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두보杜甫 태산을 바라보며望嶽

태산을 바라보며 望嶽/당唐 두보杜甫

岱宗夫如何 저 태산은 도대체 어떤 산인가
齊魯青未了 제노에 걸쳐 푸른 산색 끝이 없네
造化鍾神秀 대자연은 신령하고 수려한 경관을 모았고
陰陽割昏曉 산의 앞뒤에 따라 어둠과 밝음이 나뉘네
蕩胸生曾雲 층층 운해 피어나 가슴 속 후련하고
決眥入歸鳥 돌아가는 새 보느라 눈을 크게 뜨네
會當淩絕頂 언젠가는 기필코 저 산 정상에 올라
一覽衆山小 다른 산들이 작은 것을 보고 말리라

736년 두보의 나이 26세 때 지은 작품으로 시인의 호연지기와 함께 웅대한 포부가 드러나 있다. 내가 보고 있는 삼민서국 《두보시선》 의 맨 앞에 놓인 시이다.

두보는 고향이 공현(鞏縣)이다. 공현은 낙양과 정주 사이에 있는 현으로 지금의 하남성 공의(鞏義)에 해당한다. 그의 증조부가 이곳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앞의 책에 딸린 연보를 보면 두보는 3살부터 낙양에서 살았으며 19세부터 강남 지역을 돌아다니며 놀고 그러다가 이 해에 진사 시험에 응시했는데 떨어졌다. 마음도 달랠 겸 아버지한테 문안도 갈 겸 산동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부친 두한(杜閑)이 당시 산동 연주(兗州)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에서는 태산이 몇 십리 거리에 있으니 이곳에 온 김에 명산을 탐방한 셈이다. 태산은 지금의 태안과 제남 사이에 있는데 이는 예전 노나라와 제나라 국경 일대에 해당하며 두보는 지금 노나라 북쪽 태안 방면에서 이 산을 보고 있다.

두보가 활약하던 성당 시대에는 문인들이 이리저리 명승지를 탐방하고 명사들과 교유하는 만유(漫遊)의 풍조가 있었다. 두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당시 시인들의 시를 보면 그 이동 거리가 넓다. 당시의 사회 안정과 경제적 조건, 수로와 역로의 발달, 이런 여러 조건이 마련되었을 텐데 시가 활달하고 격정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이런 영향이 있는 것이다.

《 삼국지 》 나 이백, 두보 시는 마치 《사서(四書》 처럼 하나의 문학 작품이라기보다는 일반 인문 상식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도 도연명 시와 더불어 두보 시는 일찍부터 많은 문인들의 관심을 받아 책이 간행되었다. 두보 시가 내용이 어려운 데도 불구하고 언해나 번역을 조선 초기부터 일찍 서두른 것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시의 최고봉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의 마지막에 다짐한 것처럼 시산(詩山)의 대종, 그 절정에 올라 여러 산들을 굽어보게 된 것이다.

첫 구에 대종(代宗)이라 한 것은 오악의 으뜸이라는 의미가 있다. ‘造化鍾神秀’는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주련이나 패방에서 가끔 보게 되는데 여기서 ‘鍾’은 ‘모으다’의 의미이다. ‘陰陽割昏曉’는 산의 음과 양, 즉 해가 비치는 산의 남쪽과 음지가 생기는 산의 북쪽이 한 쪽은 밝고 한 쪽은 어둡다는 의미이다. 이를 산이 하도 커서 한 쪽이 새벽이면 다른 한 쪽은 저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글자에 얽매여 이치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蕩胸生曾雲’과 ‘決眥入歸鳥’는 각각 뒤의 3글자를 먼저 해석하고 앞의 2 글자를 해석해야 한다. 이 구절도 앞 구는 도치이지만 뒷 구절은 도치가 아니라고 보는 학자도 있는데 이는 ‘결자(決眥)’라는 표현을 쓴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다. 도치 구법이 한시에는 많으므로 굳이 억지로 ‘가슴이 툭 트이는 것은 층층 구름이 생겨나기 때문이요.’ 이런 과정을 거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한시가 주로 2,3자, 혹은 4,3 자 등으로 글자가 조합되고 또 대구를 이루기 위해 이렇게 쓴 것뿐이다. 여기서 ‘증(曾)’은 층(層)과 통용하는 글자이고 ‘入’은 ‘시야에 들어왔다’는 의미이다.

‘會當’은 ‘앞으로 반드시 ~ 할 것이다.’의 의미이다. 이 글자 때문에 마지막 2구는 앞의 6구와 달리 장래의 희망을 나타내는 구가 된다. 여기서 ‘凌’은 어떤 대상의 ‘위에 위치하다.’는 의미이다. 대장부가 큰 뜻을 품는 것을 ‘능운장지(凌雲壯志)’라고 하는데 구름 위로 올라갈 정도로 크고 높은 뜻을 말한다.

《두시상주(杜詩詳註)》에서는 이 시를 4층의 ‘망(望)’으로 나누어 각 두 구절씩 원망(遠望), 근망(近望), 세망(細網), 극망(極望)으로 설명했는데 상당히 근리하다. 시 제목의 망악(望嶽)은 전반 6구의 경관 인식과 후반 2구의 장대한 포부를 모두 포괄하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 시를 더욱 빛나게 한다. 시 전반에 걸친 큰 기세와 국량은 웅혼하여 앞으로 출현한 대시인을 예감하게 하는 기운을 느끼게 한다.

태산은 1,535m로 제주도의 한라산이 1,947m인 것에 비하면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실제 아침 일찍 올라가면 혼자 걸어가서 저녁에 내려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주변에서 태산이 가장 높고 또 출발하는 높이에서 산 정상까지는 실제로 올라가보면 상당히 멀고 웅위(雄偉)한 느낌을 받게 되어 체감하는 높이는 훨씬 높다. 그리고 산 전체에 석각이나 도관 등 공자, 진시황, 한고조를 거치면서 축적된 인문 경관이 많다. 이 시의 마지막도 공자가 태산에 올라가 천하가 작은 것을 알았다는 고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듯이 태산은 자연의 산이기도 하지만 과반은 인문의 산이다.

시의 풍경 묘사를 보면 태산 정상에는 안 올라갔어도 상당히 높은 곳에 올라 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두보가 처한 사회적 위치와도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인문의 산 정상에 올라가 보겠다고 다짐하는 두보의 결기만큼은 예사롭지 않다. 역시 사람은 나처럼 흐리멍덩해서는 안 되고 독한 마음을 먹어야 성공을 하는 모양이다. 무언가 새로운 다짐을 하는 이른 봄에 태산에 올라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그 때를 위해 이 시를 외워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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