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정적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은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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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일어난 재난을 ‘재구’하는 영화들이 하나의 장르를 이룬다면, 가상의 재난을 다루는 영화들이 또 한편에 있다. 대개 SF 장르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SF 장르의 중요한 요소가 미래에 닥칠 가능성이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의 성찰, 해결과 극복이라고 할 때, SF는 당초부터 ‘재난’ 장르를 품고 있는 셈이다.
가늠하기 힘든 기술의 발전, 그와 함께 나아지기보다는 더 커져 가는 인류 내부의 불균등한 형편과 환경문제. 21세기 들어 재난 요소가 극대화된 블록버스터 SF 영화들이 연이어 생산되고 히트를 치는 것도 다 이유가 있겠다.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 대규모 기후변동이나 빙하기의 엄습 같은 설정도 결코 스케일이 작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재난 SF 가운데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상상은 아무래도 지구와 인류의 명운을 놓고 이루어진다. 주인공의 숭고한 희생은 섬 하나, 도시 하나, 나라 하나를 넘어 이제 지구와 인류 전체를 구한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가 마이클 베이 감독의 1998년 작 『아마게돈』이다. 지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소행성에 착륙, 핵폭발을 일으켜 지구를 비껴가도록 만들기 위해 우주로 쏘아 올려지는 유전 탐사 전문가들. 온갖 난관을 뚫고 소행성 깊숙이 핵폭탄을 박아 넣지만 기폭 장치의 고장으로 누군가 남아 수동으로 폭탄을 터뜨려야 할 처지다. 팀의 리더 해리 스탬퍼(블루스 윌리스 분)는 딸아이의 애인인 A.J.(벤 애플렉 분)를 귀환시키기 위해 제비를 뽑은 그를 대신해 자신이 소행성에 남는다.
미국 발 재난영화들은 당연하게도 미국의 우월한 정신과 가치, 기술력을 뽐낸다. 그런데, 종국에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가족을 살리겠다는 아버지 주인공의 일념, ‘부정父情’이다. 이런 부류의 영화에 ‘모성’이 강조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H.G. 웰즈의 원작을 기초로 한 많은 영화 중 하나인 2005년 작 『우주 전쟁(War of the Worlds)』에서도 침략자 외계인을 거꾸러뜨리고 가족을 지켜내는 것은 평소 무능했던 아버지(톰 크루즈 분)였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더 로드(The Road)』(2009)에서 어머니는 비관 속에 자살을 택하지만 아버지는 실날같은 희망을 안고서 어린 아들을 위해 대환란의 세상을 견딘다. 아마도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의 과정에 간여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위기에 대한 공포는 포스트현대 사회에서의 부권 하락의 위기에 대한 공포와 짝하나 보다.
소행성의 돌진보다 더 큰 규모의 상상은 태양의 소멸이다. 대니 보일 감독의 2007년 작 『선샤인(Sunshine)』은 태양이 턱 없이 일찍 식어간다는 설정이다. 태양에 핵반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탄두를 싣고 여정에 오르는 이들. 우여곡절 끝에 역시 남자 주인공(여기서는 아버지는 아니고 누군가의 남동생이지만)의 숭고한 희생으로 지구에는 다시 ‘선샤인’이 비춘다.
중국에서 음력 설날인 2019년 2월 5일에 개봉, 연휴 닷새 동안만 14억 위안(한화 약 2,336억원)을 벌어들였다는 궈판(郭帆) 감독의 『유랑지구流浪地球 (The Wandering Earth)』 역시 태양의 급격한 노화가 기본 설정이다. 50억 년 뒤에나 일어날 일로 알고 있던 태양의 적색거성화가 급격히 진행된다. 수성과 금성은 부풀어 오른 태양에 곧 빨려 들어갈 것이고 지구의 생태계가 소멸될 날도 머지않았다. 100년 후면 지구가 300년 후면 태양계 전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인류가 택한 것이 바로 ‘유랑지구’ 프로젝트. 지표에 거대한 추진체들(‘행성발동기’)을 설치해 지구를 태양 궤도로부터 이탈시켜 2.4억 광년 떨어져 있는 항성계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주한다는 계획이다! 적지 않은 SF 소설과 영화들을 봐 왔지만, 이런 설정은 처음인 것 같다. 그 규모와 황당함에서 가히 ‘중국적’이지 않은가!
인공 추진력으로 지구를 궤도에서 이탈시켜 태양계를 벗어나도록 만든다는 게 가능한지, 당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지구에 아무리 거대한 지하세계를 건설한다고 해도,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생태를 유지하는 게 가능한지 등등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기술적 문제들은 다 괄호 속에 두도록 하자. 어차피 SF적 상상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영화가 그리는가이다.
