 관해 써서 인터넷에 올린 수많은 글들을 보고 이미 성공적으로 세뇌되었다. 그래서 그의 글을 퍼 나를 뿐만 아니라 누구를 만날 때마다 아들 자랑을 했다.

“우리 아들이 광저우의 24시간 서점에서 일하고 있어!”

지금 우리는 여전히 함께 일하고 있고 그는 자신의 역할이 유격대원이라고 말한다. 매일 그는 각 지점을 돌며 문구, 도서, 음료 등의 데이터를 점검하고 진열 상태까지 살핀다. 비록 톈허북로점의 식물 판매는 영 저조하긴 하지만 우리는 늘 192센티미터의 커다란 남자가 작은 물뿌리개를 들고 허리를 숙인 채 화분마다 물을 주고 있는 광경을 보곤 한다. 특히 목숨이 위태로운 식물을 보면 갓난쟁이를 대하듯 두 배로 더 세심하게 돌본다.

“이봐, 너무 여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놀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게 바로 타이완 사람의 특징이잖아.”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