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하학궁(稷下學宮)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실 부설 정책 연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도성인 임치(臨淄)의 서쪽 문 이름이 ‘직문(稷門)’이었습니다. ‘직하(稷下)’는 그 문 밖을 가리키는 말로, 이곳에 위왕(威王)이 ‘제나라 중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대규모로 학술기관을 건립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종합대학+고등학술연구기관’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 이를 ‘직하학궁’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활약한 지식인을 직하학사(稷下學士)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국시대 중후기에 걸쳐 이곳에는 다양한 학파의 인물이 운집하여 사학을 개설하는 한편으로 학술적․사회적․정치적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담론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순우곤(淳于髡)의 예(이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잘 나와 있습니다.)에서처럼 통치자의 자문과 방책의 건의 등에는 적극적으로 임하였습니다. 당시 직하학궁과 관련이 있는 대표적 인물로는 맹자(孟子)와 순자(荀子), 신도(愼到), 송견(宋銒), 전병(田騈), 접여(接予), 추연(鄒衍), 노중련(魯仲連), 장자(莊子) 등을 들 수 있다.(* 맹자와 장자를 직하학사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해 왔습니다. 필자는 이들을 직하학사로 단정할 수는 없어도 직하학사들과 교유했고 그들의 학설을 염두에 두고 학술활동을 펼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직하학궁과 연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직하학궁의 설치 이유는 부국강병에 있었습니다. 순수하게 학문의 발전을 위해 설치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전국시대 들어 각 제후국의 사(士) 확보 경쟁은 국운을 거는 차원에서 진행된다. 열국의 제후들이 군사적, 정치적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사(士)들은 “초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초나라를 중요시하고, 제나라에서 나오면 제나라를 가벼이 여기며, 조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면 조나라를 완전하게 하고, 위나라에 반대해서 일하게 되면 위나라를 해롭게 하는”, 중원의 정세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역량으로 발돋움합니다. 실제로 제나라의 선왕(宣王), 위왕(威王)이 중흥을 구가했던 시기는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식인[士]들이 모여 일상적으로 학술을 연마하고 담론을 펼쳐내며 강학에 임했던 직하학궁의 전성기였습니다. 반면에 민왕(湣王) 이래 몰락하기까지의 시기는 직하학궁의 쇠퇴기와 일치합니다. 맹자의 “사가 지위를 잃는 것은 제후가 나라를 잃는 것과 같다.”는 진술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한 명분 혹은 당위가 아니라, 실제로 사가 국력의 요체였던 상황에 대한 개괄이었던 셈입니다.
직하학궁의 원칙은 “세상에 대한 저술과 담론은 생성하지만 정사를 직접 맡지는 않는다.”였습니다. 제나라의 통치자는 직하학사들을 위해 상대부(上大夫)의 칭호를 주고 “넓은 거리에 높은 문이 달린 커다란 집을 주고 존대하고 아꼈으며”, 책을 쓰고 이론을 세우는 데 힘쓰며 강의와 토론을 하고 “직책을 맡지 않고 나라의 일을 의론하도록” 특별 대우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직하학사에 대한 대우는 최상급이었던 것입니다. 전병은 본래 팽몽(彭蒙)의 제자였지만 직하선생이 된 후 “재산은 천종(千鍾)이었으며 따르는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맹자가 길을 떠날 때는 “뒤를 따르는 수레가 10대였고, 따르는 사람이 수백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제나라의 재상 자리를 버리고 고향인 추(鄒)로 돌아오려고 할 때 제나라의 선왕(宣王)은 수도 임치에 “강의실을 지어주고 제자를 기를 수 있도록 만종의 기금을 주어” 그를 붙들기도 했습니다. 송견도 직하에서 “제자들을 모으고 학교를 세우고 책을 저술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역시 제자의 수도 적지 않고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직하학궁은 “분열과 혼란을 종식하고 ‘대일통(大一統)’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전국시대의 시대적 과제에 부합할 수 있는 지적 혁신을 추동하는 데에 제도적인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후한 대우와 높은 명예를 근거로 중원에 흩어져 있던 지식인을 끌어 모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직하학궁은 단순히 전국시대 제나라에 설치된 학술기관이었다기보다는 한 사회의 지식 생산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습이 제도화된 경우가 아닌, ‘목적의식적’으로 마련한 중국사상 최초의 ‘지식생산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상의 서술은 필자의 글인 “직하학궁과 전국시대의 글쓰기”(《중국의 지식장과 글쓰기》 , 서울: 소명출판, 2011.)의 관련 부분을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