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런순金仁順-나는 아웃사이더

진런순金仁順, 사진 출처 http://blog.sina.com.cn/qian_qian

진런순 金仁顺
지린성吉林省 바이샨白山 출신,1970년 태어났으며 지린예술대학吉林艺术学院 연극과戏剧系를 졸업했다. 작품으로 소설 《爱情冷气流》, 《月光啊月光》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仿佛一场白日梦》등이 있다. 현재 창춘에 거주하며 현지 모 잡지사에 근무하고 있다. 70後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지금까지 소설과 산문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는 아웃사이더


어릴 적 나는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화가 나면 말다툼을 하기보다는 남자애들처럼 주먹으로 해결하기를 좋아했다. 그중 두 번의 싸움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 번은 이웃집 두 아이와 싸웠다. 그들은 남매였고 마대 자루처럼 긴 막대기를 휘두르며 악을 쓰면서 덤벼들었다. 마치 전쟁영화에 나오는 돌격대원 같았다. 뒤로 물러섰을 때 나는 등 뒤의 벽이 손에 만져졌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그때의 절망감은 내가 어린 시절 겪은 최악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급한 김에 나는 빈 물통 두 개를 걷어차면서 옆에 있던 멜대를 집어 들어 그들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그래서 내가 그들과 싸워 이겼다기보다는 당시 내 모습에 질려 그들이 알아서 두 손을 들었다. 그때 나는 큰 승리를 거뒀지만 그들이 가버린 후에 기쁘기보다는 큰 화를 면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한 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의 남학생과 싸웠다. 먼저 몇 마디 말다툼을 하다가 어울려 싸우기 시작했다. 그 애가 불같이 화가 나서 책상 십여 개를 뛰어넘어 내게 달려들자, 교실은 밀림이 되고 친구는 맹수가 되었다. 그 애의 이와 발톱이 순식간에 몇 배로 커져서 내 목을 물어뜯고 나를 갈기갈기 찢으려 했다. 그 애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진 것은 이웃집에 살던 내가 그 애 집의 추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애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붙잡혀 열 몇 군데나 칼을 맞았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어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래도 화풀이 삼아 상처마다 피를 흘리게 했다. 그렇게 두 남자가 한 여자 때문에 각자 치욕을 짊어지고 상처를 입었다. 그 칼부림 때문에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해진 셈이었다. 그러나 동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치욕이 아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었다. 아버지의 상처가 아들의 몸에도 똑같은 통증을 일으킨 것이다. 그 이치를 나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공공연히 그 애의 약점을 들춘 것은 그 애가 먼저 나를 ‘가오리’(高麗)라고 불러 내 아픈 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전에 멜대를 휘두르며 싸운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가오리.

유소년 시절, 나는 ‘가오리’라는 두 글자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두 글자가 내게 붙어 다니며 나를 다른 아이들과 구별 짓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남들은 내 이야기를 할 때 늘 이 두 글자를 덧붙이거나, 아예 이 두 글자로 나를 정의하곤 했다.

가오리 아이.

어른들도 자주 나를 이렇게 불렀다. 그들은 내게 무슨 신기하거나 비밀스러운 뭔가가 숨겨져 있는 듯, 또 그것이 나와, 그들이 모르는 어떤 신비한 세계를 이어주는 암호라도 되는 듯 나를 훑어보곤 했다. 생김새, 옷차림, 말, 모든 면에서 주변의 동년배 아이들과 다른 게 전혀 없는데도 나는 핏줄만은 그들과 달랐다. 나는 산양들 속의 한 마리 면양이었다.

대학 시절 내 전공은 희곡이었다. 전공을 따라 나는 마땅히 연극이나 드라마 작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희곡을 배우기는 했어도 대학 시절에 소설 창작을 시작해 십여 편의 중,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 작품들은 내 청춘과 함께하며 대학 시절의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그 작품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당시 그 작품들을 발표하고 한 문학 잡지가 내게 올리브 가지를 뻗어준 덕에 졸업 후 문학 편집자가 되었다.

