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唐] 한악韓偓 술에 취해醉著

술에 취해醉著/ [唐] 한악韓偓

일만 리 맑은 강
일만 리 하늘

한 마을 뽕나무
한 마을 안개

취해 자는 어부 영감
부르는 사람 없어

정오 지나 깨어나자
배에 가득 눈 쌓였네
萬里淸江萬里天, 一村桑柘一村煙. 漁翁醉著無人喚, 過午醒來雪滿船.

이런 시는 해설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시 자체로 더 덧붙일 게 없기 때문이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정경을 그대로 느끼면 된다. 그냥 그대로 한 폭의 유토피아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를 읽으며 꼭 의심을 품는다. 만리장성이 일만 리인데 어떻게 마을 앞 강이 일만 리가 될 수 있나? 마을에 다른 나무도 많을 텐데 어떻게 뽕나무만 있나? 어부 영감이 고기도 안 잡고 술에 취해 정오까지 늦잠을 자면 어떻게 먹고 사나? 배에 가득 눈이 쌓이면 배가 가라앉지 않나? 모든 일을 철저히 의심하는 건 물론 좋은 태도이지만 시는 시로 읽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잘 아는 시 중에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은유의 전형적인 사례로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과학적 논리로 따져보면 이 구절은 성립할 수 없다.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심령이고, 호수는 물질세계의 H2O 집적물인데 어떻게 등치하여 같다고 할 수 있나? 이는 문학 사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문학의 사유는 형상적이고 비유적이고 상징적이고 포괄적이고 생태적이고 신화적이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문학작품을 공부하며 입시 위주의 한 가지 주제 찾기에 골몰했다. 어떤 문학도 한 가지 주제로 선명하게 정리했다. 이 때문에 모든 문학은 선명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 그러면서 어떤 문학작품을 나와 다르게 읽는 사람의 태도를 잘못 되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문학의 특성 중 하나는 모호함이다. 좋은 문학 텍스트는 드넓은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기에 늘 새롭게 읽힌다. 그 새로운 해석이 텍스트의 구조와 문법에 벗어나지 않는다면 잘못 되었다는 비난은 존재할 수 없다. 새로운 해석은 늘 기존의 해석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문학작품의 창작 동기도 한 가지에만 그치지 않는다. 현실의 고통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작품도 많고, 또 그런 입장에서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어떤 작가들은 현실의 불만이나 결핍을 뛰어넘어 이상화된 경관을 그리기도 한다. 특히 중국 당나라 시대에는 도교와 불교의 세계관이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다. 우리가 당시(唐詩)에서 느끼는 도교적 선취(仙趣)나 불교적 선취(禪趣)는 이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호불호의 문제다. 이런 시가 싫다면 읽지 않으면 되고, 좋다면 읽으면서 즐기면 된다. 문학의 모호성이 싫다면 어떻게 하나? 물론 문학을 읽지 않으면 된다. 문학은 배고픔도 해결할 수 없고 추위도 막을 수 없으며 무기로도 쓸 수 없다. 그런데 인류는 시니 소설이니 수필 따위와 같은 아무 쓸 모 없는 글장난에서 왜 벗어나지 못할까?(사진출처: ZEMMA的博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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