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나라, 대당(大唐)제국

‘로마나라’라, 뭔가 어색하진 않은가. 맞다, 로마제국으로 바꾸니 그제야 입에 붙는다. 그럼 ‘대당제국’은 어떠한가? 그냥 당나라 하면 될 것을, 큰 대(大)에다 제국이라는 말까지 붙였으니 꽤나 낯설고 이상할 것이다.

지난 날, 우리가 국가라고도 부르는 나라에는 통상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천자 급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제후 급의 나라이다. 천자는 하늘의 아들[天子]이란 뜻으로 흔히 황제라고도 부른다. 천자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 곧 제국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제후는 천자에게 일정 지역의 통치를 위임받은 존재다. 그는 천자의 신하이지만 위임받은 지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그 지역의 왕이기도 했다. 이렇게 제후는 왕이면서 동시에 신하였다면, 천자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이들의 왕인 동시에 제후들, 그러니까 왕 중의 왕이었던 것이다.

역대로 중원을 통일했던 왕조는 천자의 이러한 속성이 실질적으로 구현됐던 명실상부한 제국이었다. 무릇 한 나라를 제국이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정도는 갖춰야 하는데, 중원의 통일 왕조들은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첫째, 천자는 하늘을 대리하여 천하 곧 하늘 아래 온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관념이다. 이는 《시경》 의 “보천지하, 막비왕토(溥天之下, 莫非王土)”, 곧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한 마디로 하늘 아래는 온통 자기 땅이라고 본 관념으로, 이에 따르면 중원뿐 아니라 사방의 이민족, 그들의 용어대로 쓰자면 ‘오랑캐’들이 사는 곳도 모조리 천자의 영토가 된다.

둘째, 천자는 천하의 유일한 지존(至尊)이라는 설정이다. 이는 《시경》 의 “솔토지빈, 막비왕신(率土之濱, 莫非王臣)” 곧 “온 땅 가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는 없다.”는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천자는 만민의 왕이라는 정체성을 지님과 동시에 각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들의 왕이라는 정체성도 겸한다는 뜻이다. 이에 의하면 사방의 군주들은 응당 천자의 명을 따라야 했다. 천자는 하늘의 유일한 후계자이기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천자의 명을 받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셋째, 자신은 온 천하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보편문명’의 유일한 고안자이자 공급자라는 믿음이다. 실제로 유교문화권이란 말이 환기해주듯, 중국은 예(禮)로 대변되는 유교문화를 고대 동아시아에 보편문명으로 공급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뿐 아니라 일본 등지에서 문명의 표준으로 준용됐던 당제국의 제도와 율령도 그러한 실례 가운데 하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넷째는 이와 같은 관념과 믿음을 실현할 수 있는 국력이다. 군사력이나 문화적 역량 등으로 자기 나라뿐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 실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지날 날, 중국과 주변 나라들 사이에 조공과 책봉 질서가 구축되어 오랫동안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요 축으로 작동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이 지닌 이러한 힘 덕분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힘을 무시하기가 어려웠기에 주변 나라들은 설령 형식적일지라도 중국 천자에게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치며 자기 강역의 통치를 공인받았던 것이다.

당나라를 로마제국처럼 대당제국 또는 당제국이라고 불러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실 당뿐 아니라 진시황의 진을 위시하여 중원 전체를 아울렀던 통일 왕조 대부분은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역사에서는 그러한 관념과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도 황제의 나라임을 칭한 적은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라고 자처하지는 않았다. 제국의 네 번째 조건의 미비, 곧 주변 나라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9.2.27 국제미디어센터 TV 촬영 ⓒ 연합뉴스

하여 우리가 한나라, 송나라 하며 중원의 통일왕조를 우리와 같은 급으로 칭하고, ‘당나라 군대’ 운운하며 그들을 낮춰본다고 해서 중국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격의 차이가 사라지진 않는다. 과거에나 그랬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UN에서 중국도 한 표, 우리도 한 표를 행사한다고 하여 중국을 우리와 같은 급의 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 국제사회에서 각각이 지니는 한 표의 힘은 결코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접하는 까닭은 자존심 상하더라도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함이다. 특히 약육강식의 싸늘한 윤리가 횡행하는 국제사회에서는 상대가 현실적으로 우리보다 강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사실에 의지해야 한다. 더욱이 중국은 21세기 전환기를 거치면서 미국에 버금가는 존재로 자리 잡았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우리 사회서 만큼은 미국보다 더 중요한 상수로 작동될 것이다.

무릇 한 사회의 상수라 함은 그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자를 말한다.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알든 모르든 꽤 크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러한데 내 삶의 상수에 대해 어떻게 사실과 다르게 알아도 될까.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머리는 늘 사실을 직시하는 힘이 필요한 까닭이다.

(한국일보 2016년 4월 27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