편집자로서 내 일은 소설 읽기였다. 수많은 투고작 중에서 가끔씩 뛰어난 것을 읽고 눈이 번쩍 뜨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수준 이하였다. 매일 수준 이하의 소설을 읽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소설도 투고를 하는데 나도 시도해 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소설을 썼기 때문에 편집자가 되었고 편집자가 된 후에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단지 이번 소설 쓰기는 대학 시절의 소설 쓰기와는 달랐다. 그때는 전적으로 재미삼아 썼지만 이번에는 작품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의 작품이 내 문학 창작을 위한 연습과 워밍업이었다면, 편집자로서 새롭게 쓰기 시작한 작품은 내 문학 역정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내가 서른 살이 되기 전, 중국의 다른 몇몇 여성 작가들도 나처럼 1970년대 생이었고 나까지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여성 작가들이 당시 몇 군데 주요 잡지들에 의해 소개되고 추천을 받았다. 우리는 중국 문단에서 가장 일찍 주목을 받은 ‘70년대 생 작가’였다. 우리는 그렇게 운 좋게 인정을 받았다. 몇 년 뒤, 우리 일곱 명 가운데 누구는 일찍 글쓰기를 포기했고 누구는 문단을 떠났으며 또 누구는 문학잡지 편집자가 되었다. 그래서 서너 명만 아직까지 글을 쓰고 있다. 작가가 문단에 등장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속 글을 써나가는 힘과 능력이다. 작가가 뜨더라도 작품이 무게를 갖지 못하면 결국 가벼워져 조만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마련이다.

처음 문단에 나왔을 때 내 민족적 정체성은 거의 완전히 가려졌다. 「고려의 옛일」(高麗往事)이나 「판소리」(盤瑟俚) 같은, 고전을 모티브로 삼은 몇 편의 단편소설에서 조선의 고대사를 배경으로 삼았는데도 내 정체성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나는 여전히 ‘70년대 생 작가’나 ‘신생대’(新生代) 같은 개념으로 규정되었다. 나중에 장편소설 󰡔춘향󰡕을 쓰고 그 소설이 중국 소수민족을 위한 문학상인 ‘준마상’(駿馬獎)을 받은 뒤에야 다들 내가 ‘70년대 생 작가’이고 ‘여성 작가’일 뿐만 아니라 조선족 작가임을 기억해냈다.

중국에는 진정한 조선족 작가가 많다. 내가 그들에게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들이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조선족학교에서 공부한 뒤 조선어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족의 삶에 관해 글을 쓰고 독자들도 모두 조선족이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한족 거주 지역에서 자랐고 어른이 될 때까지 중국어 교육을 받아 중국어로 글을 쓴다. 내 독자들도 중국 여느 지역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나는 조선족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옌볜의 조선족 작가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 존재를 알기는 하지만 내가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문학계와 한국 문학계의 교류가 갈수록 빈번해지면서 나는 여러 차례 중한 작가들의 교류 이벤트에 참가했다. 한국 작가들의 눈에 나는 한 명의 중국 작가였다. 조금 특수한 점이 있었다면 내가 중국의 조선족 작가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화강松花江, 사진 출처 you.ctrip.com

나는 삼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한국 작가와 비교하면 나는 중국 작가이고 중국 작가와 비교하면 나는 조선족 작가이며 조선족 작가와 비교하면 나는 중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이다.
나는 운명적으로 산양들 속의 한 마리 면양이다.

어린 시절 내 특수한 정체성으로 인해 당황하고 무서워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나는 내 독특한 속성을 즐기고 있다. 더는 어떤 집단에 의해 배제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오히려 내 아웃사이더로서의 정체성을 즐기고 있다. 공자가 “긍지는 갖되 다투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되 편을 가르지 않는다”(矜而不爭, 群而不黨)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집단 밖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나의 남들과의 ‘같음’과 ‘다름’을 즐기고 있다.

독립적이면서도 독특한 사람으로 지낼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