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라면 적잖은 사람들이 장이머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장이머우가 해외 영화제에서 화려한 수상 이력을 쌓고 있을 때, 정작 중국인들은 펑샤오강(馮小剛) 영화에 열광했다. 펑샤오강은 지금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이다. 중국영화 내수시장은 거의 펑 감독이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이머우가 해외용 감독이라면 펑샤오강은 철저한 내수용 감독인 것이다.
펑샤오강은 주로 중국 소시민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해프닝을 코믹하게 엮어내는 솜씨를 발휘해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계속된 이런 영화들이 해마다 연말연시에 흥행을 이끌어내면서 이른바 ‘허쑤이피안’(賀歲片: 새해맞이영화)의 맹주 역할을 해 왔다. 그랬던 펑 감독이 <야연>이나 <집결호> 같은 중국식 블록버스터(大片) 연출로 선회하더니, 최근에는 재난영화로 눈을 돌리고 있다.
펑 감독의 재난 영화 중 대표작은 <대지진>과 <1942>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1942>는 류전윈(劉震雲)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1942년 허난(河南) 일대에서 발발한 대기근을 배경으로 삼았다. 대기근으로 인해 굶주림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피난길에서 만나게 되는 좌절과 고통을 화면에 담았다. 기아에 허덕이는 민중들에게 속수무책이었던 국민당의 무능력도 함께 그려졌다.
실제로 1942년 중국에는 처참한 대기근이 닥쳤다. 중일전쟁의 포성이 한창이던 시절에 닥친 이중의 재난이었다. 허난성 뤄양(洛陽)에는 일본 전투기들이 진작부터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전쟁의 공포가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한해(旱害)는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허난 내륙을 바싹 건조시켰다. 여름을 날 수 있는 보리를 근근이 거둬들이긴 했지만 예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게다가 추수철에 불어 닥친 강한 바람으로 인해 농민들은 끝없는 절망으로 추락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은 이미 허난 지역의 1/3 이상을 점령한 상태였고 국민당 정부가 이끌던 전황은 좋지 않았다. 일본군의 대소탕 작전은 날을 새우며 거듭됐다. 거둬들인 곡식마저도 국민당 부대와 관료, 도시 주민들을 위해 운송됐기에 농민들은 전쟁과 기아, 곡식 반출이라는 삼중고를 겪으면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기근으로 적어도 300만 인구가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3년에는 메뚜기떼의 습격과 대홍수가 이어졌다. 농토와 곡식들이 싹쓸이 당했고 허난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 변해 버렸다. 재난은 여러 해를 거듭하며 연이어 찾아왔던 것이다.
<대지진>이 묘사하고 있는 1976년 탕산(唐山) 지역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참상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탕산 대지진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중국 역사상 최대 재난이라고 부르고 있다. 1976년 7월 28일 허베이성(河北省) 탕산에서 진도 7.8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시내에서 지진이 일어난 탓에 피해 상황이 상상을 초월했다. 지진이 미친 범위가 전 중국 국토의 1/3이 넘는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게다가 한밤중에 일어난 지진으로 많은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24만 2천 명이 사망하고 16만 4천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영구적 장애를 입은 사람이 1700여 명에 달했다. 지진이 있고 나서 두 달쯤 뒤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한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까지 사망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사람들은 지진을 일종의 전조로 해석했던 것이다.
영화는 지진으로 무너진 잔해 속에서 아들과 딸 중 하나만을 구해야 하는 절박하고 기구한 운명에 놓인 어머니, 결국 어머니로부터 선택받지 못하지만 구조된 뒤 인민해방군에게 길러진 딸이 둘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탕산 대지진을 우리 뇌리 속에도 아직 생생한 2008년의 원산(汶山) 지역 대지진과 겹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익히 보고 듣는 대로 땅이 넓고 큰 나라 중국은 자연재해의 규모도 작지 않다. ‘규모의 재난’이라고나 할까.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의 약 50배에 이르는 국토 면적에 사막과 고원, 삼림과 평원, 호수와 해양 할 것 없이 온갖 지리적 현상을 망라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역사 이래로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대륙을 덮쳤을 것이다. 먼 옛날 신화와 전설 속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우(禹) 임금이 숨 쉬는 흙(息壤)으로 홍수를 막았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예부터 재난을 막아내지 못하면 민심이 어지러워지곤 했듯이, 재난을 막아내는 일은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정치 행위’다. 그런 점에서 1942년의 대기근과 1976년의 대지진에 대한 사회주의 중국의 태도는 미묘하게 엇갈린다. 1942년의 대재난에 대해서 중국 공산당은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국민당의 오판과 중일전쟁이 방어막이 돼 줬다. 오히려 당시에는 국민당에 대한 민심 이반이 공산당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으리라는 관찰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1976년 상황은 달랐다. ‘천국’과도 같이 체제와 제도가 완비된 사회주의에서 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죽어나갔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었다. 인명의 희생을 넘어 체제에 대한 도전은 공산당으로서는 겁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탕산 대지진과 관련된 수많은 문서와 기록 등이 폐기되고 그 사건을 입 밖에 내는 일조차 철저하게 금기시됐다. 문화대혁명의 암운이 끝자락에 드리워 있던 시절, 사회주의는 그런 방식으로 대지진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영화라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선보이기까지는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였다. 각종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해 더 이상 현장을 은폐할 수 없는 새로운 지진이 발생하고, 그것이 꼭 사회주의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난 이후였던 것이다.
펑샤오강은…
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출하던 펑샤오강(馮小剛)은 1995년 <영원히 잃어버린 내 사랑>(永失我愛)이라는 영화로 감독에 데뷔했다. 이후 <갑방을방>(甲方乙方), <꼭 만나야 해>(不見不散), <끝도 없는 이야기>(沒完沒了)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중국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감독이 됐다. 영화들은 대부분 중국식 코미디 장르로 내수시장에 잘 먹히는 상업영화들이었다.
장이머우가 화려한 중국을 뽐내듯 서양 관객들에게 자랑했다면, 펑샤오강은 소소한 중국인의 일상을 코믹한 터치로 그려냈다. 최근에 들어 <야연>(夜宴), <집결호>(集結號) 등 중국식 블록버스터로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렸으나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 영화계에서 영향력은 여전히 건재하다.