이 영화는 휴고 상, 네뷸라 상 등 내노라 하는 국제적 SF 상을 두루 수상한 중국인 SF 소설 작가 류츠신劉慈欣의 2000년 중국 은하 상 수상작 동명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원작과 크게 다른 점이라면, 가장 큰 위기로 ‘유랑’을 시작한 지구가 목성의 중력에 끌려들어가게 되는 상황을 상정, 여기서부터 영화 중후반의 숨 막히는 활극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점이다. 소설이 화자의 회고와 성찰을 통해 태양의 적색거성화에 대한 판단과 지구연합정부의 ‘유랑지구’ 프로젝트 결정을 둘러싼 인류의 갈등을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영화는 인류의 일치된 행보를 강조한다.
재미있는 점은 최근 중미 간의 불편한 관계를 반영한 듯, 영화 구석구석 재난을 이겨내기 위한 인류의 협동이 부각되지만 영화 모두에 재난을 알리는 CNN 뉴스 화면이 잠깐 등장할 뿐, ‘미국’의 존재는 철저히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영국, 프랑스, 한국, 인도네시아… 다 등장한다. 미국은 없다. 아들 주인공 류치劉啓(취추샤오屈楚蕭 분)를 돕는 친구는 중국인 아버지와 호주인 어머니를 둔 혼혈이다. 아버지 주인공 류페이창劉培强(우징吳京 분)을 돕는 친구는 러시아인이다. 어디에도 미국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내게 이 영화를 소개한 김모 형은 너무나도 빨리 노쇠한 태양이 바로 미국 아닐까 했다. 영원할 것 같던, 세계의 중심이고 모든 것의 척도였던 태양(미국)도 예상보다 빨리 소멸할 수 있고, 그렇게 태양이 사라져도 중국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는 메시지 아닐까 하는 얘기. 그러고 보니, 이렇게 보는 것도 가능할 듯. 태양(미국)은 노쇠해 사멸하기 전, 적색거성화 하여 제 빛으로 살아온 태양계를 삼켜 버릴 것이다. 그 전에 중국은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이끌고 나간다….
아무튼, 목성의 중력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한다면, 지구는 무사히 태양계를 이탈할 것이다. 그리고서도 2.4억 광년 떨어진 곳까지, 지구는 2500년을 ‘유랑’해야 한다. 바이칼 호에서 낚시를 함께 하자는 류페이창의 말에 러시아인 동료는 “바이칼 호는 2500년 뒤에나 녹을 텐데…”라고 한다. 류페이창은 이렇게 답한다. “괜찮아. 우리에겐 아이들이 있어. 아이들의 아이들에게 또 아이들이 있을 거고. 결국에 가서 어느 날, 얼음은 반드시 물이 될거야(沒事. 我們還有孩子. 孩子的孩子還有孩子. 終有一天, 氷一定會化成水的).” 어느 세월에 산을 퍼 옮길 거냐는 조롱에 우공(愚公)이 한 답변이 생각난다. “비록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남아 있소. 자식은 또 손자를 낳고, 그 손자가 또 자식을 낳고, 자식은 또 자식을 갖고, 자식은 또 손자를 갖고, 자자손손 끝이 없을 터. 그러나 산은 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고생스럽다 불공평하다 하리오?(雖我之死, 有子存焉. 子又生孫, 孫又生子, 子又有子, 子又有孫. 子子孫孫, 無窮匱也, 而山不加增, 何苦而不平?)”(『列子・湯問』)
『배틀스타 캘럭티카』, 『인터스탤라』 등에서 우주선단이나 지구와 유사한 생태를 유지하는 거대한 우주선이 보금자리가 될 새로운 항성계를 찾아 우주를 가로지르는 상상은 익히 보아 왔다. 바다를 가로지른 이주와 식민지 개척을 통해 자신들의 문명을 재생산한 서양인들의 발상이다. 그러나, 지구 자체를 움직인다니. 이거야 말로 참으로 중국다운 상상력이다. 우주 공간에서의 미지의 2500년을 낙관할 수 있는 것도 역시 그만큼 이상의 세월을 일관해 왔다는 문명적 자긍심의 발로이리라.
그런데, 부정父情 넘치는 우주적 영웅의 모습이며, 『스타워즈』를 위시한 그간 미국산 우주 SF에 거듭 등장한 기계적, 건축적 요소들까지, 이 영화는 또한 너무나도 미국(영화)적이다. 저 자리에 브루스 윌리스가 앉아 있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이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면 어떤가. 등장하는 중국인 배우만 죄다 미국인으로 교체하고 도시들 이름만 뉴욕과 필라델피아, 애틀랜타 등으로 바꾸면 그대로 헐리우드 영화일 판인데. 그래도 영화 중간에 애교로 카메라가 슬쩍 비추는, 우주정거장 주요 부속에 붙어 있는 ‘Made in China’엔 변함이 없을 테지만.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지구를 구할 이들이 있다니, 안심할 일이다.
넷플릭스가 이 영화의 전 세계 스트리밍 판권을 사들였다.
(민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